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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Oct 07. 2024

(13화) 9월 15일 (3)


 고요함이 유상헌의 연구실을 한참 동안 가득 채웠다. 나도 유상헌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받은 충격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 충격을 그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침묵이 고요하다 못해 괴로워질 무렵, 나는 입을 열어 아무 말이라도 하려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그동안 썼던 이 글을 상헌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이라도 하려다 횡설수설하는 것보다, 이 글을 보여 주는 것이 내가 최근 며칠 동안 겪은 일을 상헌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유상헌의 사내 메일 주소를 찾아 이 파일을 보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요 며칠 내가 겪은 일들을 기록해 둔 거니까 진정되면 읽어봐.”


 나는 노트북을 챙겨 내 연구실로 돌아왔다. 고요한 공기 속에 둘이 있을 바에야 잠시 각자 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상헌에게 내 글을 읽을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고, 나도 조금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제는 내게 벌어진 이 일이 꿈도 망상도 아니라는 게 자명해졌다. 유상헌이 나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이 일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 나를 둘러싼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비록 하루의 시차가 있더라도 유상헌과 내가 같은 일을 겪었다면, 적어도 우리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완전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담배 생각이 났다. 본능적으로 담배가 들어있을 서랍을 열었다. 분명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담배가 당기는 인력에 이끌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담배를 가지고 흡연장으로 나와 불을 붙였다. 


 연기를 몇 모금 마시며 가슴이 편안해지는 순간 멀리서 걷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찰나의 순간은 또 미연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나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양옆에 남학생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 남학생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할 것이었다. 그런 여학생이 교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 대상이 나라는 걸 자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나윤은 점점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이러다 눈이 마주치겠다 싶었다. 순간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했을 때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어쨌든 내 인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유상헌과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어쩌면 나윤과 나의 관계도 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곧이어 나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양옆의 남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나에게 살짝 윙크를 보냈다. 잠깐 세웠던 가설은 바로 폐기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유상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어제와 같은 모양이었다. 


 담뱃불을 끄고 들어가려는데 유상헌에게 전화가 왔다. 


 “잠깐 내 방으로 올래?”


 유상헌은 평소 매우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이 상황에 이성적이라는 건 말이 안 되지만, 조금 전보다는 원래의 모습을 많이 찾은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유상헌의 연구실 문을 열었다. 분명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칠판을 바라보며 서 있는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간혹 유상헌은 무언가에 꽂히면 연구실 칠판이 수식과 공식으로 가득 채워지도록 몰두하곤 했다. 지금은 다행히 칠판에 수식은 없었다. 칠판에는 몇몇 이름들과 함께 세 개의 네모 칸만 그려져 있었다. 


 “왔어? 이게 내가 정리한 우리 상황이야.”


 상헌은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칠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새 그는 물리학에 몰두해 있는 이성적인 박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중우주에 대해 들어봤지?”

 “들어는 봤지.”


 물리학에서 쓰는 용어지만 나에게도 전혀 생소한 단어는 아니었다. 현대 철학에도 다중우주의 기본 개념들이 쓰이기도 하고, 최근 워낙 대중 매체에서도 많이 다루고 있으니까.


 “내 가설은, 원인은 모르겠지만 우리가 다중우주를 이동했다는 거야.”


 유상헌은 칠판에 그린 세 개의 네모 칸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신성우. 너는 원래 미연씨랑 결혼했었다고 했었지? 네 기억 속에 나는 결혼한 적이 없다고 했고. 너는 원래 이 A 우주에 살고 있었어.”


 유상헌이 빨간색 매직을 들더니 A라고 쓰인 네모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이 와중에 매직 색까지 바꿔가면서 설명할 여유가 있나 보다.


 “내 기억 속에서도 너는 미연씨와 결혼했어. 다은이를 낳았고. 그런데 내 기억은 이 A 우주랑은 달라. 나는 민주랑 결혼했거든. 나는 여기 C 우주에서 온 거지.”


 유상헌이 다시 C를 둘러싸는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B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우주는 원래 우리가 살던 세상과는 또 달라. 우리는 B에 있는 거야. 최소 3개의 다중우주가 존재하고, 우리가 다중우주를 이동했다고 하면 우리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어.”

