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생의 질문은 나를 다시 한번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렇다는 것은 평소 내가 자유의지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이 이상한 일은, 지금까지는 내가 바뀐 게 아니라 내 아내와 딸, 유상헌, 내 집에 있는 가전이나 가구 등 내 주변의 것들이 바뀐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저 학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 자신마저도 바뀐 것이다. 나를 둘러싼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이 바뀐 게 아니라, 내가 그저 신성우라는 이름을 가진 낯선 이에게 빙의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혼란에 싸여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정적이 너무 오래 흐른 것 같았다. 학생들이 점점 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아…… 그건. 어차피 학설도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거겠죠.”
대충 얼버무렸지만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어제 했던 수업이라고 자신 있게 시작했지만, 이때부터는 학생들의 기억 속 나의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과 다를 것 같아 두려웠다. 이후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고, 끝나는 시간만 바라보다가 예정보다 10분은 일찍 끝낸 것 같다.
나는 내 연구실에 들어왔다. 유상헌도 그렇고 내가 수업 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고 하니 그 누구도 만나기가 두려웠다.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나의 관계는 내 기억 속의 관계와 다를 것이었다. 차라리 소파에 혼자 앉아 있으니 조금씩 마음에 평온을 찾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연구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원래 나의 연구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내가 앉아 있던 소파는 원래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이 연구실이 오늘 아침에 일어나 지금까지 본 것 중 내 기억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벽 한쪽을 채운 진열장에 놓인 책과 물건들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런데 낯선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원형의 받침대 위에 커다란 흰색 주사위가 비스듬하게 놓여 있는 모양의 장식품이었는데,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도 원래와 비슷했다. 그런데 원래는 없었던 담배와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집에서도 담배와 라이터를 본 것 같았다. 문득 민주가 담배를 피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같은 종류의 담배가 내 책상에 놓여 있었다. 이건 내가 피우던 담배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담배를 보고 있으니 마치 익숙한 향기가 입에 감도는 것 같았고, 순간 그 향기가 나를 빨아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나는 성인이 된 후 호기심에 담배를 한두 개비 피워본 적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후로 담배를 입에 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 담배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모든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책상 서랍 속의 물건도 원래와 정확히 일치하진 않아도 얼추 비슷했다. 그런데 가장 하단의 서랍은 잠금장치가 걸려 있는지 열리지 않았다. 이 책상은 원래의 것과 같은 책상이고, 기존에도 이 서랍에 잠금장치는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이것을 잠근 적이 없었다. 열쇠 구멍은 있지만, 평소에 잠근 적이 없기에 열쇠를 어디에 두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서랍을 여는 것을 포기하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동안 멍을 때렸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미연이를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를 켜고 미연이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는 학교를 검색해 보았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교직원 명단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미연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유상헌도 아는 걸 보니 분명 미연이가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흔한 이름이다 보니 그녀의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도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어 그녀의 이름 뒤에 ‘영어’를 함께 검색했다. 바로 인물이 뜨지는 않았지만, 스크롤을 계속 내려보니 눈에 띄는 단어가 보였다.
「영어는 YK어학원. 영화, 드라마로 공부하는 미연쌤의 재미있는 영어 회화」
본능적으로 클릭해 보니 강사의 사진이 보였다. 아무래도 보정을 많이 한 것 같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미연이였다. 강의 소개 영상을 클릭하자 녹색 칠판을 뒤로한 미연이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미연쌤입니다. 영어 공부 어렵고 재미없었죠? 미연쌤과 함께 영화 드라마로 재미있게…….”
동영상은 보정할 수 없었나 보다. 그 얼굴은 어제까지 본 것과 똑같은, 어쩌면 그것보다 더 밝은 모습의 미연이였다. 이렇게라도 미연이를 보니 곧바로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모니터 속의 미연이를 만져 보았다. 어제까지는 바로 눈앞에서 사랑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이제는 모니터 속에서 겨우 보고 있다니.
미연이는 처음 나와 만났을 때도 영어 강사였다. 이렇게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이런 대형 영어 학원에서 유명한 강사가 되고 싶다고 늘 말했다. 미연이는 매사에 욕심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기에, 나는 왜 학교 교사가 아닌 강사가 되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제도권 내에서는 자신의 마음대로 가르칠 수가 없다 보니, 차라리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는 강사가 되어 영어를 재미있게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연이는 나와 결혼한 이후에는 가정에 더 충실해지고 싶다고 했고, 우리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강사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미연이는 아이가 생기자마자 학원을 그만두었다. 다은이가 태어나고 몇 년 후에는 한 고등학교에 취직했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워킹맘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나와 다은이를 위해 꿈을 포기한 것이다.
