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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Oct 04. 2024

(11화) 9월 15일 (1)

9월 15일



 「삐비비비 삐비비비」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않은 채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알람을 껐다. 다행히 내가 손을 뻗은 장소에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곧이어 나는 잠에서 깼다는 것을 자각했다.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이제 눈을 뜨면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내 앞에 미연이가 있을지 민주가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인생이 되어 있을지 정해질 것이다. 나는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눈을 질끈 감은 채 눈꺼풀을 조금씩 열어 갔다. 


 먼저 어제와 마찬가지로 방의 한쪽 벽이 보였다. 회색 같은데, 어둡기도 하고 술에 취한 상태여서 확실하진 않았다. 내 옆에 미연이가 누워 있다면, 벽지의 색은 순백색이었어야 했다. 점점 정신이 돌아오며 벽지에서 푸른빛이 느껴졌다.


 “오빠 깼어? 나 10분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당연히 알 수 있다. 미연이가 아닌 민주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동갑인 미연이는 나를 오빠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의 모습도, 내가 입고 있는 옷도 어제와 똑같았다. 여전히 나는 바뀐 세상에 살고 있었다. 어제의 일은 하룻밤의 꿈처럼 지나가길 바랐고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내 옆에 미연이가 없는 것은 실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민주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내 인생이 또다시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바뀌어 버렸다면 더 혼란스러웠을 테니까. 


 더는 좌절에 빠져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나는 분명 민주와 함께하고 있는 이 세상에 계속 갇히게 될 것이다. 하루빨리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아내고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씻고 나왔다. 그 사이 민주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빠가 주원이 등원시키는 날인 거 알지?”


 나의 스케줄은 민주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강의 시간표를 보니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이었는데, 이런 날은 내가 주원이를 등원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교수라는 직업은 강의만 제외하면 출퇴근에 제약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연구실이나 강의실에 있는 시간만이 일하는 시간은 아니라는 의미지만.


 어린이집은 어제도 가 보았기에, 등원을 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주원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차에 올라타 길을 나섰다.      


 나는 정신과에 가 볼 생각이었다. 내 인생이 바뀐 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중에 한가지 빠뜨린 게 있었다. 그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나만 미쳐버렸다는 것.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뭐라도 해야만 했다. 


 지금은 남남이 되었지만 원래 가장 친구였던 유상헌이 얼마 전에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사소한 우울증이고 곧 해결될 거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우연히 종로에 유상헌과 밥을 먹으러 왔다가 그가 손가락으로 간판을 가리키며 여기에 다닌다고 말했다. 일부러 주변 눈을 피해 직장에서도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다닌다고 했다. 


 어차피 아는 곳이 없으니 이왕이면 유상헌이 다니던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위치에 그 병원이 그대로 있어 준다면.      




 종로의 거리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직장과도 집과도 가까운 곳이라서 한두 달에 한 번은 꼭 오는 곳이었는데, 분명 내가 알던 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선 곳이 많이 보였다. 내가 오지 않은 한두 달 사이에 모조리 폐업하고 새로 개업했다고 보기는 힘들 만큼. 하지만 다행히 상헌이가 다닌다던 정신과는 그대로 있었다. 


 정신과 원장은 50대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안경을 쓴 지적인 얼굴이 믿음직스럽긴 했지만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네, 신성우님. 어서 오세요. 좀 어떠신가요?”


 난생처음 정신과에 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의사가 어떠냐고 물었으니, 내 증상을 말할 차례였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내가 겪은 일을 글로 다 정리하고 있는데도 막상 말을 하려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네, 제가 원래 우울증이나 다른 질환이 있는 게 전혀 아니었고요. 그저…… 아내와 딸이랑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요. 어제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내 아내가 되어 있었고, 그 여자와 나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다. 원래 아내와는 사귀다가 헤어진 사이가 되었고, 딸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와는 남남이 되었고,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씩 달라진 느낌이다. 말을 하다 보니 내가 겪고 있는 일이 새삼 또 두렵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며 수도 없이 말을 더듬었던 것 같다. 말을 하면서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누가 내 감정을 조금만 더 건드렸다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5분은 가까이 혼자 말을 하지 않았을까. 의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다가 한 번씩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는데, 중간중간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의사는 뭐라고 답을 할까. 아무래도 내가 망상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까? 나를 믿지는 않을 테니까. 


 “증상이 많이 나빠지셨네요.” 

 “네? 나빠지다니요?”


 처음 의사의 앞에 앉았을 때부터 뭔지 모를 위화감이 조금씩 느껴졌다. 그리고 방금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서 확실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증상이 나쁘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처음 본 환자에게 증상이 나빠졌다니? 나빠졌다는 건 무언가 비교할 대상이 있을 때 쓰는 말이다. 


 “신성우님. 그러면 오늘 여기 처음 오신 건가요?”

 “네, 당연하죠. 여기뿐만 아니라 정신과라는 곳을 처음 와 봤는데요. 제가 원래 우울증이나 그런 게 있는 사람이 아니……”

 “신성우님은 작년 10월에 처음 여기 오셨어요. 그 후로 8개월쯤 주기적으로 다니셨고, 3개월 전부터는 오지 않으셨고요.”

