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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Sep 26. 2024

(4화) 9월 13일 (2)


 나는 강단에 서서 강의를 시작했다. 2학년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서양 철학사 수업이었다. 


 “이렇게 결정론적인 사고는 서양 철학사에서 근대에까지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 학자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어요. 정해진 미래라는 것은 없기에 인간은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죠.”


 나는 종종 강의 중간에 내 견해를 조금씩 섞기도 했다. 


 “현대에는 이러한 자유의지론이 다수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결정론을 조금 더 믿는 편이에요. 어느 정도 우리의 인생 속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정해진 운명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죠.”


 원래 그렇지는 않았지만, 미연이를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미연이와 나는 연애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잘 맞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지 둘이 동시에 똑같은 말을 하려고 해서 신기해한 적도 많았다. 그녀와 내가 만난 게 운명이 아니면 무엇일까? 여기에만큼은 그 어떤 철학적 근거나 이론도 접목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뭐, 여러분들은 각자의 견해를 가지면 됩니다. 시험에 뭐가 맞는지 내지는 않을 거니까요,”


 몇몇 학생이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수업을 이어 나가자 어느새 강의 시간이 5분을 남기고 있었다.


 “자, 그럼. 여기까지 하고요. 식사들 맛있게 하시고. 혹시 질문 있나요?”


 형식적으로 물어보았을 뿐이다. 수업 중간도 아니고, 수업 끝에 질문을 하면 끝나는 시간이 늦어져 다른 학생들의 눈총을 받을 테니까.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나윤 학생의 바로 앞에 앉은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 최근에 자유의지론이 부상한 것은 양자역학의 발전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들어 생각해 본다면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결정론을 지지하기는 힘든 것 아닐까요?”

 “좋은 의견이긴 한데요, 과학과 철학은 항상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답을 하면 여러분의 점심이 늦어질 것 같은데.”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이 학생의 말이 맞는다고 해줄 수도 있고, 내가 반박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박하자면 끝이 없는 논리였다.


 “지금 설명해 줄 수도 있지만, 마침 제가 지금 물리학과 교수님이랑 식사하러 갈 건데, 얘기해 보고 다음 시간 시작할 때 설명하면 더 좋을 것 같네요. 학생 다음 시간에 결석할 건 아니죠?”    

 

 강의를 마치고 나는 내가 말한 대로 물리학과 교수를 만났다. 가장 친한 친구인 유상헌이었다. 유상헌도 지금 막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어서 같은 건물 복도에서 만날 수 있었다. 상헌은 과학자에 대한 사람들의 스테레오타입답게,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온 것인지 의심스럽게 여기저기 삐쳐 나온 곱슬머리에 동그란 안경, 공대생들이 즐겨 입을 것 같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보기 좋게 통통한 체격으로 펭귄처럼 걷는 모습은 ‘뒤뚱뒤뚱’이라는 의태어가 어울렸다. 


 “야, 오늘은 말이지. 교수 식당은 메인 메뉴가 오징어볶음이야.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오징어볶음 먹을 바에는 여기 쪽문 앞에 분식집 오징어볶음이 500원 더 싸고 맛있단 말이야.”


 또 시작이다. 유상헌은 매사에 항상 분석적이고 계획적이었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 하나까지도. 그다지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면서 본인이 자신 있게 말할 주제만 주어지면 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어디 가자는 거야? 그렇게 말 안 해도 그냥 네가 원하는……”

 “아니, 들어봐. 그러면 우리가 학식을 먹을 거면 남은 선택지는 경영관이랑 공학관 두 개잖아. 근데 공학관의 오늘 메뉴는 부대찌개랑 비빔밥인데, 내가 어제저녁에 비빔밥을 먹었단 말이지. 그리고 경영관은 푸드코트형 식당이니까 부대찌개는 항상 있는 상시 메뉴고. 그럴 바에는……”

 “그니까 경영관 가자는 거잖아. 알겠으니까 가자고.”


 유상헌의 입에 이렇게 구멍이 뚫렸을 때는 조금만 대화를 해도 기가 빨릴 것 같다. 그러니까 마흔이 다 되도록 저렇게 독수공방 신세지.


 “너 강의 시간에 설명하는 건 학생들이 제대로 알아듣긴 하냐?”


