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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스나 Oct 28. 2022

아버지의 훈장

“그 소위는 결혼한 지 보름밖에 되지 않는 새 신랑이었지”

                       

 나의 친정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이다. 그것도 참전 상이용사이다. 이렇게 말하면 당연히 자랑스럽고 비장한 느낌이 들어야 할 텐데 우리 가족은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조차도 그걸 느껴본 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려서 우리 집 방구석에는 꽃핀이라던가 리본 같은 것들이 많이 굴러다니곤 했다. 딸들이 득실거리는 집안이라 몸치장하는 장신구는 발끝에 차이기 일쑤고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기도 많이 했다. 그중 그 누구도 제 것이라고 나서지 않는 임자 없는 물건이 있었다. 색색의 실을 꼬아 가느다란 네모로 만든 그것은 어찌 보면 예쁜 구석도 있어 나는 그것을 책상 서랍에 간수했다. 그런 것들이 다른 색깔로 두어 개 더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을 어떡하든 써먹으려고 애썼다. 한창 모양내기에 열중인 예닐곱 계집아이로서 어딘가 품위 있어 보이는 그 장신구가 여간 맘에 드는 게 아니었다. 머리에 꽂아보기도 하고 옷깃에 끼워보기도 했다. 그러나 옷핀도 없고 집게도 없이 이상한 나사만 하나 달려 있으니 도대체 착용이 불가였다. 그래도 색색의 조화가 어딘가 모르게 처연한 데가 있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왠지 엄숙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건 아버지의 훈장이었다. 나중에 커서 무슨 기념식 같은 때에 군인들 가슴팍에서 그걸 봤을 때의 감회란...... 물론 대단한 무공훈장은 아닐 테고 그저 국가가 한 개인에게 참전과 생존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작은 표식일 것이었다. 아버지는 6.25의 한 전투에서 오른쪽 팔뚝에 총상을 입었다. 그 총상이 오른쪽 팔의 신경을 건드려 오른쪽 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평생 펴지지 않았다. 그 모양새가 마치 권총을 쥐고 있는 형국이라 나는 그 구부러진 손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아직 전투 중인 느낌을 받곤 했다. 근데 아버지의 팔을 관통한 총알은 그것으론 성이 안 찼던지 뒤에 있던 소위의 가슴으로 날아가 박혔다. 

 “그 소위는 결혼한 지 보름밖에 되지 않는 새 신랑이었지”

 아버지는 술을 한 잔 마시면 그를 추억했다. 그리고는 어린 딸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원호대상자로 등록하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 원호 혜택이라는 것이 미미한 탓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부상 또한 미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평생 펴지지 않는 손가락이지만 그저 수저를 들거나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불편한 정도이니 그 정도로 원호 대상이 될 것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소위 때문이었다고, 나중에 아버지는 말했다. 아버지는 그 소위가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 총알이 날아온 거리를 감당할 힘이 없어 아버지의 팔뚝에 박히고 말았다면 그 새신랑 소위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오른쪽으로 한 치만 비켜가 있었다면 그 새색시 대신 나의 엄마가 전쟁미망인이 되었을 것이었다. 물론 나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고. 

 “그 사람이 살았으면 지금 마흔 살일 텐데...”

 그 나이는 아버지의 술 한 잔과 더불어 늘어갔고 그 옆에서 나는 얼굴을 알 수 없는 한 젊은 소위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가슴 한 켠에는 그 소위를 위한 묘비를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라고 말하면 너무 과다한 수식이 될지 모른다. 아버지는 그저 매일 저녁 마시는 반주가 가족들한테 눈치 보여 핑계를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국가가 준 훈장을 이리저리 발에 차이게 굴렸던 것이다.    

 나이 80이 되어서도 자전거 타기를 즐겨하던 아버지는 그로 인한 몇 번의 사고로 고관절 수술을 두 차례나 하게 되었다. 노환과 수술이 겹쳐서인지 기억력과 인지능력의 감퇴, 즉 치매 현상이 보이자 자식들은 올 것이 왔다, 고 큰 걱정에 사로잡혔다. 아버진 집 주소라던가 주민등록번호, 자식들의 이름, 고향까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내게 다소 출중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져 가는 기억의 바닥에 무의식으로나마 남아있는 어떤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일찍 가장이 되어야만 했으니까)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첫사랑의 여인(뭐, 엄만 이미 돌아가셨을 때니까 문제 될 건 없고) 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게 떠오른 건 그런 감상적인 것이 아닌 ‘전쟁’이었다. 나는 멀뚱멀뚱 쳐다보는 아버지에게 군번을 물었다. 가족들이 나의 질문을 의아해하는 사이 아버지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긴 숫자의 번호를 댔다. 반 세기가 넘게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이 없는 숫자였다. 흐리멍덩했던 아버지의 눈에 살짝 정신이 돌아와 있었다. 

 혹시나, 하고 보훈처에 확인해 보니 그 군번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맞았다. 그리고 그게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기억력을 회복했고 뒤늦게 보훈 대상으로 등록하니 적지 않은 연금도 나왔다. 물론 그 연금을 몇 해 타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국립 현충원 납골원에 안치되었다. 가끔 아버지를 보러 현충원에 가면 끝없이 펼쳐진 묘비의 도열을 볼 수 있다. 그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그들이 흰 묘비에 이름 석 자를 남기고 나라의 아들로 잠들어 있다. 묘비 옆으로 잘 조성된 산책길 따라 선캪을 쓰고 조깅하는 인근 주민들을 보면 이 두 풍경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속으로 아버지의 군번을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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