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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버(Giver)를 위한 자기항해 생존법

좋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흔들린다 그래서 필요한 흔들리지 않는 항해법

by 좋은이야기연구소



1. 당신은 기버인가요?


기버(Giver)는 먼저 주는 사람입니다. 조직의 빛이고, 주변에 있다면 너무 고마운 사람들이죠. 그리고 대부분 일을 잘하려는 사람은 기버에 가까운 양상을 많이 보였습니다. 팀에서 빈틈을 메우고, 관계에서 배려를 먼저 하고, 결과보단 의미를 찾는 사람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버일수록 자기 인생의 방향을 정할 때는 더 많은 혼란을 겪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이타심도 결국 이기심에 기반한다고 하죠. 기버들은 남을 사랑하는 것도 많지만 그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남을 돕다가 결국 나는 무엇인가라고 생각하게 되면 혼란이 시작되는 거죠.


<Give and Take>의 저자 애덤 그랜트는 처음 교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 모든 학생과 동료의 요청에 YES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논문 피드백, 강의자료 요청, 취업 컨설팅까지. 하지만 그는 곧 지쳤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이 너무 많이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줄 때 의미 있고, 지속가능한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기버가 지치는 이유는 착해서가 아니라, 기준 없이 모든 걸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애덤 그랜트는 말합니다.


"도움을 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자원이 어디에서 가장 잘 쓰일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Giving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속가능한 기버가 되기 위해서 애덤 그랜트는 기버의 소진을 막기 위해 무조건적인 ‘예스’를 줄이고 ‘도움이 가장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2. 지속가능한 나다움의 좌표를 찍자


여기서 기버에게 필요한 건 더 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주는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디에서'를 설정할 때 도움이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Must (해야만 하는 것): 내가 책임지고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인가?

Can (할 수 있는 것): 내가 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Want (하고 싶은 것): 나 스스로 하고 싶어서, 의미를 느끼는 일은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을 겹쳐보면 지속가능한 나다움의 좌표가 드러납니다.
그 지점에서 주는 기버는 지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함께 나아갈 사람들과 더 단단하게 연결됩니다.

저는 기버가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오래 지속되려면 자기 내면의 닻을 스스로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한때는 '그저 기버'여서 지치는 때가 있었습니다. 내 프로젝트도 잘하고 싶고, 저 사람의 자료조사도 도와주고 싶고, 전사 업무에도 참여하고 싶고, 회의도 잘 준비하고 싶고 그랬습니다. 어떨 때는 업무가 들어오면 '원래 하고 싶은 일 60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 40을 한다고 했어' 하며 그냥 수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건 사실 지속가능한 나다움의 좌표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같고, 해야 할 일 같고, 하고 싶은 것도 같고 그래서 명확하지 않으니 요구할 수도 없고 휘둘리기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지?
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점점 멀어지는 걸까?


그때 저는 이 문장을 정리했습니다. 그 때 저 팀의 막내였고 다른 사람의 업무를 챙기며 고마운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Must는 ‘내가 맡은 일’이었고,
Can은 ‘빠르게 캐치하고 정리해서 넘겨주는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저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정체성만으로는 번아웃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저에게 물어봤습니다.


“나는 진짜 어떤 일을 하고 싶지?”

저의 진짜 Want는 “교육 기획자로서 사람을 성장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지원해서라도 단순 보조가 아닌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마케팅 회사였지만 최대한 교육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맡으려고 했습니다. 기획서 하나를 쓸 때도 “이건 누구에게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함께 하면서 또 이 프로젝트를 잘 끝내기 위해 내가 정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도움받는 기회가 아닌 연결의 기회를 만들어가는 기버로 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조금 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예시로 프리랜서 B는 다양한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응하며 잘하고, 빠르고, 친절하다는 평을 듣지만 스스스로 프로젝트를 리딩하는 느낌은 들지 않고 클라이언트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것 같다는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가 Must와 Can에 매몰되어 Want를 오랫동안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 그래서 달력에 ‘내 프로젝트 시간’이라고 블록을 정해두고 그 시간을 누구의 요청에도 양보하지 않는 건 어떨지, 또 그걸 기록해서 전문성으로 보여주면 어떨지를 제안했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작업물은 대외비일 경우에는 공개하기도 어려우니까요. 그 후 SNS 콘텐츠의 간단한 디자인만 하던 그는 하고 싶던 패키지 디자인의 기획까지 더 많은 도전을 해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B의 Must - Can - Want 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Must: 클라이언트의 성장을 위한 책임

