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어택 Sep 28. 2024

(6화) 9월 14일 (1)

9월 14일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끄럽게 귀를 파고드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하지만 어제처럼 기분 좋은 아침 바람이 느껴지진 않았다. 마치 술에 잔뜩 취해 뻗었다가 술기운이 잦아들며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그런 기분 나쁜 기상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가장 먼저 내 눈앞에 들어온 건 벽이었다. 내가 벽을 바라본 채 침대에 누워 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신이 조금 들고 보니 벽의 색이 이상했다. 우리 집 침실 벽지의 색깔이 원래 이랬나? 분명 순백색이어야 하는데 내 눈앞을 덮은 벽지는 푸른빛이 도는 회색이었다.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전등이 어색해 보였다. 우리 집 전등은 민무늬의 심플한 네모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전등은 8개의 동그란 전구가 회오리처럼 불빛을 내는 고급스러운 모습이었다.


 내가 아직 술에서 덜 깬 것일까. 나는 고개를 조금 더 돌려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등을 내 쪽으로 한 채 자고 있는 미연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연이는 속옷만 입고 있었다. 어색한 느낌에 내 몸을 보니 나도 팬티 차림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침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낯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신혼 때나 이랬지, 다은이가 태어나고 난 다음에는 아무리 밤에 사랑을 나눴어도 다시 잠옷을 입고 잤는데. 술에 취해 이렇게 밤새 속옷 차림으로 잔 것인가.


 그런데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엄습해 왔다. 벽지에서부터 전등, 그리고 점점 더 커지는 이 위화감은 무엇일까. 방금 느낀 위화감은 미연이와 내가 속옷 차림이라서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더 큰 어색한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내 옆에 누워 있는 이 여자의 머리 색은 검은색이 아니라 연갈색이었다. 미연이는 단 한 번도 염색한 적이 없다. 


 이 여자는 미연이가 아니다.


 “으악!”


 나는 순간 놀라 몸을 일으켰다. 옆에 누워 있던 여자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사실 연갈색 머리를 보았을 때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긴 했다. 어제 본 그 머리의 색과 정확히 일치했다. 내 옆에 누워 있던 속옷 차림의 여자는 오민주였다.


 “오빠, 왜 그래. 깼어?”

 “어? 어. 민주야. 네가 왜.”


 나는 놀라서 팬티만 입은 채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어젯밤에 미연이와 술을 마시다가 이명과 함께 어지러움을 느꼈고, 그 이후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는 술에 약한 주제에 얼떨결에 레드와인 한 잔을 거의 다 마셨다. 그렇다면 내가 술에 취해 옆 동에 있는 민주의 집에 가서 그녀와 함께 잤다는 것일까? 나는 술에 약할 뿐 주사가 있지는 않다. 


 “오빠 왜 그래? 무슨 악몽이라도 꿨어? 그러게, 술 못 마시면서 왜 이렇게 많이 마셔.”


 악몽을 꾼 게 아니라 지금이 꿈이 아닌가 싶었다. 민주가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오더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내 잠옷을 주워 나한테도 건네주었다.


 “내가 너랑 술을 마셨다고?”

 “그래. 기억 안 나? 오빠가 소리 질러서 주원이 깼겠다. 벗고 있는 거 보이지 말고 얼른 입어.”


 나는 당황해서 손도 내밀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옷 안 받고 뭐 해? 오빠? 여보?”


 민주가 마지막으로 말한 단어에 소름이 돋았다. ‘여보’라고? 연애하던 시절에 종종 장난처럼 그렇게 부르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만약 실수로 그녀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해도 갑자기 그런 호칭을 붙일 사이는 아닐 것이다. 


 “여기가……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이지. 정신 차려, 여보! 얼른 옷 입고!”


 우리 집? 너와 나의 집? 아니면 너의 집? 나는 얼떨결에 민주가 주워준 셔츠를 집어 들고 머리를 셔츠에 넣었다. 그리고 셔츠의 목구멍으로 머리를 빼려는 찰나 구멍 사이로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스쳐 갔다. 나는 셔츠를 목에만 끼고 팔도 끼지 않은 채로 그 광경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은 벽에 걸린 커다란 웨딩사진이었다. 우윳빛 웨딩드레스를 입은 민주의 면사포는 바닥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고, 민주 옆에서 한 남자가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이런 사진을 보았다면 당연히 이게 합성이라고 생각하는 게 첫 번째 순서였다. 민주는 연애하던 시절에 나에게 다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고 내 사진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녀는 의도적으로 나와 같은 단지로 이사를 온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고, 민주에게 화를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뒤돌아 민주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민주의 표정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민주는 씨익 웃으며 “놀랐어? 그러게, 오빠는 나한테서 못 벗어난다고 했지?” 따위의 말을 했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민주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듯한,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다가왔다.


 “오빠, 술 많이 마셔서 그래? 오늘 좀 이상해.”


