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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Oct 09. 2024

(15화) 9월 16일 (2)


 “그래서 연락을 했어?”


 상헌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내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았다.


 “아, 아냐. 난 정말 괜찮아. 난 미연이의 남편이고, 네가 민주와 같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면 나도 좋아.”

 “그러니까…… 네가 미연씨랑 결혼하기로 한 때부터 민주에게 연락해 볼까 말까 고민이 됐는데……. 처음에는 며칠 동안 선뜻 용기를 못 내고 고민만 하고 있었어. 내가 이 얘기하면 네가 웃을 거 같긴 한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상헌이 뜸을 들였다. 그때가 서른쯤의 나이였을 텐데, 아마 상헌은 그때까지 이성에게 호감 표현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분명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민주한테 보내는 문자 메시지를 작성만 해 놓고, 주사위를 굴렸어. 홀수가 나오면 전송 버튼을 누르고, 짝수가 나오면 다시는 민주에게 연락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엥? 이거 진짜 또라이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긴, 물리학 천재이자 연애 바보인 유상헌답긴 했다.


 “그래서, 홀수가 나와서 보낸 거야? 너 자신과의 약속대로?”

 “그렇지. 홀수가 나오자마자 고민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어. 그랬더니 조금 뒤에 전화가 왔어, 민주한테서. 너무 놀라서 지금 생각해도 그때만큼 심장이 더 크게 뛴 적은 없었을걸. 그리고 민주를 만났어. 며칠 전에 민주가 너한테 문자를 보냈는데 네가 답장도 안 했다면서 섭섭해하더라.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나를 만난 것 같긴 해. 나는 네가 다른 여자랑 곧 결혼할 거라고 말해줬어. 너한텐 미안해.”

 “나한텐 안 미안해해도 된다니까.”

 “그 말 듣고 민주는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았어. 밤늦게까지 같이 술 마시면서 몇 시간 동안 네 욕을 계속했어. 안 미안해도 되는 거 맞지?”

 “아, 새끼 진짜. 어쩐지 그날 귀가 간지러웠던 것 같다. 멱살 잡고 싶은데 운전 중이라 참는다”


 상헌과 나는 마주 보며 웃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상헌도 나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은 것 같다.


 “다중우주론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발생 가능한 모든 세계들이 중첩되어 존재하다가 관측하는 순간 다른 세계로 분리된다고 하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유상헌이 또 현학적인 말을 뱉기 시작했다. 유상헌이 나를 힐긋 보더니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고 쉬운 표현으로 바꾸어 말했다.


 “내가 민주에게 문자를 보내기 전에 주사위를 던졌으면, 각 6개의 눈금이 나온 6개의 다중우주가 모두 존재한다는 거야. 그때는 분명 홀수가 나와서 문자를 보냈는데, 반대로 짝수가 나온 우주도 있을 거고. 네 기억 속에서 내가 여전히 싱글이라며? 어쩌면 네가 살던 우주는 네가 결국 미연씨를 선택했고 내 주사위에서는 짝수가 나온 우주일 수도 있지.”


 유상헌이 주사위를 던진 행위가 6개의 다중우주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뭐, 대단하게 들리긴 하겠지만 무한한 우주를 생각한다면 아무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던져도 두 개의 다중우주가 만들어진다는 것일 테니까.


 “난 민주를 정말 사랑해.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꼭 돌아갈 거야. 홀수가 나온 곳.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상헌이 평소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장한 말투로 말했다. 사랑과 같은 단어가 유상헌의 입에서 나온 것도 처음 듣는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저 주사위 한번 굴리는 행동일 뿐이었는데, 몇 년이 지나니 이렇게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인가. 하긴, 나도 7년 전 그날 민주에게 답장을 보낼지 순간 고민했으니까, 보낸 것과 안 보낸 것으로 두 가지 버전의 인생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땠어? 민주와의 결혼생활은?”

 “너무 행복했지. 너도 알겠지만, 민주는 정말 멋진 여자야. 요리면 요리, 악기면 악기, 운동이면 운동. 뭐 하나 못 하는 게 없고 정말 생활력이 강한 여자였어.”


 헤어진 사이이지만 그의 말에 틀린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나와, 아니 더 정확히는 당시의 내 상황과 맞지 않았을 뿐. 


 “이렇게 됐으니까 말하는 건데, 네가 어쩌다 민주같은 여자를 놓친 건지, 이해가 안 가면서도 고맙기도 했어. 네가 민주랑 헤어진 덕에 나랑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민주랑 만난다고 하니까 당시에 너도 진심으로 응원해 줬어.”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나는 당시에 미연이를 만난 게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

 나는 말없이 상헌의 말을 듣고만 있었고, 계속해서 상헌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또 네가 부럽기도 해. 민주의 아내니까.”

