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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Sep 30. 2024

(7화) 9월 14일 (2)

민주는 원래도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한 첼리스트였다. 지금도 계속 이렇게 활동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민주는 아직 집 안에 있을 것이었다. 이 상황에 벨을 누르는 게 맞을까, 비밀번호를 누르는 게 맞을까. 어차피 비밀번호는 알 수 없기에 벨을 눌렀다. 곧바로 집 안에서 민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야?”

 “어? 으…… 으응”


 민주가 문을 열어 주었다. 곧 출근하려는지 화장한 얼굴에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왜 벨을 누르고 그래?”

 “그게…… 순간 기억이 잘 안 나 가지고.”

 “오빠 아직 술이 덜 깼구나? 비밀번호 0516! 주원이 생일이잖아!”

 “아 그렇지, 술기운 때문에 잠깐 생각이 안 났나 봐.”


 일단 얼버무려 상황을 모면하면서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을 숨기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민주에게 내 상황을 모두 말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나 먼저 출근할게. 오늘 오빠가 주원이 하원시키는 거 잊지 말고!”

 “응? 잠깐, 민주야.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내가 왜……”

 “오빠, 나 늦었어. 주원이 등원시키려면 빨리 나가야 해. 저녁에 얘기하자, 응?”


 이 상황이 뭔지 물어보려는데 민주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 나는 내 집인지 아닌지 모를 낯선 공간에 혼자가 되었다. 나는 곧바로 침실로 가 보았다. 머리맡에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모델은 내가 쓰던 것과 같은데 케이스는 또 달랐다.


 핸드폰 화면을 켜자 날짜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오늘이 맞긴 한 건가 하는 미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어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어제가 다시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니겠지? 9월 14일. 분명 어제 미연이와 함께한 건 9월 13일이었다. 9월 13일이 반복되는 건 아니고 하룻밤 만에 모든 게 달라진 것이다.


 핸드폰에는 패턴으로 잠금이 걸려 있었는데 원래 내가 쓰던 패턴으로 몇 번을 시도해 보아도 풀리지 않았다. 다행히 지문인식도 가능해서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자 잠금이 풀렸다. 주원이라는 아이의 웃는 얼굴이 배경화면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건 아무렴 상관없다. 나는 미연이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도 않았고 순간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전화번호를 직접 누를 일은 없으니까. 침대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행히 미연이의 전화번호가 머릿속에 있었다. 나는 미연이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므로……」     


 없는 번호라고?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11자리 번호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곧바로 기억나지는 않았다고 해도 분명 맞았다. 내가 내 아내의 번호를 보고도 구별하지 리가 없다. 저장만 안 된 것이겠지? 순간 미연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침실에 걸려 있는 민주와 나의 웨딩사진이 내 눈에 다시 들어왔다. 분명 내 얼굴인데, 사진 속 나는 미연이와 결혼할 때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무대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민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는 첼로가 들어갈 것만 같은 큰 가방이 있었다. 민주는 원래도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한 첼리스트였다. 지금도 계속 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유상헌에게라도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연이도 다은이도 잘 알고 있으니 뭐라고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유상헌의 번호를 검색해 보았다. 다행히 저장되어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데 ‘유상헌 교수’라고, 그저 직장 동료인 양 딱딱하게 저장된 게 이상하긴 했지만. 상헌에게 전화를 걸자 연결음은 들리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 목록을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이름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내 원래 인맥 그대로였다. 조교를 비롯해서 대학 동료들의 번호가 대부분 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내 직장은 그대로인 것 같다. 나는 학교로 가서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충 씻고 옷을 입은 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주로 주차하던 자리에 내 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차 키를 꺼냈다. 차 키도 내가 쓰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차 키의 버튼을 눌렀다.     


 「삐빅」     


 내 뒤에서 차가 반응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번 누르며 살펴보니 고급스럽게 생긴 외제차 한 대가 불빛을 번쩍거리고 있었다. 나는 국산차를 탔었는데…… 적어도 지금은 이게 내 차라는 것이겠지.


 나는 차를 끌고 학교로 향했다.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내 연구실이 아닌 유상헌의 연구실이었다. ‘재실’로 표시된 것을 보고 나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유상헌이 책상에 앉아 있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노크도 없이.”


 분명 유상헌은 맞았다. 그런데 내가 알던 상헌이랑은 너무 달라 보였다. 원래 그는 항상 머리를 안 감은 것처럼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파마를 한 것인지 고데기를 사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깔끔하게 옆으로 넘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의 연구실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하는 사이가 아니었고, 유상헌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섞여 있었다. 


 “아니, 전화를 안 받길래 와 봤어. 수업 중이었어?”

 “무슨 일인데? 용건을 말해.”


 유상헌은 계속해서 까칠하게 반응했다. 너의 기억 속에 내 아내는 누구냐고, 미연이와 다은이를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유상헌의 차가운 반응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말은 못 하겠고 대신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야말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점심은 먹었어?”

