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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Oct 08. 2024

(14화) 9월 16일 (1)

9월 16일



 생각이 많아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혹시라도 유상헌에게 정문숙 교수님의 회신을 받았다는 연락이 올까 봐 계속해서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교수님이 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다줄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작은 실마리라도 얻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풍 가기 전날 밤 초등학생처럼 가슴이 계속 뛰었다.


 “아빠, 일어나!”

 “그래, 주원아. 아빠 좀 흔들어 깨워 봐.”


 눈을 뜨자 이미 햇살은 방구석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주말이긴 했지만 어젯밤에 늦게 잠이 드는 바람에 늦게까지 잠을 잔 것 같다. 주원이는 인제 그만 일어나서 놀아달라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고, 민주는 곧 외출할 사람처럼 젖은 머리를 한 채로 화장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 어디 가기로 했었나?”

 “우리? 아니, 내가 며칠 전에도 말했잖아.”


 며칠 전이라면 내 기억 속에 없는 순간일 수도 있다. 내가 미연이와 살고 있었던 때라면. 민주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늘 전에 연주회 같이했던 멤버들이랑 점심 약속 있다고 했잖아.”

 “아…… 그렇지? 그럼, 나는?”

 “왜 이래? 오빠는 주원이 봐야지. 나도 점심만 먹고 올 거니까 그렇게 늦게 오진 않을 거야.”


 이 아이랑 단둘이 몇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출근하는 게 주말보다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여기선 내 아들이라지만 좀 어색했다. 나에게는 주원이를 본 게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다시 미연이와 다은이에게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니, 이 아이에게 정을 많이 주는 게 맞을지도 고민이 되었다.


 잠시 후 민주가 집을 나가자 주원이와 둘이 남은 집에는 적막이 흘렀다. 내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거실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자 주원이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아빠, 오늘 우리 뭐 할 거야?”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나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밖으로 싸돌아다니며 고군분투했을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육아라는 큰 장벽이 앞에 있었다. <패밀리맨>의 니콜라스 케이시는 결혼도 해 본 적 없는 남자에게 갑자기 아이가 둘이나 생겨서 갑작스럽게 육아를 경험하느라 힘들어하지 않았나.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적어도 원래부터 주원이만 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라는 것이었다.


 “주원이, 뭐 하고 싶은데?”

 “음. 놀이공원! 놀이공원!”


 오늘 유상헌과 함께 정문숙 교수님을 만나러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집에서 잠이나 더 자면서 체력을 비축하고 싶었다. 며칠 동안 불편함과 절망감 속에서 지냈는데, 그 많은 인파 속에서 놀이기구를 탄다고 생각하니 앞이 컴컴했다.


 “놀이공원? 오늘 같은 토요일에 가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놀이공원은 다음에 엄마도 있을 때 같이 가고, 오늘은 집에서 같이 만화 볼까?”


 주원이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돌아 나가는 듯하더니 다시 돌아와 나를 보며 말했다.


 “아빠, 근데 우리 아빠 아니지?”

 “뭐라고?”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은이를 키우며 느낀 것이지만 아이를 속이는 건 어른을 속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어른은 잘 짜인 거짓말이라면 이성을 앞세워 속일 수 있지만, 이성보단 감성으로 해석하는 아이에게 내 감정을 숨기는 건 힘든 일이었다.


 “우리 아빠는 오늘 같은 날 나랑 하루 종일 같이 놀 거라고 좋아했을 거란 말야! 아빠 미워!”


 다행히 단순한 섭섭함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남자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기도 하고, 주원이가 원하는 것처럼 활동적으로 하루를 보낼 체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최대한 조용한 곳에서 쉬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주원이와 함께 키즈카페에 갔다. 아들이 딸보다 좋다고 처음으로 느낀 건, 이런 곳에 오니 알아서 혼자 잘 뛰어논다는 것이다. 다은이는 외동딸이고 소극적인 성격이었기에, 키즈카페와 같은 곳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항상 부모 중 한 명이 옆에 있어 주어야만 했다.


 조용한 곳은 아니지만, 나는 주원이 혼자 놀게 내버려 두고 커피를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잠시나마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포털사이트에 다중우주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정말 유상헌의 말처럼 다중우주를 이동하는 게 가능한 것일까.  

