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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Oct 03. 2024

(10화) 9월 14일 (5)


 나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그 목소리는 다은이가 아닌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나를 부른 건 주원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내가 다은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를 보았다. 아이도 주원이의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만 닮았을 뿐 다은이가 아니었다. 뭘 기대한 것일까. 아침부터 이어져 온 레퍼토리대로라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아이는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무서웠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아빠 왜 그래?”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고 주원이 물었다. 이어 어린이집 선생님이 다가왔다.


 “어, 주원이 아버님 오셨어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나는 원래 다은이를 데리러 이곳에 자주 왔었고, 어린이집 선생님은 내가 아는 얼굴 그대로였다. 다만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다은이 아버님’에서 ‘주원이 아버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선생님. 저, 혹시…… 여기 다은이라는 아이 있나요?”

 “다은이요? 아시는 아이예요? 저기 미끄럼틀에서 지금 내려오는 아이 보이세요?”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미끄럼틀을 타고 한 아이가 해맑게 내려오고 있었다. 


 “저 아이가 다은이에요, 김다은”


 역시 얼굴을 보니 전혀 다른 아이였고, 이름도 신다은이 아니었다. 나는 어린이집을 둘러보았다. 다은이와 똑같이 생긴 아이는 없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 세상에 나도 미연이도 상헌이도 있지만 다은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나는 주원이를 차에 태워서 집으로 향했다. 뒷좌석 카시트에 주원이를 태우고 운전을 하는 동안 정적이 흘렀다. 분명 내 어릴 적 모습을 꼭 빼닮은 아인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정적을 아이가 먼저 깼다. 


 “아빠, 어디 가? 우리 집 안 가?”


 순간 정신이 들었다. 나는 어제까지 살던 원래 집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어제 만난 민주가 살고 있던 옆 동이었다. 


 “미안, 아빠가 잠깐 딴생각하다 길을 잘못 들었네.”


 나도 모르게 아빠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집에 돌아와 주원이와 둘이 있으니 고요함이 집을 가득 채웠다. 내 아이라고 믿어야 할지 모르겠는, 어쩌면 환상일 뿐이고 내일이면 사라질 수도 있는 이 아이와 무엇을 해야 할까. 다행히 아이는 거실에서 블록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잘 놀았다. 나는 서재에서 방문만 열어 둔 채 주원이가 잘 있는지 흘긋 보면서 이 글을 써나갈 수 있었다.


 한두 시간 후에 민주가 양손 가득 식재료를 사서 들어왔다. 잊고 있었는데 민주는 나와 연애하던 시절에도 요리를 좋아할 뿐 아니라 실제로 잘하는 여자였다. 내 자취방에 놀러 올 때면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음식들로도 그럴듯한 밥상을 차려주곤 했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맛있는 밥 해줄게. 오빠는 주원이랑 좀 놀아주지 방에서 혼자 뭐 해?”


 사실 미연이는 요리를 잘하지 못했기에 미연이와 살 때는 밥을 사 먹는 일도 많았고, 요리를 한다면 요리사는 주로 나였다. 모든 게 다 낯선 상황이지만 조금 색다른 느낌이 들긴 했다. 


 나는 민주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거실로 나왔다. 그러자 주원이가 나한테 달려왔다.


 “아빠, 아빠! 나 로케트 놀이 해줘!”


 로케트 놀이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원이는 나에게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주원이를 안고 한쪽 벽으로 가서 주원이가 발의 힘으로 벽을 밀치게 했다. 이미 익숙한 놀이인지 호흡이 제법 잘 맞았다. 나는 다시 반대편 벽으로 달려가서 똑같이 주원이가 발로 벽을 밀치게 했다. 다은이에게도 몇 번 해준 적이 있는 놀이였다. 하지만 다은이는 여자아이라 그런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로케트 나간다! 슝슝!!” 


 다행히 이 아이가 원하는 놀이를 잘해 준 것 같다. 이 집은 원래 집과 분명 다른 집이지만 구조가 똑같고, 가구나 인테리어도 절반은 비슷한 집이었다. 다른 아이를 안고 이 집을 뛰어다니니 꿈인 듯 현실 같기도 하면서 기분이 묘했다. 


 민주가 밥상을 다 차리고 나는 식탁에 앉았다. 식탁은 원래 쓰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것이었다. 미연이가 앉아야 할 자리에 민주가 앉았고, 다은이가 앉아야 할 자리에 주원이가 앉았다. 식탁 위에는 제육볶음, 계란말이를 비롯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민주와의 기억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차려진 음식만 보아도 익숙한 느낌이 몰려왔다. 막상 음식을 입에 넣으니 잊고 있던 민주의 음식 맛이 조금씩 기억을 깨우는 것 같았다. 민주의 얼굴, 목소리, 향기, 감촉보다도 민주가 해준 음식이 그녀와의 기억을 가장 잘 떠오르게 했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하고 힘들었던 시기. 생각해 보면 그 좁은 자취방에서 민주와 밥해 먹고 웃고 떠들던 그 순간들도 나름 행복했던 추억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란말이에 당근 얼마나 들었다고 그걸 발라내면 어떡해!”

