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30년 전의 눈놀이

코로나가 눈 놀이를 데려왔다.

by 비온뒤

겨울이 되면 다들 스키장으로 달려갔던 재작년 겨울만 해도, 도시에 내리는 눈은 그저 예쁜 쓰레기일 뿐이었다. 제설차가 지나가고 염화칼슘으로 녹은 눈은 구질구질한 구정물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2019년 겨울 시즌은 따스해서 눈이 거의 오지 않다시피 했다.


내 고향은 부산이다. 그렇다. 1년에 눈 한번 제대로 보기 힘든 곳이다. 바다가 얼면 그것을 구경하러 시민들이 몰려가는 곳. 눈이 쌓이면 그대로 교통이 마비되지만 그것마저도 10년에 두어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 신경질을 내면서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을 떠난 지 몇 년이 되었다. 이제 부산은 내 삶의 터전이라기보단 여행지나 관광지 같은 기분이 더 했다. 부모님이 살고 계시고, 친구들도 거기 있지만 부산에 있었던 시간보다 그곳을 떠나왔던 시간이 더 길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 따스한 도시에서 자란 내 기질은 하얗게 내리는 눈만 보면 가슴이 설레게 한다. 지붕과 도로를 하얗게 물들이고 누구도 그 자리에 발을 담지 않아서 뛰어갈 수 있는 그때가 정말 좋다. 아주 가끔 시골 할머니 댁에서 만난 발목까지 덮은 눈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손이 꽁꽁 얼고 바지가 온통 축축해지도록 눈사람을 만들고 눈썰매를 탔다. 가벼운 동상에 걸려서 간지러움에 발을 벅벅 긁었던 것도 잔뜩이었다.


올해는 눈이 잦다. 체감상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눈과 함께하는 것 같다. 12월에 꽤 이른 눈이 내리기에 올해는 심상찮다 싶더니, 코로나 바이러스를 덮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이 시시때때로 포슬포슬 내린다. 유난히 추운 것도 아닌데 그렇다. 기상청에서 일하면 안 그래도 귀찮은 눈이 더 귀찮아진다. 가시거리가 짧아지고 기온이 춤추는 데다 문의 전화는 또 어찌나 많이 오는지. 도로가 미끄러우니 사고도 많이 나서 특보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고민이다. 서해안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려 금방 쌓이기 일쑤고, 동해안은 한번 눈이 오면 그야말로 사방 천지가 눈 바다가 된다. 해가 바뀌자마자 눈 예보를 잔뜩 내고 이리저리 눈에 관한 상담 전화도 잔뜩 했는데 눈이 쌓이는 것을 보자마자 또 주책맞게 설렌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꼭 출신이 부산이 아니더라도 올해는 바깥에 나가 놀거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놀고 싶은 마음은 다 마찬가지. 음식점도 문을 닫고 카페도 출입 제한이 있는 세상이기에 집 안에서만 놀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눈이 반갑다. 30년 전에나 하던 동네 눈놀이들이 이리저리 SNS를 타고 퍼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나도 거기에 동참하고 싶어 진다. 시작은 작년 겨울 즈음이었던가. 인터넷에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오리모양의 눈 뭉치를 쪼롬히 올려놓은 사진이 돌아다녔다.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지만, 그때는 유독 눈이 오지 않아서 그 해를 그렇게 넘겼더랬다. 그리고, 올해. 멀리 가지 못하니 아이들은 너도나도 눈썰매와 박스를 가지고 나와 비탈길에서 썰매를 타기 시작했다. 평소에 비해 이동하는 차량이 적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아파트 단지에는 'XX아파트 눈썰매장 회의'라는 것이 열릴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의 금손분들이 만든 눈사람들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보았던 눈 오리는 전국적으로(물론 눈이 오지 않는 부울경 지역은 제외였지만) 유행해서 이곳저곳 오리 천국이 탄생했다.


IMG_20210117_210511.jpg 나란히 나란히 오리들



거기에 편승하기 위해 며칠 전 눈 오리 장난감을 주문했다. 주문하고 나서 눈이 오지 않으면 슬플 것 같았지만 기상청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면은 세울 수 있을 정도의 눈이다. 주머니에는 미니 핫팩, 바지는 기모바지, 외투는 언제나 그렇듯 롱 패딩. 머리를 질끈 묶고 마스크는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민망하니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대형 KF94 마스크를 썼다. 후드티셔츠로 신원이 드러나는 것을 원천 봉쇄한다. 노란 오리 집게가 게임의 최종병기 같이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 혼자만의 눈 오리 공장이 열렸다. 날은 많이 춥지 않았고 주말 저녁이라 인적도 드물다. 가끔 지나다니는 아이들에게 오리 한 마리씩을 손에 들려주고 바닥에 깔린 눈을 모아서 집게로 탁, 스륵스륵 깎아가며 눈 오리 천국을 만들었다. 힘도 별로 들지 않고 귀여움은 백배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품절되는 이유가 있었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210117220301_3_filter.jpeg 누군가가 보고 잠시 웃을 수 있다면 2시간의 노동도 아깝지 않다.


이렇게 즐기기만 하면 좋을 텐데 코로나로 인해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가 열과 성을 다해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어떤 누군가는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다녔다. 그 대상에는 어른도 있고, 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눈이야 봄이 오면 녹아버리는 덧없는 기상현상이니 어쩔 수 없다 치지만 그리고 주인이 없는 눈이니 부순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사람들의 각박한 마음이 아쉬웠다. 다른 이가 만들어 놓은 작은 정성을, 심지어 눈사람은 길가의 눈을 치우는 효과도 있는데 그저 본인이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부수어 버리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조금 슬프기도 화나기도 했다.


또 눈이 온다. 눈이 계속 잦으려나 보다. 그래도 끊임없이 사람들은 눈사람을 만들고, 오리 왕국을 만들 것이라 한다. 30년 전의 소소한 놀이들이 발이 묶인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시퍼렇게 멍든 세상이 조금 나아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