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말도 안 돼요!”
사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던 신성우라는 사람의 인생을 지금의 내가 이어받아 살고 있다면, 크리스마스에 내가 뭘 했건 이상하진 않다.
의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말했다. 내가 원래의 기억을 대상만 바꾸어 기억하고 있거나, 혹은 완전히 상상이거나. 전자는 아니라는 게 좀 더 확실해졌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이제 남은 가능성은 방금 떠올린 청계천에서의 기억은 완전히 상상이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이 생생한 기억이 상상일 수가 없다. 순간적인 두려움에 나는 상담을 그만하겠다고 말하고 도망치듯 병원을 나왔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인지 종로의 거리는 북적였다. 근처 회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잠시라도 일에서 해방되었다는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음식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어제부터 마음 한쪽에 어떤 낯선 감정이 자꾸만 느껴지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거리를 보고 있자니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가족인 미연이와 다은이는 어제부터 내 곁에 없었고, 민주에게도 상헌에게도 내가 겪고 있는 황당한 일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줄 수 없었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나는 인근 카페에 들어갔다. 특별히 누군가 만날만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연구실에 혼자 들어가 있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 앉아 그저 사람 구경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커피를 한 잔 시켜 홀짝이며 고독한 여유를 즐겼다.
의사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결혼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와 민주의 말을 종합해보면, 나는 7년 전 그날 민주의 문자를 받고 그녀에게 연락했다. 과정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미연이와 헤어지고 민주와 결혼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선택을 후회하며 정신과에 다니고 있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나는 노트북을 켰다. 내가 겪고 있는 일을 마저 글로 써 내려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쓰다 보니 어제의 이야기까지는 모두 완성되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유상헌 교수」
이렇게 딱딱한 이름으로 저장된 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렇게 나를 까칠하게 대하던 그가 전화를 했다는 게 이상했다.
“여보세요? 어 상헌……”
“야, 야! 성우야!”
유상헌의 목소리는 너무도 흥분되고 다급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나를 부르는 말투가 어제와는 다른 것 같았다. 다급함 속에서도 원래 친한 친구였을 때처럼 친근함이 느껴졌다.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제 우리 같이 술 먹고, 각자 잘 들어갔잖아, 그치? 맞지? 왜 일어나 보니 내가 이상한 원룸에 누워 있고, 우리 집 가 보니까 우리 집이 아니래! 그리고 나 분명 결혼했잖아. 4년 전에. 왜 아내는 연락도 안 되고 다들 나를 싱글이라고 하는 거야? 술이 덜 깼나? 야, 신성우! 말 좀 해 봐!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나 분명 결혼한 거 맞잖아? 우리 집은 왜 이런 거야!”
나는 멍한 얼굴로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놀라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상헌과 나는 어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낮에 연구실에서 잠깐 본 게 전부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상헌은 결혼을 한 적이 없다. 이틀 전까지의 내 기억 속에서도.
나는 유상헌에게 학교로 와서 그의 연구실에서 보자고 했다. 둘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분명 놀라 까무러칠 일도 있을 것 같았고, 카페 같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미친놈처럼 쳐다볼 테니까. 나는 카페를 나와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유상헌의 다급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어제 아침에 내가 느꼈던 그 대혼란의 감정과 비슷해 보였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헌에게 나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 같다. 어제부터 혼란과 좌절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에 유상헌이 지금 얼마나 괴로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지만) 한 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 나는 외로웠다. 어제부터는 유상헌도 내 친구가 아니었다. 이제야 상헌이 다시 친구로 느껴졌고, 이 이상한 일을 같이 겪은 동료가 생겼고, 모든 걸 털어놓고 이해해줄 사람이 생겼다.
유상헌의 연구실 앞에 도착해 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상헌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외모는 어제와 똑같더라도 그는 나와 방금 통화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텐데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문을 열자 유상헌은 응접용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어제 본 것과 같은 머리 스타일이었지만 제대로 감지도 않은 듯 부스스했고, 말투는 원래 말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야, 신성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유상헌이 나에게 달려오더니 내 양쪽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이거 꿈은 아니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미친 건가?”