 “씹는 느낌이 이상하단 말야!” 


 민주가 편식하는 주원이를 혼냈다. 나도 그랬었는데. 지금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당근을 싫어해서 어릴 적에는 음식에서 꼭 당근을 빼놓고 먹곤 했다. 작은 알갱이로 든 당근마저 발라낸다고 늘 엄마한테 혼났다. 지금은 내 앞에 주원이가 똑같이 그러고 있었다. 


 “그래도 고기는 엄마가 해주는 게 제일 맛있어, 엄마”


 보면 볼수록 주원이는 나를 닮은 것 같았다. 사실 다은이는 엄마인 미연이를 닮았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주원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 어릴 적 사진과 판박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겪는 오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뭐래도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는 아이였다. 순간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이 식탁에 미연이와 다은이가 앉게 된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혼란스러운 하루를 보내느라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뜻밖에 익숙한 맛의, 훌륭한 요리가 차려져 있으니 제법 저녁을 든든하게 먹었다.


 그리고 주원이도 잠시 후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민주와 단둘이 대화하기도 두려웠기에 서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민주가 불렀다. 


 “오빠, 일해야 돼? 한잔 마실까? 아까 마트 갔을 때 오빠 마시라고 3도짜리 과일맥주도 사 뒀어.”


 민주는 예전부터 술을 좋아하기도 했고, 워낙 활발한 성격에 친구도 많아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다. 내가 술을 많이 못 마시는 것을 섭섭해했었는데, 나를 위해 저알콜 맥주를 사둔 건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맥주 캔을 보고 있자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잠든 아이. 그리고 둘만의 술 한 잔. 어제는 지금과 똑같은 이 상황에 나는 와인을 마시고 쓰러졌고, 눈을 떠 보니 인생이 달라져 있었다. 만약 와인이 이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한 매개체라면? 지금 내가 어제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해 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오늘 하루가 이상했던 것이지, 자고 일어나도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민주야, 혹시 집에 와인도 있나? 레드와인.” 

 “응? 오빠가 와인은 왜? 전에 사둔 거 있긴 하지. 맨날 나 혼자서만 마셨었는데.”


 민주가 의문스러운 눈을 하더니 찬장을 열어 와인을 꺼냈다. 그리고 병을 이리저리 돌리며 알코올 함량을 확인했다. 


 “이거 14도야, 오빠. 나는 마시더라도 오빠는 안 될 거 같은데.”

 “아냐. 오늘은 그게 땡기네. 와인으로 한잔 하자.”


 그렇게 식탁에 다시 앉아 와인을 따르고 건배를 했다. 나는 곧바로 두 모금을 입에 넣고 삼켰다. 꿀꺽꿀꺽 소리가 민주에게까지 들렸을 것 같았다. 


 “천천히 마셔, 오빠. 그러다 토하는 거 아냐?”

 “민주야 혹시, 그날 기억나? 7년 전에 네가 나한테 문자 보냈던…….”


 나는 내가 왜 민주와 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유상헌은 나한테 분명 미연이가 내 전 여자친구라고 했고, 그렇다면 7년 전 그 문자가 관련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 문자를 받고 잠시나마 다른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정전 일어났던 날 말이지? 그럼, 당연하지. 기억뿐이겠어? 그게 운명을 바꾼 문자였는데.”


 운명? 아니. 내 운명은 미연이와 함께 다은이를 낳고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민주는 그 말에 또 설레는 과거가 떠올랐는지 해맑은 표정이었다. 


 “솔직히 난 간절하긴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했어. 그때 오빠가 다른 여자랑 곧 결혼할 거라는 소식도 들었으니까. 근데 조금 있다가 오빠한테서 문자도 아닌 전화가 와서 깜짝 놀랐잖아.”


 그게 정말 나의 행동이었다면, 전화로 무슨 말을 했을지는 대충 예상해 볼 수 있었다. 


 “그래도, 후회하고 있다는 네 말에 마음이 좀 움직였었나 봐.”

 “그치? 우리 연애하던 때 내가 오빠 힘들게 했던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하긴 해. 근데, 요즘은 어때? 나 그래도 잘하고 있지 않아?”


 민주가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밀더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사실 꽤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어쩌면 이제 내 얼굴을 들이밀며 입을 맞추고, 자연스럽게 그녀와 침대로 가야 할 타이밍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란스러웠다. 지금 민주는 내 아내로서 옆에 있다지만, 나는 바로 하루 전까지 미연이의 아내였고, 다은이의 아빠였다. 아니,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다시 바로잡을 것이다. 


 나는 민주의 눈을 살짝 피해 손에 쥔 와인잔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홀짝거렸는지 어느새 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곧이어 술기운이 뒷머리에서부터 느껴지더니 머리 전체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어지럽고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오빠, 괜찮아?”


 곧 나는 식탁에 쓰러지거나 어제처럼 바닥에 쓰러질 것이다. 나는 알코올에 정신을 대부분 빼앗겼지만 남아 있는 모든 정신을 다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다시 눈을 뜨면 내 앞에 미연이와 다은이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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