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좋은 이야기는 있지, 근데 너가 이걸 말할 자격이 돼?

좋은 이야기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by 좋은이야기연구소




“좋은 말인데, 그걸 왜 네가 해?”

콘텐츠 플랫폼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뉘앙스의 말을 종종 본다. 누군가는 치열한 감정의 회복 이야기를 꺼내고, 누군가는 사회 구조를 비판한다.

그 밑에 자주 따라붙는 건 “너는 피해자도 아니잖아” “그 일 해본 적 없잖아” “그 분야 전문가 아니잖아” 같은 코멘트다.



자격


참 불편한 단어다.

동시에,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너무 자주 꺼내 드는 단어다.






말할 수 있는 자격, 정말 필요한가?


우리는 모두 ‘말할 자유’를 가진다. 하지만 모두가 ‘환영받을 자유’를 가지진 않는다.

그 간극에서 생기는 게 바로 자격 논란이다.

발화자의 정체성과 경험은 이야기의 신뢰를 높여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정한 메시지를 가리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정신질환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하자. 글의 내용은 전문적이고 따뜻하며 누군가에겐 삶을 지탱해주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댓글은 묻는다.


“당신은 정신과 의사인가요?”

“직접 겪은 일인가요?”

“그럴 자격은 있나요?”


그 말은 어쩌면, ‘함부로 말하지 마’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 말 따윈 안 믿어’라는 불신의 표현일 수도 있다.


자격을 요구하는 이 질문은 정당해 보이기도 한다. 잘못된 정보, 무책임한 발언, 상처만 남기는 참견이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때로는 이 자격 검열이, 누군가의 성찰과 회복, 혹은 진심 어린 메시지를 미리 가로막기도 한다.


우리는 묻는다.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

하지만 그 물음은 곧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라는 자기검열로 이어진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진짜’ 자격은 무엇일까?


무자격자의 말이 반드시 해악은 아니다. 반대로,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말도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결국 중요한 전문 지식이 아니라 진정성, 이야기의 형식이 아니라 책임감이다.


심리적 고통을 겪은 적 없더라도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고, 소수자의 정체성을 지니지 않아도 연대할 수 있다.

내가 겪지 않은 전쟁에 분노할 수 있고, 내 아이가 없어도 교육 문제에 진심일 수 있다.

말을 가능하게 하는 건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말에 담긴 ‘성찰’과 그에 따르는 ‘책임’이다.


진정성 없는 참견은 경계해야 한다. 반대로, 삶을 성찰하고 타인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다가가는 이야기라면, 그 누구라도 입을 열 수 있어야 한다. 자격은 학위나 이력서가 아니라, 경청의 태도와 책임의식에서 온다고 믿는다.


모든 말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 그러니 말하는 우리는 그 무게를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향해 “너는 그럴 자격이 없어”라고 말하기 전에, 그 말이 가로막고 있는 더 중요한 메시지가 없는지 먼저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거다


“너는 자격이 있어?”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당신은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가 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길 바라나요?”


자격을 증명하려 애쓰는 사람들보다, 이야기의 의미를 더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게 우리가 이 말 많은 시대에 놓치지 말아야 할 좋은 이야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말의 자격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내 삶을 살아내고 있다면,

내가 속한 세계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이 누구에게 닿길 바라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더 건강하게, 더 많은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 있을 것이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9화나의 콘셉트 언어를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