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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Oct 02. 2024

(9화) 9월 14일 (4)


 “교수님, 오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이 그렇긴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도 그다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내가 강의 시간에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학생이 교수의 연구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와서는 인사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밝히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내 안부를 묻는다고?


 “아, 나윤 학생이죠? 무슨 일이에요?”

 “어? 교수님 진짜 이상하다. 갑자기 웬 존댓말?”


 나윤은 마치 자기 방에 온 것처럼 편하게 내 연구실을 거닐면서 말했다. 웬 존댓말이냐니? 나는 내 학생이나 심지어 조교에게도 단 한 번도 반말한 적이 없다. 내가 교수라고 해도 성인인 학생을 존중한다면 초면부터 반말하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다. 물론 가까운 사이가 된다면 말을 놓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정도로 편한 사이인 학생이 없었다.


 “전화는 왜 이렇게 안 받아요? 그래서 와 봤어요.”


 나는 내 핸드폰 화면을 켜 보았다. 학생이 교수에게 왜 전화를 안 받냐고 따지는 것도 이상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 연락도 온 게 없다.


 나윤은 나에게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다가오는 건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오자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 책상 옆에 멈추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내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려고 시도했다. 잠금장치가 걸려 있어 열리지 않는 서랍이었다.


 “뭐야, 꺼내 놓지도 않았어요?”


 나윤은 자기 집을 뒤지듯 자연스럽게 진열장으로 걸어갔다. 내가 조금 전에 처음 본 이상한 장식에서 주사위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원형 받침대 위에 놓인 열쇠를 꺼냈다. 그 장식품 안에 서랍 열쇠를 숨겨두는 것 같았다. 나윤은 내 연구실에 대해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시 내 책상으로 걸어오더니 내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나에게 열쇠를 자연스럽게 열쇠를 건넸다.


 “자요.”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교수와 학생 사이에 선을 지키고 있다면, 그녀가 내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관능적인 자세를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노크 없이 들어올 때부터 평범한 사이는 아닌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녀의 태도를 볼수록 내 예상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열쇠를 받아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다른 것은 없고 큰 서랍 속에 핸드폰만 하나 달랑 놓여 있었다. 핸드폰의 화면을 켜니 잠금 화면에 그녀의 부재중 전화 8통이 와 있었다.


 잠금을 풀려 하자 또 패턴 잠금이 나타났다. 나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기에 패턴을 풀려고 시도하지 않고 곧바로 지문인식으로 잠금을 풀었다. 배경 화면에 바닷가를 배경으로 나윤과 내가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나는 한 손으로 나윤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사진첩 어플을 켜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사진첩에는 나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수도 없이 보였다. 근사한 식당, 벚꽃을 보는 명소, 바닷가, 그리고 호텔 침대에서 둘이 함께 찍은 사진까지. 


 나윤과 나는 불륜 관계였다.          


 “우리가 이런 관계를 가진 게 언제부터였지?”

 “새삼스럽게 그건 왜 물어요? 1학년 1학기 성적 나올 때쯤이니까 1년은 넘었죠.”


 1년이나 넘도록 이런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나는 그녀와의 이 관계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물어보기에는, 나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기만 할 뿐 원하는 대답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윤이 단서를 하나 던졌다. 나는 ‘1학년 1학기 성적이 나올 때’라는 말에서부터 어떻게 그녀의 대답을 유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때 성적 나오고 나서 어땠는데? 1학년 1학기 때 말이야.”


 나윤이 책상에서 일어나 옆에 놓여 있던 간이 의자를 끌어다 내 옆에 놓고 앉았다. 그녀의 무릎과 내 무릎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였다.


 “교수님이 나 F 줘놓고. 어땠냐니요? 나가 죽고 싶었지. 당장 장학금은 잘리게 생겼어, 그리고 동기들 다 내가 과탑할 거라고 띄워주고 있었는데 걔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너무 창피한 거예요.”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1학년 1학기 학생들이 듣는 수업이라면 철학 입문 수업. 그 수업에서 내가 F를 준 학생이 몇 명 있었다. 기말고사를 과제로 대체했었는데, 내용이 블로그에 떠도는 글과 너무도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 나윤 학생이 포함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 내 주변을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과 다른 것도 있고 같은 것도 있었다. 만약 나윤이 F를 받은 학생 중 한 명이었다면? 나는 나윤이 무엇을 원했던 상황이었을지 생각하면서 그녀가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유도했다.


