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컬러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몰라

by 비온뒤

공주님의 옷을 칠하는 색칠공부 책. 여자아이라면 한 번쯤 해 본 적이 있는 것 아닐까. 16절지 공책에 어딘지 어색한 포즈를 하고 있는 공주님과 풍경이 그려진 그림과 테두리만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내가 가진 12색 색연필로는 도저히 그림에 나온 색을 만들 수가 없어서 늘 노랗고 빨간 치마에 파란 상의를 테두리 안에 그리기 위해 조심조심 색을 넣어갔던 기억. 엄마에게 24색이나 36색 색연필을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 집은 허풍으로라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집이었다. 미술학원에서 아무리 배워도 내 그림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초등학교 때 잠깐 배우고는 공부로 눈을 돌렸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릴 수 있고, 눈으로 본 것을 손으로 인출해 내는 능력을 신은 쏙 빼놓고 나를 태어나게 한 것 같았다.


그나마 색을 쓰는 것은 쉬웠다. 정해진 틀 안에 색을 넣는 것은 세 살 정도의 아이라면 금방 할 수 있었으니까. 명암이나 주름을 표현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손을 댄 예쁜 그림에 나는 빠져있었다. 미술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수행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나대로 '내 스타일'을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은 누구나 비슷하다.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것을 풀 공간과 시간은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전 세계적으로.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날에 유행했던 것이 바로 '컬러링'이었다. 쉽게 이야기하면 색칠공부. 언뜻 보면 정사각형으로 보이는 책 속엔 이파리와 꽃이 잔뜩 그려진 그림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온통 흰 종이와 검은 선으로 뒤덮여 있는 책. 어른들을 위한 색칠공부라는 캐치프라이즈가 딱 맞았다.


책을 집어 들자마자 계산대로 향했다. 결제를 하고 나니 우리 집에 색연필이 없다는 것이 생각난다. 통 크게 50색 색연필도 질러버렸다. 마트에서 파는 저가 색연필이라 만원도 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어른의 충동 구매지!


하나에 깊이 빠지지 못하는 내 성격상 이 책과 색연필이 오래지 않아 창고행이 될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종이 귀퉁이부터 채워가는 그 재미는 꽤 오래 내 시간 속에 머물렀다. 작은 나뭇잎들을 조금씩 칠해나간다. 그러데이션을 마음껏 줄 수 있고, 명암도 표현할 수 있었다. 결국 저가 색연필에서 욕심을 부려 수채색연필도 샀다. 색연필을 쥐는 법, 수채 색연필을 활용하는 법도 이것저것 배워나갔다.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인간의 욕심이었다. 조금 더 예쁘게, 선명하게 색을 칠하고 싶은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인터넷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같은 페이지를 칠한 것을 보게 되는데 왜 다들 나보다 잘하는 것 같을까. 저 사람은 어떤 물감을 쓰는 걸까! 장비병이 도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딱 그런 경우였다. 다행히 색연필은 그리 비싸지 않은 축에 속했다.


작고 꼬물대는 작업을 좋아하는 나는 컬러링이 늘 재미있다. 불평불만을 해도 두 시간, 세 시간을 이 작업만 하면서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시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색 배합이나 완성도, 그림의 크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심심찮게 본다. 내게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했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요즘도 마음이 번잡할 때에는 색연필을 잡는다. 처음보다 색을 과감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보색만을 이용해서 꾸며보기도 한다. 실패라고 생각되는 배합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작은 실패를 해도 누가 뭐라 할 것 없는 나만의 색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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