 “다중우주라는 게 있다고 해도 그걸 이동할 수가 있어?”

 “그건 아직 설명할 수가 없어.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는 것도 이론일 뿐인데, 만약 존재한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니까.” 

 “그럼, 원래 우주로 돌아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걸 안다면 유상헌은 내가 묻지 않아도 그 방법을 먼저 설명했을 것이다. 나만큼이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테니까. 유상헌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내가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연히 나도 몰라. 그런데 어쨌거나 이제 어떤 형태로든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는 건 확실해진 것 같아.”

 유상헌이 반대쪽 벽의 책장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다중우주 이론은 양자역학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등장했어. 광자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는데, 다중우주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설명할 수가 있었던 거지. 정확히는 다세계 해석이라고 해.”


 유상헌은 책장에 놓인 한 액자를 꺼내며 나에게 보여 주었다. 액자에는 학위복을 입은 유상헌이 꽃다발을 든 채 한 중년 여성과 함께 서 있었다. 나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너도 아는 분이지? 정문숙 교수님. 이분이 다세계 해석을 지지하면서 수많은 논문을 쓰셨는데, 세계적으로도 다세계 해석의 대표 학자로 꼽혀.”

 “어? 맞아. 기억나. 대학원에 있을 때 너랑 같이 식사한 적도 있고. 그즈음에 철학과랑 물리학과랑 공동으로 참여했던 세미나에서 뵙기도 했어.”

 “아무것도 장담할 수는 없어. 하지만 이분이 국내에서는 단연코 다세계 해석의 일인지라도 할 수 있으니까. 이분을 뵙는다면 뭐라도 도움 되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나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일 거야.”

 “우리 학교 교수님이었잖아? 지금도 학교에 계신가?”

 “아니.”


 유상헌은 액자를 다시 책장에 세워 놓고는 자기 책상에 앉았다. 


 “7년 전쯤인가?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하신다면서 하시던 연구랑 강의를 다 중단하셨어. 학기 도중에 하시던 강의도 그만두고 다른 교수에게 넘기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심지어 몇 달 후에는 우리 학교를 그만두셨다는 소식이 들렸고. 교수님께 연락해보려고 했는데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쓰시던 번호도 다 지워졌고.”

 “기억난다. 네가 은사님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말했던 적이 있어. 내가 미연이랑 결혼 앞두고 있을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학과에서 여러 소문이 돌았어. 정부랑 비밀리에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잘못되어 잠적했다느니, 사실 정부가 아니라 CIA였다거나, 심지어 실제로 다중우주를 이동하는 방법을 찾아내서 다른 우주로 이동했다는 말까지 나왔어.”

 “그럼, 지금으로서는 너도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거야?”


 유상헌이 노트북을 펼치더니 마우스로 무언가를 몇 번 클릭했다. 


 “조금 전에 네가 나갔을 때, 지금 있는 연락처로 전화해 봤는데 역시나 받지 않았어. 그래서 예전에 알던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어. 너랑 내가 겪은 일을 간단히 적고, 한번 찾아뵙고 싶다고.”

 유상헌이 허리를 숙여 모니터 가까이에 머리를 갖다 대더니 고개를 살짝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으로 읽으신 건지, 보낸 지 몇 분 만에 수신 확인이 됐어. 그런데 지금까지 답장이 없어.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은데, 정 교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현재로선 교수님께 물어보는 게 최선의 방법일 거야.”


 유상헌과 함께 머리를 싸매고 한참을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몇 시간이고 계속 여기에서 정 교수님의 답장을 기다리고 싶었다. 유상헌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공간에 유상헌과 단둘이 있는 게 요 며칠 사이 중 가장 편한 시간인 것 같았다.    


 「오빠, 퇴근 중이야? 올 때 계란 좀 사 올 수 있어?」     


 핸드폰이 울리더니 민주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교수님의 답장이 오면 알려달라고 말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원래의 가정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이 있었다. 나는 백 퍼센트 미연이와 다은이에게도 돌아갈 수 있고,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민주와 주원이는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면 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내 가족에게도 최소한의 도리는 다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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