 민주가 손을 뻗어 내 볼을 감쌌다. 순간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짜릿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거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주원이 깼나 보다. 오빠도 이제 정신 차려. 오늘 출근할 수 있겠어?”


 방문이 열리고 다은이와 동갑이거나 한 살 정도 어릴 것 같은 남자아이가 걸어 들어왔다.


 “엄마!”

 “응, 주원이 잘 잤어?”


 그 아이는 민주에게 폭 안겼다. 민주의 아이구나. 그 아이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제 주차장에서 민주를 만났을 때 나는 민주의 아이를 보았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 아이의 얼굴은 이 아이의 얼굴과는 달랐지만, 어제 민주가 그 아이를 주원이라고 부른 것 같았다.


 아이가 엄마 품에서 나와 나한테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 아이의 얼굴, 어딘가 낯이 익다. 분명 내 어릴 적 사진과 많이 닮았다. 지금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 같다. 절대 말이 안 되지만,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 아이의 입에서 어떤 단어가 튀어나올지 예상이 갔다. 


 “아빠!”


아이는 내 품에 안겼다. 


 “어? 어……”


아이의 손을 뿌리치기도 어렵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한 상황이었다. 


 “오빠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얼른 세수라도 해. 오늘 출근 좀 늦게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 힘들면 좀 더 자든지.”


 민주는 주방으로 가서 음식을 준비했다. 나는 방에서 나와 거실을 둘러보았다. 구조는 분명 우리 집과 똑같았다. 완전 새로운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내 집은 분명 아니었다. 소파는 원래 쓰던 것과 똑같이 생겼는데 색깔이 달랐다. 원래 TV는 거실장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이 집에는 스탠드형 TV가 있고 옆에 수납장이 따로 있었다. 커튼, 에어컨, 냉장고 등 내가 원래 쓰던 것과 똑같은 물건도 많이 보였다. 


 이건 꿈일 거야.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거울을 보고 또 보았다. 손가락을 펴서 열 손가락을 하나하나 살폈다. 아니, 이건 꿈이 아니다. 꿈이면 이렇게 생생할 수도, 손과 얼굴에 새겨진 주름 하나하나까지 이렇게 구체적일 수도 없지 않을까.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이번에는 거실 밖으로 보이는 창밖의 광경이 어색해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닌데 우리 집에서 보던 창밖의 모습과는 분명히 달랐다. 나는 창가로 걸어가 보았다. 창밖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여긴 우리 아파트 단지는 맞지만 내가 살던 동이 아니었다.


 곧이어 어제 민주를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긴 민주가 이사 왔다고 했던 105동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106동, 우리 집이 보였다. 나는 얼른 우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잠옷 위에 대충 아무 잠바나 걸쳐 입었다.


 “오빠 어디 가려고? 속 안 좋으면 뭐라도 끓여줄까?”

 “아, 아니. 나 머리가 아파서 잠깐 바람 좀 쐬고……”


 쐬고 올게.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이 집에 들어올 일이 없어야 정상이다.


 나는 건물에서 나와 우리 집이 있는 106동으로 뛰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에 내려 현관 앞에 섰다. 


 분명 우리 집은 여기다. 당연히 우리 집이어야 하는데 조금은 불안했다. 이 문 뒤에 분명히 미연이와 다은이가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미연이에게 지금 어디에 다녀왔다고 말을 해야 할까?


 나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도어락이 우리 집의 것이 아니었다. 혹시 다른 층에 내렸나 싶어 다시 보았지만 904호, 우리 집이 분명했다.     


 「삑삑삑삑…… 삐삐삐」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경고음이 들렸다. 아직 술이 덜 깨서 잘못 누르진 않았을까 싶어 다시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했다. 역시 또 틀린 번호였다.


 “누구세요?”


 문 뒤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들어도 미연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미연이보다는 훨씬 더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미…… 미연이야? 나야.”


 하지만 나는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보조키를 잠근 채로 문이 한 뼘 정도 열렸다. 


 “누구세요?”

 “어? 어…… 여기, 106동 904호 맞지 않나요?”

 “맞는데요? 어디서 오신 거예요?”


 50대로 보이는 여자가 내 몸을 훑어보았다. 잠옷 차림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뒤에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야?”

 “아냐, 여보. 잘못 찾아왔나 봐. 잘못 찾아오신 거죠?”

 “혹시 여기 이미연이라고……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찾아왔나 보네요.”


 우리 집 앞에서 내가 뭘 하는 건가 싶지만, 계속했다간 경찰에 잡혀갈 것 같았다.

 나는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이제는 술기운도 많이 사라졌기에 술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민주가 모든 일을 꾸몄다고 하기에는, 우리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까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잠옷 차림으로 앉아 있어 봤자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오느라 민주의 집에 핸드폰도 두고 나왔다. 나는 미연이에게 전화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민주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현관 앞에 섰을 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나는 내 집인지 민주의 집인지 모를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알 리가 없었다.

이전 05화 (5화) 9월 13일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