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게는 옆에 서서 자신이 벗은 허물을 느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집엔 남들이 키우다 물려주거나 내가 좋아서 기르게 된 애완동물들이 많이 있었다. 하루 종일 몸치장 하느라 물만 튀겨대는 문조서부터 새끼를 엄청 낳는 햄스터, 소라게, 열대어 등등이 우리 집을 거쳐 갔다. 그들 모두 생명의 경이로움과 재미를 선사했지만 그중 나의 사랑을 받은 건 단연 소라게였다. 소라 껍데기를 집 삼아 살기 때문에 집게라고도 불리는데 몸은 소라껍데기 속에 숨기고 긴 다리로 조용히 걷는다. 그 걸음이 철학자의 산책을 닮아 무척 사색적으로 보였다. 어느 날 나는 게가 사는 유리 어항을 들여다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집게 옆에 또 한 마리의 게가 있는 것이었다. 그 게는 마치 투명한 크리스탈로 정교하게 만든 조각 작품 같았다. 혹시나 게가 유체이탈하여 영혼이 그 형태를 드러낸 것은 아닐까? 잠깐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신비로운 충격에 얼이 빠져 있던 내게 애완 동물 가게 주인의 한 마디 말이 떠올랐다.
'허물!'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그것은 게의 허물, 즉 껍데기였다.
집게를 살 때 주인으로부터 일 년에 한번 허물을 벗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냥 뱀 허물처럼 각질 벗어지는 정도로 생각했지 이토록 온전한 형태 그대로인 껍질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집게는 옆에 서서 자신이 벗은 허물을 느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는 쌍둥이만큼 키우기 힘들다는 연년생 두 아들이 있다. 적은 나이 차이로 인해 어려서부터 둘은 자주 들러붙어 싸우곤 했다. 장난감을 갖고도, 과자를 갖고도 치열하게 싸웠다. 어느 땐 읽지도 않는 동화책을 단지 상대방이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뺏고 뺏기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럴 때 엄마는 형제에게 있어 최초이자 유일한 판관이 된다. 형이니 양보하라고만 할 수도 없고 동생이니 참으라고만 할 수도 없다. 솔로몬의 지혜가 절실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빨리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났으면 싶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은 여러 가지로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학교는 선생님들이 대충 비위를 맞춰 주는 유치원이나 학원과 다르다. 그래서 걱정 많은 학부모들은 대열 속의 자기 아이를 쳐다보느라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되라는 판박이 얘기일 게 뻔하니...그러나 그 날의 말씀은 좀 달랐다. 우선 짧고(!) 명료했다.
“한 인간이 성장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를 들라면 첫째, 부모이고 둘째는 학교, 그리고 셋째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라고? ‘훌륭한 아이로 키우려면 부모의 책임이 절대적입니다.’ 와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자기 자신’ 이라니... 코흘리개 학생들에겐 너무 어렵고 학부모가 듣기에도 생소했다. 아직도 아침밥을 떠먹여야 할 때가 있는 아기들 아닌가? 그러나 그 말은 아직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학부모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말씀은 이어졌다. “이제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도록 부모는 도울 뿐이고...” 그것은 가장 짧으면서도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교장님 말씀이 되었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서...’
부모가 자기 운명의 8할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정도로 사실 부모는 인생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부모는 유전과 환경의 직접적인 제공자이다. 학교는 아이가 생전 처음으로 만나는 사회 집단이고 ‘선생’은 학생들에게 모든 도덕적 잣대가 되는 존재이다. 이 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보듯 선생은 교실에서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의식 속에서 가치판단을 규정짓는다. 좋은 선생은 아이를 거듭나게 한다. 나 자신을 포함, 두 아이를 키워오면서 겪은 수많은 선생님들 중에 ‘페스탈로찌’도 있었고 그냥 직업적인 교사도 있었고 ‘반면교사’도 있었다. 때론 좋은 교사가 부모보다 더 중요하다. ‘헬렌 켈러’에게 ‘앤 설리반’ 선생이 그랬듯.
그런데 교장선생님은 셋째로 자기 자신을 들었다. 이는 모든 외부적인 조건 외에 나 스스로 겪어나가는 힘의 중요성을 말했다. 한 인간의 형성이 단지 생물학적 유전과 환경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한 불만을 모두 부모와 사회 탓으로 돌린다.
“왜 나를 낳았어요?”
라던가
“이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고 간단히 책임을 전가한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틀렸다.
나는 아이들이 혹시 삶에 대해 불만을 갖고 ‘왜 나를 낳았냐’고 대들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말이 있다.
“그건 네가 헤엄을 잘 쳐서이지.”
그러면 아이는 물을 것이다.
“헤엄이라니요?”
“네가 한 마리의 정자였을 때 말이다.”
이건 물론 기본적인 성교육을 하고 난 후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아버지에게서 엄마로 향하는 문이 잠시 열렸을 때 수많은, 대략 1억 마리라지? 그 많은 정자들이 열라 꼬리치며 헤엄치기 시작했고 거기서 네가 1등을 한 거야. 말하자면 태어난 것에도 자신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거지.”
다행히 두 아이는 그런 불만을 대놓고 말한 적은 없다. 아마도 그 정도의 반항적인 질문에 주눅(?)이 들 착한 엄마는 아니란 것을 진즉 알고 있었던 탓일 것이다.
어쨌든 부모를 잘 만나야 하지만 잘 만나서 다 좋은 것도 아니고 잘못 만났다 해서 다 나쁜 것도 아니다. 같은 밭에서 같은 비료를 먹고 자라도 혼자 썩는 놈이 있고 비료는커녕 물도 없는 비렁박토에서도 기를 쓰고 뿌리내려 열매까지 맺는 놈도 있다. 부모와의 만남은 모든 만남의 시작일 뿐이지 끝은 아니다. 왜냐면 부모의 영향력엔 한계가 있고 인간에겐 몇 번이고 거듭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성장은 부모나 사회가 아닌 내가 나 자신을 낳았을 때 온다. 집게처럼.
집게는 그 후로도 몇 번 더 허물을 벗었고 벗을 때마다 몸집이 조금씩 커져갔다. 집이 작아 보여서 조금 큰 소라를 넣어줬더니 늦은 밤 조용히 제 집에서 기어 나와 큰 소라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에겐 뭔가 새롭게 깨닫고 문득 자신이 어제와 다르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마치 허물을 벗고 그것을 바라보는 게처럼 어제의 나를 보는 것이다. 게의 허물은 한 나절만에 분해되기 시작했고 그 놈은 그것을 두 개의 앞발로 얌냠 먹어치웠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문득 느낄 뿐이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