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서서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자
한참 갓생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이제서야 많은 사람들은 ‘돌아보니 갓생이란 말 아래에 자기착취를 일삼고 있었던 거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고 있다. 그러더니 이제는 걍생이란다. 이거 그냥 말만 바뀌었을 뿐이지 갓생이 유행일 때 “욜로하다 골로 간다”며 폄훼하던 욜로 아니던가.
노오오오력이라는 말로 폄훼되던 열정과 근면이 어느 시점엔 갓생이라는 말로 가치를 인정 받고, 욜로족이라며 폄훼하던 즐거움과 여유의 가치가 이제는 걍생이란 말로 탈환한다.
한국 문화에서는 사람을 그냥 살게 두지 않는다.
성공에는 연설이 필요하고, 실패에는 변명이 필요하고, 쉼에도 열정에도 근면에도 즐김에도 설명이 필요하다. 이 모든 말들의 본질과 목적에는 이러한 연설, 변명, 설명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내가 기준이 되면 변명이나 설명은 크게 필요없을텐데 타인의 기준에서 이를 설명하려다 보니 이렇게 말 위에 의존해서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야지 갓생이나 걍생이나 그 어떤 내가 기준되지 않은 생을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게 전제되지 않은 상태로 외국어 공부를 아무리 하고, 미라클모닝을 성공하며 아침을 맞아도, 죽어라 운동을 해서 몸을 만들어도 결국은 ‘자기착취였나‘ 하는 소진 상태에 빠진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가 있어서 어딘가에 가서 내 몸뚱이 하나로도 당당하고 싶어서, 의식이 더 많이 깨어있고 싶어서 이런 내 이유가 있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거다. 그리고 사실 그 과정에서 외국어를 잘하게 되지 않더라도, 어느 날 아침에는 늦잠을 자도, 몸이 좋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어쩌면 성장도 나도 모르는 어떤 기대에 맞춰지진 않았을까?
진짜 내 성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건 절대 출발점에 없다
성장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단 하나 성장욕구는 어디서 오는가 이건 같다.
‘결핍‘이다.
근데 많은 성장에 대한 계획은 나에겐 그런 결핍이 없어, 나에게는 그런 면이 없어, 아니면 결핍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로 이걸 채워야 해 하면서 세워진다. 그럼 내가 바로 세워질까? 아니다. 내가 나의 결핍을 억압하고 채워야 할 어떤 것처럼 다가가면 억눌린 자아를 기반으로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럼 진심이 될리가 없다. 근데 나의 결핍을 존중하면 나의 감각기관이 더 확장되고 나만의 다양성이나 창의성이 생긴다. 중요한 건 존중과 의식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존중’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결핍이라는 나의 의식을 한꺼풀 벗겨내고 나의 ‘그런 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존중이라고 할 수 있다.
- 왜 이걸 결핍이라고 생각해?
- 이걸 채우면 뭐가 나아지는데?
- 내가 진짜 바라는 내 모습은 뭐야?
나와의 의식소통을 하나라도 해내면 도미노처럼 줄줄이 모든 것이 무너져 그림을 이룬다.
나는 왜 이직에 집착하지?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있어. 왜 있지? 어릴 때부터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성공할 사람이라고 했어. 성공은 뭔데? 직장이 마음에 들면 다 나아져? 그럼 난 내 시간을 가장 의미 있게 쓰려면 뭘 해야지? 뭐에 열심히하고 뭘 적당히 하고 싶어? 이런 식인거다. 거기에 내 성장이 있다.
이전에 평생교육론 수업을 듣는데 교수님께서 우리가 배우는 이유는 ‘치유‘하기 위해서다라는 말을 하셨다.
듣다보니 납득이 되는 것이다.
교수님의 치유는 이거였다.
치료와 대비되는 것, 타인이 아닌 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래서 주체적으로 나아지는 것
치료는 남이 나를 고쳐주는 거지만 치유는 내가 나를 고쳐주는 것이고, 치유를 해내야만 내가 나와 사회랑 제대로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갓생이니 걍생이니처럼 오늘의 결핍이나 내 방식이 내일은 장점이 될 수 있는 사회다. 이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답이 나온다.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또 사회적 합의가 내 삶을 존중하게 만들려면 내가 내 기준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내게 뭘 필요한지 자연스레 알게 되고, 내가 그걸 하나씩 해나가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그럼 이제 배우는 이유도 더 명확히 정의할 수 있겠다.
1. 배움은 바로 서는 법을 배우는 거다
내 욕망은 뭔지 알고 내가 보고싶은 걸 보기 위해 설 줄 아는 거, 원하면 거기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일단 서 있는 상태를 만드는 거 그런 게 배우는 이유다
2. 배움은 밝게 보는 것이다
배움의 어원인 배다는 석보상절에 따르면 밝다라고 한다. 밝으면 내 주변에 있는 게 잘 보이고, 길이 보이고, 그러면 쓸 수 있는 게 많아지고, 뭔가를 쓰면서 하다보면 의미가 생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오랜만에 평생교육론 시간에 썼던 에세이를 보고 다시 한 번 초심으로 돌아가 배움의 가치를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치유가 되는 성장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자존을 어떤 형태로 추구하고 있는지, 추구한 자아나 자존이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상대에게 소구되고 합의하고 있는가 이 생각을 많이 한다. 근데 인생이란 게 내가 추구한다 해서 다 되지도 않고 내 생각대로 상대가 나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가치는 내가 살아온대로 현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대로 현재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인생에서 내가 어려움을 느낀 부분, 고민을 스스로 잘 돌아보고 치유한다면 그 인생의 가치를 누구보다 즐길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진짜 해야 할 일은 나를 주눅들게 하고 힘들게 한 인생의 난제를 내가 끊어내고, 필요하다면 풀고 내 자신을 진정한 내 인생의 빛나는 주인공으로 만드는 일이다.
내가 서서 무언가를 보다가 어느 날엔 누군가가 그리 당당하게 서 있는 나를 볼 수도 있고, 내가 세상을 밝게 보는 만큼 누군가가 자신의 세상에 있는 나를 밝게 봐줄 수도 있지만 일단 내가 스스로 일어나서 밝게 보는 것 그게 먼저다. 나머지는 다 후순위다.
요즘을 일을 선택할 때 성장에 대해 말한다. 그 성장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면 일을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독립이 있고, 내가 정말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스스로 치유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