나는 눈에 맺힌 눈물을 닦고 미연이에게 연락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적어도 미연이의 직장을 알았으니 미연이와 연락할 길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원으로 연락하거나 찾아가면 분명 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만 같았다.
나는 SNS에서 미연이를 검색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미연이는 SNS를 사용하지 않다 못해 싫어하는 편이었다. 평소 자신을 꾸미는 것이나 자랑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SNS를 켜고 검색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검색 기록에 곧바로 ‘이미연’이라는 이름이 떴다. 나는 검색한 적이 없는데, 어쨌거나 내 핸드폰에서 최근에 미연이를 검색했다는 의미였다.
강사여서 그런지 미연이는 SNS 계정이 있었고 사진도 많았다. 사진 대부분은 자신의 학원이나 수업을 홍보하는 내용이었지만, 중간중간 그녀의 일상을 담은 사진도 보였다. 커피를 마시며 찍은 사진, 친구들과 찍은 사진 등. 친구들로 보이는 얼굴들에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확실한 건 미연이의 얼굴이 너무도 밝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메시지를 보내볼까. 나는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창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뭐라고 보내야 할지가 막막했다.
「미연아! 나야, 성우. 넌 괜찮아? 도대체 우리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너 어디 있어?」
처음엔 이렇게 썼다가 지웠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미연이의 번호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유상헌은 미연이를 내 ‘전 여친’이라고 지칭했으니까.
「미연아.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 그런데 물어볼 게 있어. 혹시 다은이에 대해서 아니?」
이렇게 써 두고 또 고민했다. 다짜고짜 다은이에 관해 물어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모두 잊고 그냥 전 남친이 전 여친에게 몇 년 만에 연락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메시지를 썼다.
「미연아, 잘 지내지? 나 성우야.」
나는 이렇게 쓰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대답이 금방 오지는 않았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책상 위에 있는 담배에 시선이 멈췄다. 아까부터 나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내 몸이 자꾸만 담배 연기를 마시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충동적으로 담배를 들고 흡연장으로 나갔다. 불을 붙이고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에게는 기침이 나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기침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니코틴이 온몸에 퍼지며 불안했던 감정들이 식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던 세포들이 일어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머릿속 회로를 하나하나 자극해주는 기분이었다. 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들어있는 이 몸은 분명히 담배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그때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난 잘 지내. 무슨 일이야?」
미연이에게 온 것이었다. 프로필 사진은 웃고 있지만 미연이의 대답은 딱딱했다. 그녀의 말을 보니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것이 더 실감이 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대방을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부부였는데, 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걸까. 나는 담배를 한 번 더 깊게 빨아들이고 다음 말을 입력했다.
「갑자기 이런 거 물어봐서 미안한데, 다은이에 대해 알아?」
「무슨 다은이 말하는 거야? 친구 중에 최다은이라는 친구는 있어.」
무슨 다은이냐니. 너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신다은. 힘들고, 기쁘고, 슬프고, 행복한 모든 감정을 함께 느끼고 있는 우리 딸.
더는 그녀와 대화하는 것도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괜히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아냐, 미안해. 내가 뭘 좀 착각했나 봐. 잘 지내고.」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라는 말을 붙이려다가 말았다. 내가 내 아내에게 잘 지내라는 말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비참하게 느껴졌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우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한참 동안 연구실에서 멍을 때리다가 나는 지금 겪고 있는 일을 글로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글로 쓰는 일은 억지로 일기를 쓰던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특히 어제까지의 일도 기억해서 쓰려다 보니, 개학 직전이 되면 일기를 몰아 쓰던 시절이 생각났다.
점심시간도 훨씬 지나고 있었지만 나는 배고픔 따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막상 글을 쓰다 보니 한두 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았다. 그때 노크도 없이 갑자기 연구실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미연이가 들어온 줄 알았다. “놀랐지? 서프라이즈! 바보야, 왜 이렇게 잘 속아?” 따위의 말을 할 것만 같았다.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게 느껴졌고, 그녀를 한참 동안 못 보았다가 다시 본 것만 같은 애절한 감정이 가슴을 찔렀다.
곧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미연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헛것을 본 건은 아니었다. 미연이를 닮은 사람이 들어온 거니까.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기도 했던, 내 수업을 듣는 나윤 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