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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Sep 27. 2024

(5화) 9월 13일 (3)


 오민주가 왜? 그녀가 왜 내 눈앞에 있는 것일까. 민주도 곧바로 나를 알아본 듯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녀보다 먼저 눈을 피해 뒤도는 것조차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민주는 오히려 내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나에게 먼저 말을 걸려는 것 같았다.


 “아빠, 왜 그래?”


 내가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다은이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곧이어 민주도 다가오더니 나를 불렀다.


 “오빠!”


 7년 전 민주의 메시지를 무시한 뒤로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와 만나거나 연락한 적이 없었다. 헤어진 것으로 따지면 10년이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민주도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을 텐데, 10년 전보다 나이가 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나이에 걸맞은 화려함과 우아함을 갖춘 외모였다.


 “어…… 그…… 그래. 민주야. 오랜만이네”


 그녀가 나를 불렀으니 대답은 했지만, 그 이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없었다. 하지만 민주는 그저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오빠 여기 살아? 나 저번 주에 여기로 이사 왔거든. 저기 105동이야. 오빠는?”

 “응. 나는 바로 여기. 106동”

 “아 그래? 앞으로도 종종 마주칠 수도 있겠다, 오빠.”


 우리가 종종 마주친다고 반가워할 사이는 아니지 않을까. 그녀는 어떻게 저렇게 해맑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지.


 다은이는 처음 보는 여자를 보고 무서웠는지,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붙잡은 채 내 엉덩이 뒤에 서서 얼굴을 빼꼼 내밀어 민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주가 다은이를 보더니 미소를 살짝 지으며 말했다.


 “오빠, 잘 지내나 보네. ……올바른 선택을 한 건가 봐.”


 선택이라고? 10년 전 너와 헤어진 선택? 아니면 7년 전 너의 메시지를 무시한 선택? 


 “나도 그래.”


 민주가 묻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답하더니 뒤돌아서 그녀의 아들을 부르며 걸어갔다. 


 “주원아, 가자.”


 민주의 차에서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리더니 그녀와 함께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남자가 민주에게 누구야? 하고 물어보자 민주는 한 치 망설임 없이 어, 그냥 동창 오빠야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주와 나는 2년 넘게 사귄 사이지만 동창인 적은 없었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것일까. 민주는 원래도 저렇게 매사에 자신만만한 성격이었는데 여전한 것 같았다.


 미연이는 민주의 얼굴도 모르지만 같은 단지에 민주가 이사를 오니 신경이 쓰였다. 민주는 이미 잘살고 있는 것 같고 나도 그녀에게 다른 감정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다시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다은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퇴근을 일찍 한 김에 저녁을 만들기 위해 요리를 시작했다. 할 줄 아는 요리가 많지는 않지만 내가 만든 김치볶음밥은 모두가 좋아했다. 


 잠시 후 미연이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식탁에 다 같이 둘러앉았다. 다은이는 오늘 어린이집에서 엄마와 아빠를 그렸는데, 아빠는 실물과 똑같이 그렸고 엄마는 실물이 더 예쁘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나도 미연이도 소리 내어 웃었다. 미연이는 이번 주말에 가족 여행으로 동물원에 가자는 말을 꺼냈고, 다은이는 벌써 설렌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저 세 식구가 함께 화목하게 앉아 식사하는 것 자체로 너무도 행복했다. 이게 미연이와 다은이와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몰랐지만.     


 이날따라 다은이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보. 다은이도 잠들었는데, 오랜만에 맥주나 한잔할까?”


 미연이가 말했다. 다은이가 생기기 전에는 저녁에 같이 TV를 보며 종종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곤 했다. 다은이가 태어나자 우리 모두 육아와 일에 지쳐서 그런 시간이 많이 줄었다. 


 “냉장고에 맥주가 없을 텐데, 잠깐 가서 사 올까?”


 집에서 술을 마신 지가 오래되어 집에는 맥주도 안주도 없었다. 내가 나가려고 외투를 걸치려고 하는데 미연이가 찬장을 열더니 와인을 꺼냈다.


 “전에 선물 받은 와인 있잖아. 그냥 이거 마시자.”

 “응, 그래? 그거 몇 도야?”

 “11도네. 자기만 괜찮으면 그냥 이걸로 조금만 마실까?”