 “뭐라고요?”


 순간 놀라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힘에 내가 앉아 있던 바퀴 달린 원통형 의자가 뒤로 밀려 벽에 부딪혔다. 


 “괜찮아요. 천천히 마음 진정되시면 다시 앉으세요. 신성우님은 3개월 전까지는 단순 우울증 증세였지, 지금과 같은 망상 증세가 있지는 않으셨어요. 왜 오시지 않나 걱정되긴 했지만요”


 침착하자. 내가 민주와 함께 다른 인생을 살고 있던 게 사실이라면, 나한테는 그 기억이 없으니 이곳에 왔었다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의자를 가져와 아까보다 의사와 더 가까이에 앉았다. 


 “선생님, 그러면 제가 여기에 왜 왔었나요?”

 “신성우님은 지금 기억이 전혀 안 나시는 건가요?”

 “네. 말씀드린 대로예요. 어제부터 모든 게 바뀌었고, 그 이전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기보다 지금이랑은 완전히 다르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겠죠?”

 “환자분은 후회되는 과거가 있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매일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요. 그런 생각들과 현실의 괴리가 우울감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었죠.”

 “혹시…… 결혼에 관한 것인가요?”

 “네 맞아요. 그건 기억이 나시나요?”

 “아뇨 기억이 나는 게 아니라 지금 상황이……”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의사가 한숨 쉬듯 말했다.


 “제 진단은 이래요, 신성우님. 환자분은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바뀌었을 지금의 달라진 인생을 수도 없이 상상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러다 보면 결국 신성우님 스스로도 그 상상을 사실로 믿게 되었을 수도 있죠.”

 “그러면…… 제가 이틀 전까지 함께한 가족들은 모두 상상이라는 건가요?”
  “맞아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요. 의사의 소견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되네요. 어쩌면 그 기억들이 전부 다 상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일 수도 있고, 또는 지금의 아내와의 기억인데 그 대상만을 바꿔서 기억하고 계신 것일 수도 있죠.”


 모든 게 다 상상이라고? 내가 민주와 주원이랑 살고 있었게 진실이고, 미연이와의 인생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인가. 말도 안 된다. 내가 미연이와 다은이와 함께한 몇 년간의 세월이 모두 상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처음으로 내 모든 것을 털어놓으니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신성우님. 그럼 이렇게 해 볼까요? 등받이에 기대셔서 눈을 감으시고 한 번 제 말을 따라 기억을 되살려 보세요.”


 의사는 내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최면 같은 것인가. 나는 의자에 눕듯이 앉아 눈을 감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서웠다. 이 의사의 말이 사실이면 어떡하지? 다은이는 정말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아이인 것일까? 


 “자, 그럼. 기억하기 쉽게 작년 크리스마스로 까볼까요? 그날 뭘 하셨는지 기억나시나요?”


 천천히 집중하며 기억을 떠올리자 눈꺼풀이 만든 어둠 속에 몇 가지 광경들이 스쳐 갔다. 흐르는 물, 화려한 조명, 산타모양 풍선, 방긋 웃는 다은이의 얼굴…. 


 “밤에 청계천에 갔었어요. 아내와 딸과. 연애하던 때에도 갔던 곳인데, 몇 년 만에 다시 가 보니 온통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죠. 딸에게 산타 모양 풍선을 사 주고, 행복하게 걸었어요.”

 “그 아내와 딸은 누구죠?”

 “미연이…… 그리고 다은이에요.”

 “좋아요. 그러면 상상 속에 떠오른 그 이미지에, 지금 오늘 신성우님 옆에 계신 아내분과 아드님의 얼굴을 대입해 보세요.”

 “실제로는 그랬을 거라는 겁니까?”

 “어느 쪽이든 상상을 하다 보면 확실해지는 순간이 있을 수 있어요.”


 의사가 시키는 대로 다시 상상을 시작했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광화문 광장을 지나 청계천을 향하고 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건 다은이가 아니라 주원이고, 주원이의 다른 한 손을 민주가 잡고 있다.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 찬 청계천을 걷다가 풍선 장수를 만나자 주원이가 풍선을 사달라고 조른다. 산타 풍선을 사 주고 행복하게 걷는다. 그러다가 화려한 공주 옷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 선생님! 생각났어요. 분명 기억나요. 그날 만화에 나오는 공주 옷을 판매하는 상점이 있었어요. 다은이가 사 달라고 졸랐고, 아내와 저는 고민 끝에 사 줬죠. 그리고 집에 와서 다은이가 그 옷을 입고 한참을 뛰어다녔어요. 렛잇고~ 하고 만화 노래를 부르면서요. 원래는 딸이 있었고 지금은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공주 옷을 사달라고 그랬다는 건 어색하잖아요.” 


 나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민주와 함께한 일을 미연이와의 기억으로 바꿔서 기억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신이 틀렸고 내 말이 맞는다고 의사를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의사는 한참 동안 미간을 찌푸리더니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환자분. 제가 생각한 것보다 증상이 훨씬 심하신 것 같아요. 저와 상담하신 기록을 보면, 환자분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여기에 오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들이 감기에 걸려서 크리스마스 내내 집에 있었다,’ 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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