 “나는 교수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잖아.”

 “누가 뭐래요? 나도 당연히 잘한 건 없죠. 근데 그 얘기를 갑자기 왜 꺼내요? 교수님도 잘한 건 없잖아요. 그날 F만 면하게 해달라고 찾아와서 울던 학생을,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끌고 갔으니까. 결국 서로 이렇게 윈윈이지만요.”


 나윤의 태도를 보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내가 정말로 그랬다는 게 놀라웠다. 무엇보다 너무 창피했다. 내가 나윤의 성적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권력으로 삼아 그녀와 불륜을 저질렀고, 그 이후 지금까지 이렇게 부적절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저녁 사 줄 거예요? 나 가고 싶은 곳 있었는데.”

 “응? 우리가 오늘 약속했었나?”

 “아뇨, 연인…… 연인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거나 약속해야만 밥을 먹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나윤이 고개를 내밀더니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내 눈을 응시했다. 이 학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던가. 가까이에서 보니 반짝이는 눈매가 더 미연이를 닮은 듯 보였다. 하지만 말도 안 된다. 불륜은 내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당연히 아내에게도 예의가 아니지만,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다면 결국 이 학생의 인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게 뻔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다음에.”


 나는 나윤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요, 오늘은 교수님 좀 피곤해 보이긴 하더라. 진짜 어디 몸 안 좋거나 그런 건 아니죠?”


 부적절한 관계이기는 했지만, 오늘 유일하게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인 것 같아 조금은 고맙게 느껴졌다. 나윤이 조금은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은요?”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더 이상 나윤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이 아이는 무슨 생각으로 띠동갑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유부남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


 “미안한데, 다음에 얘기할까? 지금은 일도 바쁘고 말이야.”

 “알았어요, 나갈게, 나가”


 나윤이 반말을 능글맞게 섞어 쓰면서 문 앞으로 걸어갔다. 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뒤돌더니 말을 덧붙였다. 


 “아, 맞다. 교수님, 나 지원서 냈어요.”


 원서? 나에게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교수님만 믿으면 되죠? 갈게요, 안녕~”


 나윤이 능청스럽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나갔다. 내가 나윤이 미연이와 닮았다고 생각한 것은 얼굴뿐인 것 같다. 나는 미연이의 청순하고 선한 매력에 끌렸던 것인데, 적어도 나윤은 그런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사진첩에 불륜 사진이 가득할 정도로 나윤과 나는 가까운 사이였으니 이 관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학교 전산에 접속해 작년 1학기 철학 입문 수업의 학점을 조회해 보았다.     


  이름 : 성나윤

  최초 부여 학점 : F

  이의제기일 : 7월 2일, 이의제기 승낙 여부 : Y

  최종 학점 : A+     


 나윤이 말한 대로였다. 나윤은 최초 F학점을 받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최종적으로 최고 학점을 받았다. 그 대가가 불륜이라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는 걸 혐오하는 내 성격을 생각해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이어 작년 2학기와 올해 1학기에 내 강의를 수강한 학생 명단을 살펴보았다. 내 강의 중에는 필수 강의가 아닌 것도 더러 있는데, 나윤은 매 학기 내 강의를 찾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A+ 학점으로 모두 같았다.


 그때 내 핸드폰에 문자 알림이 왔다.     


 「오빠, 몸 좀 괜찮아졌어? 오늘 어린이집 가서 주원이 하원시키는 거 알지?」     


 민주에게 온 메시지였다. 그리고 어린이집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며 다은이가 떠올랐다. 


 지금 미연이와 유상헌 모두 나와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들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모두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은이는? 물론 미연이와 결혼하지 않은 이상 태어날 수는 없었겠지만, 어쩌면 무언가 달라진 상태로라도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곧바로 차에 타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골목에 차를 세워두고 어린이집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데리러 올 때마다 “어, 아빠 왔다!” 하며 해맑은 얼굴로 달려오던 다은이가 생각났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또 당연히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린이집 현관에 발을 들였을 때, 한쪽 구석에서 스케치북을 펴고 그림을 그리는 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뒷모습이 다은이와 똑같았다.


 제발, 제발.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든, 어머니가 누구든 다은이이기만 해 달라고 기도하며 그 아이에게 한 걸음씩 걸어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게 관자놀이에까지 전해졌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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