“진정하고 잠깐 앉아 봐.”
유상헌은 소파에 앉더니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지금 내 상황도 그보다 나을 건 전혀 없지만, 그래도 하루 일찍 겪었으니 좀 더 나은 건가.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지도 않고 담담하게 있는 내 표정을 보니 뭔가 눈치챈 것 같았다.
“성우야, 너…… 뭐 좀 아는 거지? 그치?”
“아니, 나도 아는 건 없어. 근데…… 나도 너랑 똑같아.”
“뭐라고? 똑같다니 무슨 소리야, 그게?”
누구에게라도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지금의 유상헌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어줄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하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쉽게 열리지는 않았다.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어. 그런데,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거랑 비슷한 일을 나는 어제부터 겪고 있는 것 같아. 나도 어제 아침에 일어났더니…… 다 바뀌어 있었어.”
유상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어쩌면 지금의 유상헌은 다은이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상헌아. 혹시 네 기억 속에 다은이가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기억 속에 있냐니? 다은이? 네 딸?”
“어! 맞아! 그럼 너는 다은이를 아는 거지?”
“당연한 소릴 왜 하는 거야? 내가 너네 집에 몇 번을 갔는데? 다은이랑도 수도 없이 놀아줬고”
너무도 다행이었다. 다은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생긴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미친 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고 있었다. 다은이는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다. 누가 뭐래도 내 딸이다.
“그럼, 나는 미연이랑 결혼했고 다은이를 낳았잖아. 너랑 나는 오래전부터 친구였고. 그치?”
“맞아.”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야. 전부 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도 왜 그런 건지는 전혀 모르겠는데, 어제 일어나 보니 전부 다 달라져 있었어. 내 옆에는 미연이도 다은이도 없었어. 너, 민주도 알지? 내가 미연이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유상헌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어? 어…….”
“민주였어. 지금 내 아내가. 그리고 민주랑 나 사이에는 주원이라는 아들이 있고. 지금의 나도 미연이를 만났던 건 맞는 것 같은데… 다시 미연이랑 헤어지고 민주와 결혼한 것 같아. 그리고 어제 너를 찾아가 보니, 너한테 나는 친구가 아닌 것 같았어.”
내가 횡설수설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 내 말을 듣던 상헌의 표정이 언제부턴가 크게 일그러졌다. 이 똑똑한 유상헌에게 보기 힘든 표정이었는데, 초점 없는 눈동자에 미간은 잔뜩 찌푸린 채로 넋이 나간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입술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내가 겪은 이 상황을 그도 똑같이 겪고 있는 것일 테니.
“상헌아, 너는 어떻게 된 거야? 너도 결혼했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내가 아는 사람이었어? 근데 내 기억 속에도 너는 결혼한 적이 없거든. 나도 놀랐어. 결혼은커녕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서 내가 맨날 놀렸으니까.”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분명 얼굴은 나를 향해 있지만 유상헌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만 쳐다본 채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너 왜 그래?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너…… 너……. 아까, 뭐라고 했지?”
말을 하는 유상헌은 입술뿐만 아니라 양 볼까지 떨리는 게 보였다.
“뭐를? 너 괜찮아?”
“그럼…… 신성우. 지금 너는, 민주랑 결혼한 사이라는 거지?”
“맞아. 어제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어. 그리고 어제의 네가 말하기를, 미연이는 내 전 여친이라고 했고.”
“민주야.”
“뭐?”
유상헌이 나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처음에는 이 일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혼자가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똑똑한 유상헌과 함께라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상헌이 한 말은, 이 혼란을 더 크고 더 깊게 휘젓고 있었다. 결코 이 일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더 거대한 혼돈의 소용돌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민주라고. 나랑 결혼한 사람. 어제까지 내 아내. 오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