    

 「……양자 얽힘 현상을 이용한다면 다중우주 간 이동하는 게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과 같이 무수히 많은 원자로 이루어진 개체를 동시에 완벽하게 이동시키는 것은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며 가까운 미래에는 어려울 것으로……」   

  

 특별히 이렇다 할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주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다중우주를 키워드로 논문을 검색해 보았다. 곧바로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국내 논문 중에서는 유상헌이 말한 정문숙 교수님의 논문이 가장 많았다. 그중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다세계 해석을 기반으로 한 다중우주 간 접촉 가능성에 대한 연구 - 정문숙」


 다중우주의 이동을 말한 건 아니었지만 ‘접촉’이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논문을 클릭했다. 수식이 너무 많아 나와 같은 문돌이는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물리학 논문치고는 유상헌이 맨날 나에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에 비하면 비교적 친절하게 쓰여 있었다.     


 「필자가 참여했던 2013년 오스트리아의 양자 물리학 학회에서 33명의 학자를 대상으로 지지하는 양자 해석에 대해 투표를 실시하였다.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가 42퍼센트로 가장 많았으며, 다세계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는 필자를 포함해 18퍼센트였다. 즉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는 다세계 해석은 양자역학에서 다수설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무맹랑한 가설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원이를 힐끔 보았다. 트램펄린에서 잘 뛰어놀고 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논문을 읽어 나갔다.      


  「……다중우주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해 보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다른 다중우주와 접촉을 시도해보고, 접촉이 가능하다면 다세계 해석이 증명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만 충족된다면 실제로 접촉을 시도해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첫 번째는……」    

 

 “이얏! 나는 정의의 기사다!”


 그때 주원이가 망토를 메고 장난감 칼을 들고 달려왔다. 나는 잠시 노트북을 덮고 주원이와 놀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빠 몸속에 든 괴물아! 우리 아빠한테서 얼른 나가라!”


 주원이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순간 또 사늘한 기분이 들었다.


 “주원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 몸에 왜 괴물이 들었어?”

 “아빠 지금 우리 아빠 아니잖아! 괴물이 아빠 조종하고 있는 거 다 알아! 물러가랏!”


 집에서 주원이가 비슷한 말을 했을 때는 단순히 섭섭하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역시 주원이는 내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것 같다.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다른 친구가 부르자 주원이는 또 칼을 휘두르며 가 버렸다.


 난감한 기분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주원이가 섭섭해하지 않도록 충실하게 아빠 노릇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며칠 안에 미연이와 다은이에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 저 아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상헌에게서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교수님 답이 왔어!”

 “정말? 우리 얘기는 말씀드렸고? 뭐라셔?”

 “조금 이상한 말씀을 하시긴 해.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일어날 일?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상헌에게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봐.”

 “모르겠어. 나도 무슨 말씀이시냐고 여쭤보니까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셨어. 집으로 찾아와도 된다고 하셔. 남양주에 살고 계신다는데, 너 지금 어디야?”     




 조금 뒤 상헌이 차를 끌고 나를 태우러 왔다. 나는 주원이를 다시 민주에게 맡기고 상헌의 차 조수석에 앉았다. 상헌과 함께 교수님 댁으로 가는 길에 처음에는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의 정적을 깨고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상헌은 정면을 응시한 채 되물었다.


 “뭐가?”

 “내가 민주랑 연애하던 때, 너도 민주랑 친하게 지내긴 했었잖아. 우리 셋이 같이 본 날도 많으니까. 그런데, 너랑 내 기억이 어디서부터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민주랑 결혼했다는 건…… 좀 놀랐어.”


 상헌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신호가 걸려 차가 멈추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너한테는 미안한 말일 수도 있는데, 그때부터 좋아했던 것 같아.”

 “그때? 언제부터?”

 “너랑 연애하고 있었지만, 나랑도 친하게 지냈던 때부터,”


 사실상 처음부터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상헌은 물리학밖에 모르는 천재이자 바보였고,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상헌의 인생에서는 민주가 처음으로 가깝게 지낸 또래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 호감이나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그게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 어쨌거나 너의 여자친구였으니까. 내가 민주랑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어. 심지어 네가 민주랑 헤어지고 나서 미연씨를 만났을 때도. 만약 내가 민주에게 연락해서 관계가 진전된다면 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에 가만히 있었지.”


 차가 다시 출발했고, 상헌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미연씨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둘이 결혼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는 고민이 됐어. 민주에게 연락을 해 볼까. 너도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마당에 내가 네 전 여자친구와 만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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