 “너랑 내가 서로 식사 안부나 묻는 사이는 아니지 않냐? 할 말 있어서 왔으면 용건이나 말해.”


 이제 알 것 같았다. 유상헌과 나는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다. 평범한 직장 동료보다도 못한 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 상헌아. 미친 소리처럼 들릴 것 같지만, 하나만 물어볼게. 지금 네가 알기로 내 아내가 누구야?”

 “너 지금 장난하냐?”


 유상헌이 짜증스럽다는 듯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미안해. 근데 무슨 이상한 꿈을 꾼 건가 싶어서 그래. 그냥 네가 기억하는 내 아내 이름만 말해주면 돼.”

 “씨, 진짜. 너랑 내 사이가 지금 왜 이렇게 됐는데? 나보고 지금 걔 이름을 말하라고? 나 놀리냐?”


 입술에 욕까지 아른거리는 유상헌의 모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 나는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오민주다, 새끼야. 됐냐?”


 당연히 말도 안 되지만, 적어도 오늘 내가 겪고 있는 일들과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답이었다. 유상헌의 말에는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나의 아내는 민주라는 것. 그리고 민주로 인해 나와 유상헌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 내가 민주와 연애할 때도 헤어질 때도 상헌은 늘 나를 응원해줬는데, 민주와 상헌이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그럼 너, 혹시 미연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누구? 미연이? 네 전 여친?”

 “어? 전…… 여친? 맞아, 이미연.”

 “네 전 여친을 왜 나한테 물어보냐? 민주로 부족하냐? 어디서 잘살고 있겠지.”


 유상헌은 신경질적으로 말했지만 내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나는 혹시라도 이 세상에서 아무도 미연이와 다은이를 모를까 봐 걱정했다. 다은이에 대해서도 상헌이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또 신경질적으로 답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다행히 도 미연이는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상헌이의 말에 미루어 짐작해 보면, 나에게 미연이와 민주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뀐 것이었다. 원래 전 여자친구였던 민주가 내 아내가 되었고, 내 아내였던 미연이가 내 전 여자친구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유상헌의 방에서 나와 내 연구실로 갔다. 이것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래 기억하는 위치에 내 연구실이 있었다.


 “교수님!”


 내가 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내 수업을 도와주는 대학원생 조교였다.


 “지금 수업 가시는 거죠? 수업에 안 들어오셔서 와 봤어요.”

 “네? 제 수업이요?”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아내와 딸이 사라진 마당에 수업이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열한 시 수업이니까 지금 오 분 지났어요.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죠?”

 “아, 그런 건 아닌데. 오늘은 웬만하면……”

 “교수님, 지금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순간 정신이 들었다. 강의실에서 ‘교수가 왜 안 오지’ 하며 앉아 있을 서른 명 학생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오늘이 꿈이나 허상이 확실하다면 될 대로 되라고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이유로든 지금 이게 현실이라면, 내가 이상한 일을 겪고 있다는 이유로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지금 무슨 수업이죠?”

 “서양철학사요. 제가 PPT 자료는 띄워두었어요.”


 다행히 어제 했던 그 수업이었다. 그런데 막상 가려고 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해요. 내가 시간을 착각했나 본데. 얼른 가죠. 근데 강의실이 어디죠?”

 “교수님, 괜찮으세요?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고요? 인문관 302호에요. 늘 하시던 곳인데.”


 일단은 수업부터 하고 보자고 생각했다. 나는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 대다수는 원래 학생들 그대로였고, 처음 보는 학생도 몇 명 보였다.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미연이를 닮은 나윤 학생도 보였다.


 우연인지 다행인지 내가 어제 수업한 내용이 오늘의 주제였기에 수업은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건 나윤 학생이었다. 내가 그녀를 미연이와 닮았다고 생각한 건 얼굴뿐만 아니라 미연이의 과거 옷차림처럼 청순한 스타일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나윤은 가슴골이 살짝 보이게 파인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더욱 이상한 건,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오묘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학생이 교수를 보고 저런 미소를 짓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현대에는 이러한 자유의지론이 다수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결정론을 조금 더 믿는 편이에요. 어느 정도 우리의 인생은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된 마당에 결정론이고 운명이고 무슨 소용이냐 싶겠지만, 어제 내가 했던 말이 떠올라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몇몇 학생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나윤을 보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저,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그때 뒤편에 앉아 있던 한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어제 수업에서도 나한테 질문을 했던 그 학생이었다. 나는 원래 학생들에게 수업 도중 언제라도 궁금한 사항은 바로 질문하라고 말하곤 했다. 학생이 중간에 손을 들고 질문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난 시간에는 교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신다고, 인생의 모든 결과가 운명처럼 정해진 거라면 너무 슬프지 않겠냐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방금 하신 말씀은 지난 시간에 하신 말씀이랑 너무 다른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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