 “야, 그런 말은 할 필요 없어. 너나 나나 다시 돌아갈 거잖아? 나는 미연이한테로, 너는 민주한테로.”

 “그렇긴 하지.”


 그러고는 상헌은 말없이 운전하다가 차를 멈췄다. 창밖을 보니 어느 주택 앞에 멈춰 있었다. 내비게이션에서 도착을 알리는 메시지가 들렸다. 정문숙 교수님의 집 앞에 도착한 것 같았다. 


 교수님의 집은 오래된 단독주택이지만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되어 보였다. 상헌이 벨을 누르자 대문 안쪽에서 현관문이 열리더니 사람이 나오는 게 보였다.


 “유교수, 오랜만이야.”


 교수님이 대문을 열며 말했다. 거의 10년 만에 보는 거지만 나도 교수님을 분명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0년의 세월을 생각해도 너무도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비교적 통통한 체격의 여장부 같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흰머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건 둘째 치고 살이 쪽 빠져 초췌한 모습이었다. 여장부가 아니라 오히려 건강을 걱정해야 할 것 같은 외모였다.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안녕하세요? 신성우라고 합니다. 기억 못 하시겠지만 이전에 식사도 한 번 하긴 했는데…….”

 “기억 못 하긴요, 유교수 이 녀석이 맨날 친한 친구라고 얘기했었어요.”

 “아 그런가요? 그럼, 말씀 낮추세요, 교수님. 전에도 그렇게 하셨는데.”

 “허허. 그럼, 어서들 들어오게.”


 초췌한 몰골과는 다르게 교수님은 호탕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고, 여전히 목소리와 말투에는 여장부와 같은 예전의 모습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교수님은 우리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 하고 음료를 준비하겠다며 주방으로 갔다. 


 교수님의 가족관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혼자 살고 있는 집 같았다. 이 집에서 무엇을 하고 지낼까 생각이 들 정도로 가구나 물건 자체가 많이 없었다. 거실에 소파와 TV가 놓여 있고, 한쪽에 책장이 있었다. 책장에는 교수 시절 보았을 물리학 관련 서적이 가득했지만, 적어도 몇 달 동안은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쌓여 있었다. 


 잠시 후 교수님이 과일주스가 든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미리 온다고 연락해 줬는데도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군. 집에 손님이 온 게 워낙 오랜만이라서…….”

 “아닙니다, 교수님. 저희가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건데요.” 

 “그래. 어쨌든, 전화로 대충 들은 것만으로도 여유롭게 주스나 마실 상황은 아닌 것 같고.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줄래?”


 상헌은 자신에게 민주라는 아내가 있었다는 말을 시작으로, 어제부터 인생이 뒤바뀐 얘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교수님은 말없이 가만히 듣고 있었다. 상헌은 중간중간에 ‘믿으실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을 붙였는데, 교수님은 그럴 때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 같았다. 


 상헌의 말이 끝나고 교수님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는데, 그녀는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대답보다 내 얘기를 먼저 듣고 싶다는 것 같았다. 


 “상헌이가 아내였다고 말한 민주라는 여자가, 지금은 제 아내입니다. 그런데 저도 원래는 다른 아내가 있었는데, 이틀 전부터 민주가 제 아내가 되어있었습니다.”


 이 말을 시작으로 나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틀 전에는 상헌이 나에게 까칠하게 굴었다가, 어제부터 다시 달라진 이야기까지. 그리고 정신과 의사의 소견도 덧붙였다. 내 말이 끝났다고 생각하자 곧바로 상헌이 이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랑 성우가 기억하는 과거도 다른데, 만약 저랑 성우가 다중우주를 이동했다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저희가 있는 이 우주랑 제가 살던 우주, 성우가 살던 우주가 모두 다르다면요.”


 여전히 교수님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고, 상헌의 말을 들으면서는 한참 동안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말이 없는 교수님이 답답한지 상헌이 보채듯 말을 이었다. 


 “물론 저희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셔도 이해합니다. 교수님께서 다중우주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하셨다고 하지만 다중우주를 이동한다는 것은…….” 

  “아니야.”


 교수님이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상헌의 말을 잘랐다.


 “내가 믿지 못하는 게 아니야. 누구보다도 믿고 있네. 자네들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이렇게 왔겠나? 그리고 유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 비효율적인 행동은 이유 없이 절대 안 하지. 이 늙은이를 데리고 장난이나 칠 사람이 아니잖아. 나는 그냥…… 자네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야.”

 “미안하다니요?”


 반사적으로 내가 물었다. 다중우주의 대가였다는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들었다면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해 주거나,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야 정상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교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교수님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이 그런 일을 겪은 게…… 모두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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