 나는 술이 강하지 않다. 맥주 한 잔 정도로 기분만 낼뿐, 그 이상의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미연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술로는 분위기만 내자는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와인병을 따고 잔을 꺼내 와인을 두 잔에 고르게 따랐다. 붉은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오랜만에 잔을 들고 건배하려는데, 순간 갑자기 집에 있던 불이 모두 꺼졌다.


 “깜짝이야. 뭐지?”


 미연이가 놀라며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정전된 것이었다. 창밖을 보니 멀리 보이는 건물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고 옆 동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아마도 우리 아파트 단지나 이 일대만 정전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핸드폰 불빛을 비추며 촛불을 켜서 식탁 위의 와인잔 사이에 내려놓았다. 은은한 불빛에 마치 고급스러운 바에 온 것 같았다.


 “이렇게 하니까 오히려 분위기가 더 좋은 것 같은데? 금방 불 다시 들어오겠지. 우선은 이렇게 마시자, 미연아.”

 “그래도 지금 정전돼서 다행이다. 다은이가 깨어 있었으면 놀랐을 텐데.”


 나는 미연이와 건배를 하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얼굴에 후끈 열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고 뒤통수까지 머리가 찌릿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갑자기 정전되니까 그때 생각난다. 자기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한 날 기억나? 그날 진짜 큰 정전이었잖아.”

 “맞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가장 큰 대규모 정전이었는데 그 원인은 아직도 안 밝혀졌지.”


 미연이가 갑자기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자 민주에게 문자를 받았던 일도 떠올랐다. 나는 민주의 문자를 무시하고 미연이를 선택했다. 그 덕에 내 앞에는 미연이가 앉아 있다. 우연히 오늘 만난 민주에게도 남편과 아이가 있었고, 그녀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살면서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은 자기를 만나고 자기와 결혼한 것인 것 같아. 나도 자기도 한 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으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미연이의 눈동자 속에 촛불이 비치며 반짝반짝 사랑스럽게 빛났다. 그런데 미연이가 ‘선택’이라는 단어를 쓰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연이가 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민주와의 일화는 미연이에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으니까.


 나는 잔을 들어 또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확실히 나는 술에 약하구나. 두 모금 만에 머리가 핑 도는 게 느껴졌다.


 “여보, 근데 아까 다은이가 그러던데. 자기 여기 앞에서 다른 여자랑 얘기했다면서? 그게 누구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고 보니 다은이가 보고 있었다. 그걸 미연이에게 언제 얘기한 거지. 

 “응? 아…… 그게.”


 나는 당황한 채 또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잘못한 것은 전혀 없었다. 민주는 그저 미연이를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사이이고, 우연히 이 앞에서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하필 같은 단지로 이사를 온 탓에 앞으로 종종 민주와 마주칠 수도 있었다.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동창이야. 중학교였나 고등학교였나,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우연히 만났어.”


 아까 민주가 남편에게 나를 동창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나서 이렇게 둘러댔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을까. 정전이 되어 어두운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연이는 내가 당황한 걸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당황을 하실까? 다은이가 그러는데 연예인만큼 예쁜 아줌마였다는데? 남중 남고 나왔다면서, 자기한테 어떻게 그런 예쁜 동창이 있어?”


 나는 아무 말 못 한 채 와인잔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한두 모금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삐-’


 갑자기 또 이명이 들리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낮에 느꼈던 것과 같은 증상이었다. 혹시라도 중심을 잃을까 봐 한 손으로 식탁을 꽉 붙잡았다. 오늘은 낮에도 이랬지만 보통은 밤에 이런 증상이 더 자주 생기곤 했다. 술에 취해서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어지러웠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처럼 보였는지 미연이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왜 얼굴을 그렇게 찡그리고 있어? 킥킥. 당황했어? 여전히 놀리는 재미가 있네. 내가 그런 거 신경이나 쓸 것 같아? 그 여자도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었다…면서. 자…기도 나 밖……에 없는 사…람……인 거 내…가 제일… 잘 알……고.”


 마치 사방에서 여럿이 동시에 말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미연이의 얼굴을 둘러싼 눈앞의 광경이 빙빙 도는 것 같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것이 미연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니 적어도,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미연이의 눈빛은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바닥으로 쿵 하고 쓰러졌던 것 같다. 미연이의 남편이자 다은이 아빠로서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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