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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원 Apr 13. 2022

장기지속 2000년대 : 2010년대 칸토 팝 발라드

2부, 씨줄, 홍콩 발라드 (3)

 앞의 장에서 살펴본 가수들은 대체로 2010년대까지 여전한 인기를 누렸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2010년대에는 가수가 없었을까? 적어도 홍콩의 청년층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대중문화를 이끄는 힘은 로큰롤의 등장 이래 10대, 20대의 젊은 세대에게 있어 왔다. 이들 세대는 안정보다는 변화를, 순응보단 저항을 선호한다. 그렇기에 지난 세대의 음악이 아무리 훌륭한 음악이라도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한다. 2000년대 후반 홍콩 청년층을 자극한 새로운 것은 K 팝이었다. 한국 아이돌의 안무와 빠른 노래는 발라드 위주의 당대 칸토 팝 음악계에서 볼 수 없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K 팝 음악과 이를 모방한 중국 아이돌에 열광했다. 이들의 시선이 홍콩으로 돌아온 것은 2014년 우산 혁명으로 홍콩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2018년 방영된 아이돌 발굴 프로그램 “전민조성(全民造星)”이 흥행한 뒤의 일이었다.  

   

 게다가 2011년 일어난 홍콩 음악연맹 사태(이하 HKRIA 사태)는 칸토 팝에 대한 관심에 큰 타격을 주었다. 홍콩 최대의 방송사인 TVB와 홍콩 4대 음반사가 저작권료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되는데, 이에 음반사들을 중심으로 한 홍콩 음악연맹이 TVB의 음악프로그램 “경가금곡(勁歌金曲)” 및 그 연말 시상식을 보이콧하기로 한 것이다. 제이슨 찬과 힌스 청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한 순간에 커리어가 잠시 중단되었다. 최고의 스타들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관심 자체가 줄었다. TVB는 자사 오디션을 통해 등장한 가수를 과도하게 밀어주는 등의 방식으로 음악계에 반격하고자 했으나, 인기로 이어지지 않았다. 기량이 다른 스타들에 훨씬 못 미쳤으며 사람들의 관심 자체가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2010년대 말까지 홍콩에서는 HKRIA 사태 이전부터 활동했던 가수들이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의 뛰어난 기량 덕이기도 하지만, 신인들의 인지도가 낮은 탓도 있다. 이 장에서는 HKRIA 사태 이전에 등장했던 홍콩의 마지막 대스타들을 중심으로 오늘까지 활동하고 있는 가수들을 다루고자 한다.


제이슨 찬, 첫 정규 앨범인 "First Experience"

 제이슨 찬(Jason Chan, 陳栢宇, 진백우)은 2000년대 말을 장식한 홍콩 최고의 스타이다. 캐나다 화교 출신인 그는 2006년 첫 곡 고집(固執)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알앤비 스타일의 곡과 그의 목소리가 잘 어우러졌을뿐더러, 당시 중국어 가요권에서 왕리홍(Wang Leehom, 王力宏, 왕력굉), 피시 렁(Fish Leong, 梁靜茹, 양정여) 등 화교 출신 가수들이 큰 인기를 끌었기에 그에게 관심이 쏠렸다. 이듬해 발매한 첫 정규앨범 “First Experience”의 타이틀 곡 ‘영구보존(永久保存)’은 바로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등장과 동시에 최고의 가수로 떠오른 것이다. 2008년 ‘I Miss You’, 2009년의 ‘I Will Be Loving You’와 ‘서로를 가려요(你瞞我瞞)’ 모두 그해를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서로를 가려요’ 뮤직비디오


 승승장구하던 그는 2011년 HKRIA 사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맞게 된다. 그의 음반사인 Sony가 HKRIA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곡을 발표해도 대중과 소통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사태에 좌절하지 않고 끊임 없이 신곡을 발표했으며 2015년 발표한 앨범 “Escape”로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다시 홍콩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다. ‘고개 돌리며 웃음을(回眸一笑)’과 ‘소식은 없었지만, 잘 지냈나요(別來無恙)’ 두 곡은 더 성숙해진 노래 실력으로 홍콩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때 그는 방송에 출연하지 못하지만, 최고의 가수라는 뜻으로 네티즌들이 무협지 속 인물에 빗대어 지은 “은둔고수(隱世高手)”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이어서 2016년에 낸 ‘이별 앞에서(告別之前)’와 ‘너 없이, 난 아무 것도 아니야(沒有你,我甚麼都不是)’, 2017년의 ‘바벨탑(巴別塔)’ 모두 큰 사랑을 받았으며 2017년 “질타” 최고 인기가수 상을 수상한다. 그는 꾸준히 홍콩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인기도 여전하여 2020년에 발표한 ‘감정이란 게(感情這回事)’가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힌스 청

 힌스 청(Hins Cheung, 張敬軒, 장경헌)은 2022년 현재까지 홍콩에서 발라드의 1인자로 손꼽히는 가수이다. 그는 광저우 출신으로 1997년부터 광저우에서 가수로 활동하였으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이에 2002년 홍콩으로 이주하여 유니버설 음반과 계약한다. 그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홍콩 활동 첫 해에 발표한 ‘끊어진 곳(斷點)’과 ‘My Way’ 모두 그 매력을 잘 담아낸 곡이다. 홍콩 대중은 그의 호소에 짙게 빠져 들었고 ‘My Way’와 그 이후에 발표한 ‘기대(期待)’(2003), ‘Blessing’(2004), ‘Hurt So Bad’(2005) 모두 차트 1위를 기록한다. 그는 2007년 발표한 ‘독한 사랑(酷愛)’로 처음 “십대경가금곡”에 이름을 올리며, 2008년 ‘벚꽃 핀 나무 아래서(櫻花樹下)’를 통해 최고의 발라드 스타로 자리매김한다.


