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파트가 한약방 서랍장 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을 보러 갔을 때 젊은 주인은 우리를 보고 말을 더듬었다.
“저희 집에는 계단이 있어서 연로하신 분들은...”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푸른 잔디 파라솔 그늘에 서 있던 소년이 우리를 보고 고개를 까딱 인사했다. 초딩 1학년 정도나 되었을까, 어른스러웠다. 가정 교육을 잘 받았거나 집을 보러온 사람이라는 걸 알아챈 귀여운 직관일지도 몰랐다. 집을 내놓은 지 반 년이 지났는데 보러오는 사람이 없으니 부모는 아이들 앞에서도 걱정스런 대화를 많이 했을 것이다.
“알고 왔습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집은 작은 대지 위에 잔디를 많이 깔고 3층을 올린 새 건물이었다. 3층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되니 무릎 관절염이라도 있으면 생각할 수 없기도 했다. 그러나 뒤의 작은 언덕배기 숲과 낙락장송 소나무 군락에 마음을 뺏긴 나는 계단이 살벌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시골의 전원주택에서 살다가도 나이가 들면 도시의 아파트로 나와야 된다는 것이 노년 세대의 정설이다. 현관문만 걸어 잠그면 보안에 걱정 없고 아프면 달려가거나 실려 갈 거리에 큰 병원이 있는 아파트가 딱이라는 것이다. 백 번 옳은 말씀이다. 그런데 역주행을 한다고? 묘 자리 알아볼 나이에 시골집을 보러 다닌다고?
나는 자그마치 40년 동안을 아파트에서 살아왔다. 아파트는 밖에서 보면 직사각의 건물이 빽빽이 서 있어서 답답해 보이지만 도어락 누르고 들어가 문만 닫으면 세상 편했다. 단지 내다 볼 풍경은 중요하기에 이사 때마다 전망 좋은 집을 고르느라 애는 썼다. 시야에 초록색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렇게 편하게 살아왔음에도 어느 날 아파트가 한약방 서랍장 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3~40층짜리 아파트들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려면 숨이 막혀왔다.
“이사할까?”
남편은 내 말에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먼저 시골로 이사를 가자고 부추긴 건 그였으니까.
은퇴를 하고 하루 종일 메이저리그와 당구 채널에 묶여 있던 그에게 귀촌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주택에는 일이 얼마나 많다구.”
그러면서 연장 공구부터 검색했다. 그리고 1년 정도 집을 보러 산지사방 다닌 끝에 한눈에 쏙 들어오는 집을 만난 것이다.
지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목조 주택은 그동안 우리 부부가 열심히 공부해 온 ‘날림 공사’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는 않았다. 주인의 성격 탓인지 가구나 장식이 많지 않았고 내부의 색 선택이 매우 부드러웠다. 나선형의 계단도 그리 가팔라 보이지 않았다. 방마다 창문이 많고 창가에 비치는 풍광이 초록을 많이 담았다.
우리가 집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자 서너 살 된 꼬마아이가 뒤뜰에서 쪼르르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앙증맞기가 이를 데 없는 작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통통한 두 손가락은 여물지 못한 연두색 밤송이 가시를 꼭 쥐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날 계약을 했다.
“괴산?”
친구네가 귀촌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낯선 지명에 놀랐다. 그때까지 겨우 전국 8도의 도청 소재지 정도 이름만 알고 있던 주제에도 ‘괴’짜가 들어가는 도시 이름은 좀 괴상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 갈 동네는 ‘괴’도 아닌 ‘괘’였다. 괘랑리(掛囊里). 한자 표기도 어렵고 주소를 불러줄 때마다 ‘괘씸하다의 괘짜요’를 되풀이했다.
우리의 이사 소식에 주변의 반응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말로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살게 되어 좋겠다는 식의 덕담이지만 대체로는 ‘어쩌려고 늦은 나이에?’ 하는 우려였다. 시골서 살다 온 친구는 겁주는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한번 살아 봐!"
