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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Sep 25. 2024

(3화) 9월 13일 (1)

9월 13일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기상 알람이 울리기 직전, 창밖에서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가을바람이 들어와 나를 기분 좋게 간지럽혀 깨운다. 눈을 뜨고 천장을 가득 채운 햇살을 보며 나는 기상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몸으로 먼저 깨닫는다. 시계를 보니 알람이 울리기 5분 전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켜 알람을 끈다. 잠은 잘 만큼 잤고, 시끄러운 알람 소리를 듣지 않고 깼으니 개운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옆에서는 미연이가 아직 자고 있었다. 막상 이 말을 하면 미연이가 싫어하지만, 항상 입을 살짝 벌리고 자는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나는 그녀를 어떻게 기분 좋게 깨워줄까 잠시 생각했다. 먼저 손을 뻗어 그녀의 한쪽 볼을 쓰다듬었다. 미연이는 살짝 미간을 움직일 뿐 깨지 않는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살짝 벌어져 있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댔다. 미연이가 슬며시 눈을 떴다. 미연이도 햇살로 가득 찬 방을 보며 일어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잘 잤어?”


 미연이는 아직 잠에 반은 덜 깬 눈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거울 앞 선반에는 칫솔이 3개 꽂혀 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칫솔 세 개가 마치 우리 세 식구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나는 칫솔 하나를 꺼내 양치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미연이가 화장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자기도 잘 잤어?”

 “우…… 우웅.”


 나는 칫솔을 문 채 대답했다. 아직 잠이 덜 깬 미연이도 칫솔을 꺼내 들어 양치하기 시작한다. 나와 미연이는 나란히 서서 거울을 보며, 거울 속 비친 상대방과 사랑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은이의 방문이 열렸다. 올해 다섯 살이 된 다은이가 걸어 나왔다.


 “엄마 아빠 안녕~”


 졸려서 발을 질질 끌며 눈을 비비는 다은이의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가자 다은이가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나한테 폭 안겼다. 다은이는 고개를 들더니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 나 꿈에서 엄마가 동생 낳는 꿈 꿨다? 그리고 나니까 아빠가 동생만 안아줘서 나 슬펐어.”


 곧이어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더니 다시 나에게 폭 안겼다. 별로 길쭉하지도 않은 다은이의 코가 내 배를 찌르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다은이의 눈물이 내 옷을 적시고 있는 게 별로 나쁘지 않았다. 


 “괜찮아. 만약 동생이 생겨도 아빠는 다은이만 계속 안아 줄 건데?”

 “어이구, 동생은 아빠가 낳나? 엄마는 다은이 말고 아무도 낳을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미연이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여보, 오늘은 다은이 하원 자기가 시킬 거지?”

 “응. 오늘은 네 시 정도면 퇴근할 수 있을 거야.”


 미연이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고, 나는 한주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보통 내가 더 출근을 빨리하기에 미연이가 다은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비교적 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나는 야간 수업이 있는 날이 아니면 다은이를 하원시키고 있었다.


 나는 미연이와 다은이의 볼에 입을 맞추고 집을 나왔다. 대단한 게 없어도 그냥 행복했다. 아침에 이렇게 일어나 소중한 가족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이 날따라 특히 기분이 좋았다. 출근을 위해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창문을 살짝 내리니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나는 양쪽 창문을 모두 열고 라디오를 들으며 학교로 향했다.


