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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원 Apr 06. 2022

2000년대 발라더 (1) 이극근과 진혁신

2부, 씨줄, 홍콩 발라드 (2-1)

 홍콩 반환 직후의 발라드 가수들의 활동 양상은 공식화할 수 있다. 90년대부터는 홍콩 연예계가 포화하여 새로운 스타가 배출될 공간이 없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떠나야만 새로운 스타가 등장할 수 있었다. 1997년 홍콩 반환과 경기 침체는 사대 천왕을 비롯한 스타들이 중국어권(대륙과 대만, 동남아시아) 활동을 위해 홍콩을 떠나게 했는데, 그때 새로운 발라드 가수들이 주목받았다. 1998년 전후에 최고 수준의 스타로 떠오른 니콜라스 제, 조단 찬(Jordan Chan, 陳小春, 진소춘)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명성을 얻자마자 금새 홍콩 활동을 줄이고 대륙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다른 스타의 중국 활활동-신인 발견-스타로 부상-중국 활동”이라는 공식, 2000년대 초에 이를 벗어나는 가수는 거의 없었다. 이 공식은 홍콩 대중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가수가 은퇴하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사람들의 가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지만, 이 시기 홍콩에서는 반대로 가수가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돌려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이후의 칸토 팝 가수들 역시 이 공식을 어느 정도 따랐다. 그러나 홍콩 활동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칸토 팝 음악계에 대한 애정 때문인 가수도 있었고, 팬들이나 홍콩에 대한 애정 때문인 가수도 있었다. 홍콩 인기 가수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는 데서 나오는 이익(여전히 중국 대륙의 대중은 홍콩 문화에 대한 선망이나 광동화 음악에 대한 낭만적 인상을 지니고 있다)을 유지하겠다는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완전히 홍콩을 떠나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식으로 홍콩인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하켄 리, 이슨 찬, 레오 쿠, 미리암 영, 조이 융 이 다섯 명의 스타는 여전히 칸토 팝과 관계하는 2000년대 최고의 가수들이다. 이들을 살펴봄으로써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가단의 흐름도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켄 리의 데뷔 당시 모습

 하켄 리(Hacken Lee, 李克勤, 이극근)는 1986년에 데뷔했다. 이듬해인 1987년 ‘반달의 세레나데(月半小夜曲)’를 불러 “십대경가금곡” 상에 이름을 올린 그는 레슬리 청(장국영)의 은퇴 후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그러나 1993년, 최고 인기 남가수 투표에서 레온 라이(여명), 애론 쿽(곽부성) 등에 밀려 사대 천왕에 들지 못하였으며, 다른 신인 가수들에 비해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발라드에서 더욱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었는데, 댄스 곡이 점차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손을 놓지 말아요' 뮤직비디오. 하켄 리는 2000년대 초반 다시 인기를 누리게 되며 노란색으로 머리를 염색한다.

 한동안 사회자로 활동하던 하켄 리는 댄스 곡 열풍이 끝나가던 2001년, “흩날리는 꽃(飛花)”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동명의 타이틀 곡은 흩날리는 눈꽃처럼 짧지만 아름다웠던 사랑을 노래한 곡으로 한결 성숙해진 그의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이듬해 발표한 “손을 놓지 말아요(愛不釋手)”은 2002년 홍콩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홍콩 최고 가수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중국 활동도 빠르게 시작된다. 2003년에는 중국의 유명 피아니스트 랑랑(郞郞)의 반주로 “나는 노래를 잘 하지 못해요(我不會唱歌)”라는 곡을 불렀으며 중국 국영 매체인 CCTV의 무대에 올랐다. 또한 일찌감치 대륙에 진출한 선배 가수 알란 탐과 함께 “조런야우레이(左麟右李)”라는 팀을 결성하여 순회콘서트에 오른다. 그는 홍콩에서의 앨범활동도 계속하여 2005년 발표한 ‘서울의 어쩔 수 없던 사랑(情非首爾)’과 2006년의 ‘틴써이와이의 성(天水圍城)’은 광동어의 매력을 잘 살린 가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인기의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2008년부터는 다시 콘서트 투어에 나섰으며 방송 출연도 늘게 되었다. 2010년대부터는 중국 방송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홍콩에서도 종종 신곡을 발표하였으며, 2019년 방영된 중국 둥팡위성 방송국의 음악 경연 프로그램 “우리의 노래(我門的歌)”에서 칸토 팝 곡들을 불러 우승하며 칸토 팝 가수의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슨 찬

 이슨 찬(Eason Chan, 陳奕迅, 진혁신)은 홍콩 발라드의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재키 청(장학우)이 “가신(歌神)”이라고 불린다면 이슨 찬은 그 바로 아래인 “가왕(歌王)”으로 불린다. 그의 목소리는 깔끔한 진성이 진한 인상을 주며 그의 곡에 대한 해석력도 훌륭하다. 칸토 팝 발라드를 담기에 좋았다. 이런 기량에 반한 람젝, 웡와이만 등 많은 작사가가 그에게 좋은 가사를 주어 그는 늘 광동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곡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1995년 TVB의 신인발굴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그는 다른 많은 스타들로 인해 관심을 받지 못하자 대만에서 활동하며 중국어를 연습하고 1997년에 홍콩에 돌아온다. 이때 발표한 ‘나와 늘 함께(與我常在)’로 처음 주목받은 그는 이듬해 나온 ‘행복의 대관람차(幸福摩天輪)’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2000년부터는 람젝이 작사한 ‘Shall We Talk’, ‘노래방의 왕(K歌之王)’(2001), ‘내년 오늘(明年今日)’(2002) 세 곡을 연달아 발표하는데 이 곡들로 그는 4대 천왕을 넘어서 칸토 팝 발라드의 제왕으로 떠오른다. 이 곡들에서는 읊조리는 듯한 창법이 주로 사용되는데 테크노 음악에 질려가던 홍콩인들에게 그의 잔잔한 분위기는 참신하게 받아들여졌다.  2003년에는 ‘내년 오늘’을 ‘십년(十年)’이란 제목의 보통화로 번안하여 대륙에서도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내년 오늘', 홍콩을 대표하는 이별 발라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어서 2005년, 네 곡의 활동곡이 포함된 “U87”이 발매된다. 이 앨범은 1년 내내 전 홍콩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음악적 성숙이 느껴지는 ‘포도가 익을 때(葡萄成熟時)’와 당대 유미주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시를 인용하여 몰락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석양은 무한히 좋은데(夕陽無限好)’는 칸토 팝 발라드의 정수로 꼽힌다. 그러나 칸토 팝 발라드의 대표로 불리는 곡은 2006년에 발표한 ‘후지산 아래서(富士山下)’이다. 람젝이 가사를 제공한 이 곡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랑의 어려움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슨 찬의 깊이 있는 곡 이해와 담담하게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듣는 이가 깊은 무상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홍콩 대중은 이 발라드 천재를 사랑했다. 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201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한 중국 활동의 바쁨 속에서도 매년 1곡이라도 꾸준히 광동어로 곡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2014년에 발표한 ‘무조건(無條件)’은 특히 사랑을 받아 이슨 찬이 홍콩에서 활동을 많이 하지 못했음에도 오랜 기간 차트 1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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