친구는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귀환했다고 했다. 내게 던진 경고도 그 뜻이리라. 불편함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게다가 산 좋고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은 없다지 않은가. 산과 물이 좋은 것에 대한 확신은 있었다. (진짜 산과 물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행복한 것 못지않게 편한 것을 갈망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명은 그 사실에 기반하면서 무섭게 발전해 왔다. 말에서 시작된 이동수단이 지금의 비행기를 지나 어떤 물체로 인간을 실어 나를지 지금으로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런 감을 잡느라 애쓸 만큼의 미래가 내게 별로 남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몇 년 전 선산의 묘를 이장하고 가족묘를 만들 때였다. 파묘를 하고 선대의 유골들을 수습하여 납골묘에 안치시킬 때 나는 이상하게도 사위스런 생각을 했다. 아파트를 떠나 땅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한 것 같다.
젊은 집주인은 늦은 나이에 주택으로 이사하는 우리를 매우 궁금해 했다. 대략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스케줄은 진부할 정도로 뻔한 것이니까.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나는 덤덤히 말했다.
“살고 싶은 집에서 허락되는 만큼 즐겁게 살다가 요양 병원으로 가려고요.”
그 말에 부동산 사무실이 쎄~한 공기에 휩싸였다. 팩트는 가끔 정나미 떨어지는 데가 있다. 나는 다만 ‘즐겁게’에 방점을 찍었을 뿐이었다.
“이사 가시는 곳이 아파트이신가요?”
이제 매도자가 된 그에게 내가 물었다. 사실 지은 지 3년 밖에 안 된 새 집을 두고 왜 이사를 하려는지 우리도 궁금하던 차였다. 어차피 도장도 찍고 했으니 이사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었다. 맞벌이에 아이가 또 태어나 학교 문제도 있고... 라는 말은 초장에 들었다.
“아뇨. 근처 주택으로 갑니다.”
그는 간단히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멀지 않은 곳에 교육 환경이 더 좋은 전원주택을 산 모양이었다. 취득세가 엄청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그의 입에서 ‘사실 와이프가 아파트로 가자고 해서요.’ 하는 등의 맥빠진 소리가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사를 와서 새롭게 맞닥뜨린 건 엄청 늘어난 부부 싸움이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차가 서로 양보 없이 지나치려다 옆구리를 긁고 본넷을 박고 하는 접촉사고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었다.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할 때에는 공간만 크고 작을 뿐이지 가구의 종류나 배치는 비슷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주택은 집주인의 의도에 따라 설계되었기 때문에 공간이 그리 일률적이지 않다. 공간의 구성이 달라지니 따라서 가구나 소품도 달라졌다. 그럴 때 버릴 것은 버리고 새로 살 것은 사야 하는데 내 껀 서로 못 버린다, 화분의 위치가 맞지 않는다, 거긴 못 박으면 안 된다, 그러다 집 꼴이 ‘자연인’ 이 된다며 악악댔다. 그 동안 이사 전후의 처리는 내가 주관했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그 자리를 넘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늙은 부부의 싸움은 러닝 타임이 짧았다. 남편이 풀숲에서 청개구리를 잡아다 보여주면 나는 금방 풀렸다. 집 주변에는 항상 재미난 것들이 우리의 화해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집 뒤의 언덕에는 수령이 꽤 된 소나무들이 ‘자태’라고밖에 할 수 없는 위용을 자랑하고 서 있다. 그런 나무들을 창밖으로 매일 본다는 것은 크나큰 호사(豪奢)이다. 큰 나무들이 많아서인지 새소리는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다. 맨발로 잔디 위를 걷는 것, 집이 떠나가라 음악을 크게 틀어놓아도 밖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 것, 들깨만 먹는 곤줄박이, 까치와 분쟁 중인 청설모, 항상 뒤뜰 구석에 짱 박혀있는 두꺼비, 창가로 날아드는 날렵한 사마귀, 그리고 가끔 나타나는 실뱀까지... 사실 나는 이런 것들을 너무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이 집은 나같은 사람에게 맞는 집이다. 물론 겨울엔 가스비가 많이 나오고 돈벌레도 많이 나온다. 그런 게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조금 나쁜 정자다.
이제 이사 온 지 1년이 되어 간다. 한번 살아보니 제법 살 만하다. 겸손을 떨지 않고 말한다면 매우 살 만하다. 부채살 펼치듯 둥글게 올라 간 계단도 아직 나의 무릎에 시비를 걸지 않는다. 아마 귀촌했다 돌아온 친구는 또다시
“한번 아파 봐!”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