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학선 연출이 한 달 훌쩍 지난 생일선물로 건네준 커피를 내려 마신다. 콩을 씹어 먹기는 어려우니까. 의미롭게 물을 끓여 바스러진 몸에다 뜨거운 온도를 끼얹는다. 멀리서 와 여기에서 무너지는 타국의 향기를 끌어안고 물은 90도 이하로 쪼로록 낙하한다. 이것 참, 취미로 붙인다면 안성맞춤인 듯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을 듯, 아침에 한가한 고요를 느낄 여유가 없어진 지 너무 오래인데, 커피콩을 갈고 종이에 받쳐서 물을 다 내리고 제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어도 무턱대고 앉아서 커피향을 마시는 15분. 이 정도면 대만족이다. 1:17 비율로 커피를 마시는 이 시간은 얼마나 나를 희석해 줄까. 삶에서, 얼마나 멀리, 가볍게, 향기롭게, 잘 내려놓을까.
순배야, 멀리 있는, 우진아, 대낮에 거기에 가고 싶은, 그리고, 우리들, 여보게들 얼굴 본 지 오랜 친구들아! 오늘도 그대들과 그대들 마음의 배후까지 안녕을 빌고 또 빈다.
문장 하나를 붙들다가 또 지운다. 이제는 낡은 혈관, 수척해진 책을 봉인하는 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맨 밑으로 떠내려간 제목을 하염없는 시간으로 덮고 모른 척, 지금 당장만을 살고 표면으로 걷는 삶이면 된다. 겨울이든 봄이든 여전히 시간은 속절없고, 사람을 지우는 일도 꼭 그러하다. 누군가 나를 지울 때처럼, 우리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두 번 다시 들춰보지 못하는 일, 그럴 만큼 현재가 시급한 것. 나는 자주 내 앞의 삶과 불화하고 너는 내 등뒤에서 일몰처럼 그윽하게 혹은 너그럽게 사라지면 된다, 아픔도 지루해지면서.
김원 작가의 희곡, 만선! 을 깊게 읽다가 꼴딱 새벽을 지났다. 달랑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난 아침에 잘 도착해야 오늘의 간단 촬영을 잘 마칠 수 있는데, 집을 나서기 전에, 어제 당신이 꺼낸 문장이 나를 들깨운다.
생각은 은하수처럼, 표현은 북극성처럼!
생각이야 꽃무릇처럼 핀다고 해도, 결국엔 밝고 분명한 별처럼 오롯하게 한밤중에 머물 것!
이제는 우리 그럴듯하게 작별하자! 어떤 문장들이 드글드글한 책과는 이별하고, 어떤 말들이 가득가득한 얼굴과도 이별하고, 이제 희곡 ‘만선’하고도 영영 이별하자!
파도의 등껍질이 부풀고,
노래 한 곡 끝날 때까지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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