Can: 디자이너로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능력

Want: 기업의 제품에 더 많은 임팩트를 가진 디자인 과업 맡기


그는 이후 자신의 시간표를 ‘의미 있는 기여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재편했고 패키지 디자인 전문이라는 말을 내세우니 원하는 쪽으로의 프로젝트가 더 많이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애정을 가지는 만큼 클라이언트의 만족도 더 높아졌고 자신의 삶은 더 단단한 에너지와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Must–Can–Want는 경계이자 구조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단지 ‘하고 싶은 일 찾기’의 도구가 아닙니다.
기버가 자기만의 닻을 내리고 다시 항해할 수 있게 해주는 구조입니다.


Must: 너무 많을 수도 있습니다.
→ 꼭 내가 아니어도 되는 일은 조금 덜어내세요.


Can: 너무 익숙해서 '내 장점'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다른 사람이 자주 고맙다고 하는 걸 적어보세요.


Want: 너무 오래 무시하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 “나 요즘 이거 재밌더라”는 생각에 주목해보세요. 그게 단서입니다.


오늘 저녁 10분만 투자해서 종이 한 장에 이렇게 적어보세요.


Must(해야만 하는 것) : 예: 내일 오전까지 팀 회의자료 정리
Can(잘할 수 있는 것) : 예: 글을 통해 현황을 정리하는 능력
Want(하고 싶은 것) : 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다 적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적으려고 애쓰는 그 시간 자체가 “나는 어디쯤 와있지?”를 묻는 닻 내림이 될 수 있습니다.






Anchor Circle : 나와 남에 대한 존중




닻을 기준으로 형성되는 원형의 범위를 Anchor Circle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배들은 닻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정박합니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서로를 지켜주고 충돌 없이 함께 머무를 수 있죠. 이 개념은 일에서도 유효합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 각자의 전문성과 철학을 지키며 함께 일하려면 적절한 거리와 존중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은 이를 “Bounded Autonomy(경계 지어진 자율성)”이라 부릅니다. 심리적 안전감을 유지하면서도 자율성과 협업이 공존하려면, 경계를 명확히 하고 그 안에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버들은 누군가에게 선을 긋는 걸 무서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이나 작사가님이 말했듯 선을 그어야 남이 내가 어떤 모양으로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있고, 그걸 존중해줄 수 있어야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머무를 수 있는 건강한 기반과 교환 가능한 연결”이 필요합니다. 직장은 하고 싶은 일(Want)과 해야만 하는 일(Must)이 함께 존재하는 곳입니다. 어떤 날은 기쁨을, 어떤 날은 혼란을 줍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로 뒤죽박죽 엉망이 된 기분이 들 때도 분명 많습니다. 그래서 더 닻이 필요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나만의 닻이 필요합니다.


닻이 있을 때 우리는

- 나의 방향을 잃지 않고

- 함께할 사람들과 적절한 거리에서 교류하고

- 어디든 떠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나요?
그리고 그 닻은 진정 당신의 것인가요?


이 글에서 말한 세 가지 질문을 잘 붙잡고 지낼 때 저는 내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싶은지, 어떤 사람 혹은 팀과 어떤 프로젝트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은지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사실 답하지 못했을 뿐 늘 내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같은 기버들이 더 오래, 자신을 지키며 빛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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