 나는 내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탔다. 한 여학생이 뒤이어 들어오더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수강생이 30명 정도 되고, 이 수업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학생의 얼굴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가끔 누군지 모르는 학생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 일도 있고, 반대로 나에게 인사하는 건 줄 알고 받아줬더니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었던 우스운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있는 학생이다. 얼마 전 세미나에 참여해서 인상 깊은 답변을 한 적도 있었다. 이름이 나윤이었던가. 특히 내가 이 학생을 기억하는 이유는, 처음 보았을 때 아내 미연이와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모뿐만 아니라 옷 입는 취향도 미연이와 비슷한지 그녀를 보면 나와 연애하던 시절의 미연이를 떠오르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 이 학생은 연노랑 셔츠에 청바지로 청순한 느낌의 옷차림이었다. 나는 미연이를 처음 만난 날 그녀의 옷차림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지금 이 학생의 옷차림이 그날과 너무도 비슷했다. 그 시절 미연이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녀와 엘리베이터에 둘이 타 있는 짧은 시간 동안 미연이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미연이는 내가 오랫동안 사귀었던 민주와는 정반대될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다. 미연이를 처음 만난 건 민주와 헤어진 지 반년 정도 지난 후, 집에 오는 골목길에서였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대학 근처 빌라촌에 혼자 살고 있었다. 대학교 후문에서부터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야 우리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여느 때처럼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고, 나보다 조금 앞선 거리에서 한 할머니가 바퀴 달린 가방을 끌며 길을 걷고 있었다. 당연히 내 걸음이 할머니보다 빨랐기에, 나와 그 할머니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 할머니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굳이 나서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만 않으면 될 일이지 도움을 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괜히 남의 짐을 만졌다가 불미스러운 일을 겪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국가나 지체에서 나서서 할 일이지 내가 나설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특히 그때는 돈도 시간도 부족한 대학원생이었기에 내 코가 석 자일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 뒤에서 한 여자가 종종거리면서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급한 일이 있나 했는데, 그녀는 내 앞에 있던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순간 손녀라도 되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할머니, 제가 끌어드릴게요.”

 “아이고, 아니여. 아가씨 팔목 봐. 내 팔뚝 반밖에 안 되네.”


 요즘 길거리에서 보기 힘든 훈훈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곧 내 걸음이 그들을 따라잡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 광경을 못 본 체 지나치려는 찰나, 수수한 옷차림에 청순한 미소를 띤 그녀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그랬는지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본능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저… 저… 제가 끌어드릴게요.”


 나는 짐을 대신 끌어주던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니에요. 저도 충분히 끌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그녀에게서 순수하고 선한 매력이 느껴졌다.


 “저 어차피 저 언덕 위에 살아요. 가는 길이니까 이리 주세요.”


 그때 옆에 서 있던 할머니가 거들었다.


 “어유 그려. 나는 내가 끌어도 충분한디… 아가씨는 오히려 나보다도 힘들 것 같어. 총각한테 부탁혀.”


 처음에는 선행을 베풀 의도가 아니었지만, 얼떨결에 한동안 셋이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말없이 걸으며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나는 민주와 헤어진 후 오랜만에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한주대학교 다니세요?”


 한주대학교 학생들이 주로 사는 빌라촌이었기에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저 대학생 같아요? 졸업한 지는 오래됐는데. 후훗”


 사실 내 또래거나 조금 어리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한참 전에 졸업했어야 할 나이긴 했지만, 대학생 취급을 받아서 그런지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 그래요? 저는 철학과 졸업하고 지금 철학 대학원에 있어요.”

 “와. 철학으로 대학원이요? 멋지네요.”


 내가 철학을 전공한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반응은 그녀와 비슷했다. 대부분 멋지다 대단하다 하고 말했지만, 겉으로만 그렇게 말할 뿐 대부분 진심이 아니었다. 나는 금수저도 아니면서 왜 취업이 잘 되는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고 철학과에 대학원까지 가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멋지다고 말해도 속으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여자의 선한 목소리는 그저 순수한 의도로 말한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저도 한주대학교 졸업했어요. 지금은 영어 강사인데, 계속 이 근처에 살아서 매일 도서관에서 수업 준비하거든요. 나중에 학교에서 만나면 밥이나 한번 먹어요.”


 너무도 반가운 한 마디였다. 어쩌면 예의상 한 말일까? 진심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길 바랐다. 하지만 이렇게 헤어지면 우연히 캠퍼스에서 마주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가 우리 집이여. 고마워요, 다들.”

 “아 그래요? 안녕히 가세요.”


 할머니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밝은 말투로 고개를 90도로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잠시 그녀와 단둘이 골목을 걷게 되었다. 어색하다고 생각할 무렵 곧바로 두 갈래 길이 나왔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서 옆으로 가야 하는데, 위로 올라가시나요?”

 “아, 네. 저는 좀 더 올라가야 해요.”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녀가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나도 얼떨결에 목을 살짝 숙여 인사하자, 그녀는 곧바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헤어지면 그녀와 또 만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기요!”

 “네?”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렸다. 나는 수줍어하며 말했다. 


 “우리. 정말로 밥 먹는 거죠? 제가 전화번호 드려도 될까요?”


 쿵쾅쿵쾅 뛰는 심장의 진동이 온몸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나와 미연이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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