‘벚꽃 핀 나무 아래서’


 그러나 그는 2011년 중국 당국과 음악 스튜디오 건설 등으로 큰 갈등을 빚었으며 HKRIA 사태까지 겹치며 커리어에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2014년 발라드곡 “청춘은 늘 머물러(青春常駐)”로 재기한다.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을 담은 이 곡은 그해 각종 시상식을 모두 휩쓸었다. 힌스 청은 이때부터 제2의 전성기를 맞는데, ‘사람을 찾아서(找對的人)’를 발표한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던 2017년을 제외한 네 해 동안 “질타”의 최고 남가수 상을 수상한다.


 그는 풋풋한 감정을 표현한 발라드가 특히 어울리는데, 어린 시절의 사랑을 주제로 다룬 ‘다른 반 친구(不同班同學)’(2016), ‘백 년의 나무(百年樹木)’(2018) 등의 곡이 큰 사랑을 받았으며, 2021년 발표한 ‘예쁜 내 사람(俏郎君)’은 홍콩 모든 음악방송의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케이 제

 케이 제(Kay Tse, 謝安琪, 사안기)는 발라드만으로 홍콩 최고의 여가수로 떠오른 마지막 가수이다. 그녀 이후에도 많은 대단한 여가수가 등장했지만, 아직 새미 쳉, 미리암 영, 조이 융, 케이 제와 같이 한 해의 아이콘과 같이 주목받은 이는 없다. 그녀는 2005년 데뷔하였으며, 2006년에 ‘발표한 그리움 가득한 발렌타인데이(愁人節)’로 처음 주목받았다. 격정적인 앞선 시대의 여가수들과 달리 감정을 절제하며 이야기를 하는 듯한 창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람젝, 웡와이만 등의 작사가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2000년대 중반, 람젝과 웡와이만은 가사의 예술적 경지를 끝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람젝은 이슨 찬에게 준 ‘석양은 무한히 좋은데’에서 고전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크게 사랑받았으며, 웡와이만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벗어나 홍콩의 사회와 삶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하였다. 이들은 음악 감상자가 선율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가사를 받아들이며 이해하기를 원했고, 이에는 케이 제의 창법이 적합했다. 케이 제의 발음이 정확한 것도 장점이었다.


 2007년, 람젝이 중국 전국시대의 전설적인 여인을 주제로 작사한 ‘종무염(鍾無艷)’이라는 곡이 큰 인기를 끌었으며 2008년 ‘청첩장 거리(囍帖街)’는 그녀를 최고의 여가수로 떠오르게 한다. 이 곡은 웡와이만이 홍콩 반환 이후 중국인의 투기로 인해 극심해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여러 거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느낀 아쉬움이 담아 작사한 곡이다. 케이 제는 아련함을 잘 담아 이 곡을 불렀으며 홍콩인들은 그녀를 홍콩과 함께 하는 가수라며 찬사를 보냈다. 이 곡은 그해 모든 방송사 음악프로그램에서 “올해의 노래”로 뽑히기도 했다. 이후에도 케이 제는 두 작사가의 시적 문장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축영대(祝英台)’(2009), ‘비 온 뒤 하늘은 흐리고(雨過天陰)’(2010), ‘라쇼몽(羅生門)’(2015, 싱어송라이터 주노 막과 듀엣), ‘힐우드 로드(山林道)’(2016) 모두 좋은 성적을 내었다.


‘청첩장 거리’ 뮤직비디오



 그녀는 홍콩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곡들에도 다수 참여했는데 특히 2014년 우산 혁명 때 발표한 곡들이 홍콩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참여를 호소하는 ‘혼자 사는 마을(獨家村)’과 천안문사태를 은유한 ‘나라의 내일(家明)’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스타들과 함께 ‘우산을 들며(撐起雨傘)’이라는 곡을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2016년 “질타”의 최고 여가수상, 2019년 “십대중문”의 최고 여가수상을 받는 등 여전히 홍콩인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 표는 2000년부터 2019년까지 20년간 “질타” 음악의 최고 남가수상, 여가수상을 수상한 가수들을 담고 있다. 앞 장과 이번 장에서 다룬 2000년대의 가수들이 여전히 최고의 지위인 것이 확인된다. 젊은 세대가 K 팝과 중화권 다른 지역의 음악으로 눈을 돌리며 새로운 스타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니스 비달(Janice Vidal, 衛蘭, 위란), 영아(Vincy Chan, 泳兒, 영아), 피오나 싯(Fiona Sit, 薛凱琪, 설개기) 등이 2010년대 초에 새롭게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이들도 2000년대 말에 데뷔한 가수였다. 게다가 이들은 기량에 있어 앞 세대 가수들에 미치지 못했으며 활동 무대도 좁아졌다.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가수들을 길러내기 시작하며 홍콩 스타가 진출할 공간도 줄어들었던 것이다. 2010년대에 홍콩에서 떠오른 가수는 TVB에서 진행한 오디션 프로그램 “더 보이스(超級巨聲)”를 통해 데뷔한 알프레드 후이(Alfred Hui, 許定鏗, 허정갱)와 제임스 응(James Ng, 吳業坤, 오업곤), 그리고 유명 무협배우 아담 쳉(Adam Cheng, 鄭少秋, 정소추)의 딸로 가수 데뷔 전부터 방송에 꾸준히 출연했던 조이스 쳉(Joyce Cheng, 鄭欣宜, 정흔의) 정도였다. 사람들은 음반사들이 내놓는, 자신의 특색 없는 발라드 가수들에 더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결국, 2000년대 홍콩 음악은 듣는 사람들만이 듣는 "장기지속 2000년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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