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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송 Jan 13. 2020

나는야, 응원단장

뭐든지 자신있는데예

약 2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는 나를 등에 업고 레코드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음악에 덩실덩실 흔들어대는 나를 보고 매우 당황하셨다고 한다.

그때까진 몰랐다. 이 아이가 이걸로 밥벌이를 하겠다고 선언할 것이라고는. 이후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부채춤을 소화하고(부채춤을 춰서 매우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에 입학 후 걸스카우트 장기자랑에서 매년마다 친구들과 그룹을 결성해 춤을 췄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다. 불교신자였던 엄마는 나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매년마다 절 수련회를 보내곤 했다. 혼자 가기 싫은 마음에 친구들을 얄금얄금 꼬드겨 4명이서 함께 가게 되었다. 뜻밖에 소식이 들려왔다. 수련회 프로그램 중 장기자랑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다. 아싸! 친구들과 바로 샤크라의 한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가라 가라 가라 확 갇혀 내 안에 갇혀 확 갇혀~ 가라 가라 확 갇혀 내 안에 갇혀 확 갇혀’ 이 가사 때문일까. 아무 반응 없는 스님들의 표정에 절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수련회는 마지막 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춤만 잘 추면 왠지 섭섭하다. 그래서 성대모사도 항상 연습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특징을 콕 집어내 성대모사를 하였는데 나랑 가장 잘 맞는 개그콤비인 단짝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쉬는 시간마다 반에 들어가서 순회공연을 하러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학예제 때는 친구와 짧은 콩트를 준비해 선생님들의 성대모사를 하였다. 그야말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며칠 후, 아침 조례시간이 끝나고 교무실을 가는데 문이 닫힌 상태로 교장선생님이 마이크로 선생님들께 말씀하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한 채로 귀를 갖다 대어 엿듣기 시작했다.

“한 학생이 성대모사하는 것을 보고 선생님들이 어떻게 수업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대충 이런 얘기였다. 재미로 하는 성대모사가 어른들에게는 다르게 비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자제하려고 하였으나 여전히 나는 성대모사로 친구들의 배꼽을 책임졌다.




이 재능 덕분에 학창 시절 체육대회를 할 때면 항상 응원단장을 맡았다. 어떻게 하면 다른 반들보다 우리 반의 응원가를 독창적으로 돋보일 수 있을까? 달리기, 피구, 팔씨름 등 대표선수를 맡은 친구들에게 더 큰 기운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매년마다 하는 운동회에서 응원단장을 맡게 된 나에게는 큰 숙제였다. 나름 진지했다. 열심히 응원하는 친구들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춤추고 있는 나를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느새 학교에서 친구들의 웃음을 책임지게 된 나는 당연히 공부와는 멀어지고 있었다. 특히 수학 점수는 바닥을 쳤다. 엄마는 성적표를 보시고 이제는 그러려니 하 놀라지도 않으셨다. 신기하게도 그런 나를 한 번도, 단 한 번도 야단치신 적이 없다. 나를 향한 엄마의 인내와 신뢰가 있었기에 학창 시절 동안 춤과 노래로 불태울 수 있었다. 정말 한없이 불태웠다.

누군가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것이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이었기에 지금도 그때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응원가를 불러 주고 싶은 영원한 응원단장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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