 경영관 식당으로 가는 길에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물론 유상헌은 강의에 에너지 100%를 다 담아 열정적으로 하는 친구지만, 강의 내용은 분명 현학적인 길로 빠져들 게 뻔했다.


 “그럼. 나보다는 네 강의가 우리 학교 강의 중에 제일 졸릴걸? 철학을 지루해서 어떻게 듣냐? 내가 방금 강의한 내용은 얼마나 재미있는 내용인지 알아? 현대물리학 중에서도……”

 “야, 야…… 알겠어. 미안. 그냥 우리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내가 괜한 말을 꺼냈다가 또 이 녀석의 입에서 쉬지 않고 말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유상헌과 나는 경영관 학생 식당에 마주 보고 앉아 식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전 강의에서 양자역학과 자유의지론에 대해 질문을 받은 것이 생각났다. 물론 내가 가진 지식수준에서 간단히 대답하거나 책을 조금 찾아봐도 될 일이었다. 이왕 물리학 박사와 밥을 먹는 김에 그의 의견을 물어보면 좋긴 하겠지만, 또 그가 폭풍처럼 말을 쏟아내면 어쩌나 싶었다. 


 “근데, 상헌아.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결정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나?”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말없이 밥을 흡입하고 있던 유상헌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반응을 보니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다.


 “아니…… 오늘 수업에서 결정론이랑 자유의지론에 대해 얘기하다가, 어떤 학생이 양자역학과 결정론은 양립 불가능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해가지고.”


 유상헌은 숟가락을 식탁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 너 얘기 잘 꺼냈다. 그게 마침 지금 내 연구 주제랑도 겹치는데 말이야.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이해해야 해. 그게 뭐냐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미친놈. 그 이후에 내가 식사를 제대로 했는지나 모르겠다. 그는 밥그릇을 다 비우고도 30분을 넘게 떠들었고, 물론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볼 걸 그랬다.     




 이날 나는 조금 일찍 퇴근하고 다은이를 하원시키기 위해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어린이집 현관으로 들어가자 부스럭 소리에 몇몇 학생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현관에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나 보다. 한편으로 안쓰럽고 다은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은이는 내가 온 것을 모르고 한쪽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은아!”


 다은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은이의 얼굴이 나를 보자마자 주름이 질 정도로 해맑게 바뀌었다. 다은이가 “아빠!” 하면서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내 귀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리며 순간적인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잠깐, 다은아.”


 만약 내가 넘어지면 다은이와 같이 넘어질까 봐 다은이의 손을 뿌리친 채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옆에 있는 기둥을 손으로 잡으며 중심을 잡았다.


 “아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냐. 아프긴. 괜찮아. 아빠랑 얼른 집에 가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은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집으로 출발했다. 한 달 정도 되었나. 최근 들어 며칠에 한 번씩 이렇게 이명과 함께 순간적인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신경 쓰기에는 바쁘기도 하고, 우선은 조금 더 지켜보다가 증상이 계속되면 병원에 가 볼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운전 중에 또 증상이 생길까 봐 나는 바람을 쐬기 위해 운전석 창문을 살짝 열었다. 아침처럼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다은이도 기분이 좋은지 오늘 어린이집에서 배웠다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야, 주스 될 거야. 나는야, 케첩 될 거야. 나는야, 춤을 출 거야. 멋쟁이 토마토.”


 오늘 유상헌과 자유의지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동요마저 철학적으로 들렸다. 토마토마저도 저렇게 자신의 운명을 얘기하는구나. 


 어린이집은 집에서 차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고, 나는 곧 우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와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외제차 한 대가 주차하더니, 어떤 여자가 다은이 또래의 남자아이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 여자의 뒷모습만 보였다. 그녀는 연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레이스가 잔뜩 달린 검은색 셔츠, 저 나이에 입기에는 짧다고 느낄 만한 버건디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셔츠도 조금 짧아서 골반 위쪽의 맨 등살과 함께 날씬한 몸매가 살짝 보이고 있었다. 우리 단지 주민일 수도 있겠지만 평소에 보던 사람은 아니었다. 아기 엄마치고 참 화려하게 입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그 여자가 뒤를 돌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나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수없이 바라보았고, 내 손과 입술로 수도 없이 어루만졌던 얼굴.


 그녀는 오민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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