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교육에 대한 민주적 관점

by 좋은이야기연구소


지금 여기, 우리 한국사회가 자존감 없는 자아들의 폐허가 된 이유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말, 특히 한 사회에 통용되는 말은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지표가 된다.

남북전쟁 기간 중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 그 좋은 예시다.


이 연설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에서 역시 이 말을 배우고 있다.


바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이라는 ‘번역어’로 말이다.

아마 위에서 ?하고 내려왔어도 번역어를 보고 바로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번역은 참 한국스럽다. 번역은 굴절, 해석, 오해, 번역자의 가치관의 투사를 동반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 교육이 남발하는 이 말처럼 한국 사회의 교육은 “국민”에 기반하고 있다.


나는 일단 ‘국민’이라는 번역은 적절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를 쟁취해내고 형성한 국가에서는 ‘people’은 ‘인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인민과 국민이요?


인민은 사회계약론에 따라 어떠한 압제나 권력에 의하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이 권리 의무의 주체로서 기본권을 향유하는 주체이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며 국가우월주의적인 용어이다. ‘people”을 ‘국민’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그저 언어의 한계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그 언어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세계의 한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교육은 결국 국민을 만들어내기 위한 교육이었다. 쟁취하고 질문하는 교육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가만히 있을 ‘착한 사람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 말이다.




조심스럽지만 세월호 사고 역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어른들을 믿고 기다렸던 학생들에 모습에 우리는 마음이 아팠고, 그 와중에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은 무책임한 어른과 기득권의 모습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이것 역시 한국사회의 교육이 만들어낸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만들어져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인정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고 자리잡는 것을 저해하는 말도 있다.






나는 한국사회가 잘라내야 하는 썩은 가장 단면은 개천에서 용난다가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쟁취한 사회인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답하고 싶다.

근대성은 일제와 서구에 의해 이식되긴 했으나, 4.19부터 5.18까지, 그리고 촛불집회와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분명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해왔고, 해나갈 사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서구와 다르게 가지고 있는 특성에 대해 뭉툭하게 사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뭉툭하게 사유하면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곳은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 길의 안내자인 희망은 현실적 맥락을 상실하고서 구현될 수 없다.

뭐 강조하고자 다시 한 번 말하면 희망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적 지평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환상에 기반하면 안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여기', 현재이자 미래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그 자체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현실적 맥락에서의 교육은 메리토크라시, 즉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로 대표된다.

메리토크라시 이념은 자본주의 사회 일반에서도 그렇지만 강력한 유교 전통을 가진 우리 사회에서는 더더욱 강력한 생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 이 이념의 대중적 설득력은 엄청나다. 기회의 균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과거제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민족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 실질적 기회 균등이 보장된 경쟁에서의 패배는 사람들을 더 절망적으로 ‘자기 탓’을 하며 열패감과 모욕감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유와 평등을 내포한 민주주의의 필연적인 산물일까?


나는 이를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는 아니더라도 비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회의 균등이 가지고 있는 진짜 전제에 대해서 대항할 의지를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전제는 '실력과 노력이 없다면 루저'라는 일면적인 원칙 위에 메리토크라시가 서 있다는 점과 조건의 평등이 전제되지 않은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자존감 없는 자아들의 폐허가 된 이유 중 하나는 기회의 균등이 가지고 있는 진짜 전제에 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가 만든 정답이 아닌 우리 모두가 보다 존엄성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해답을 찾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우리 사회는 정답을 맞춘 사람이 승리하고, 정답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교육을 하고 있다.





예컨대 최근에 대학 응원가를 부르는 콘텐츠에 분교 학생이 노래를 불러 본교의 학생들이 분노한 사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조금은 마음이 아팠다.

본교의 학생들의 실력과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코로나로 힘든 현 상황에 대학교의 노래로 대표되는 학과나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이 같이 힘을 내자는 의미에서 응원가를 부르는 컨셉에는 크게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댓글창은 분교 학생들에 대한 무시와 배제, 노래를 부른 학생에 대한 비판과 혐오로 넘쳐났다.


아마 나는 그 학생들을 보고 똑똑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잘 배웠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맞다. 학위취득자라고는 할 수 있어도 지성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익명성에 숨어 한 사람의 존엄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이 한국의 미래 시민들에게 각인시킨 메리토크라시적 학력위계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 그리고 학교교육이 정해놓은 기준에서의 상대적 패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와 낙인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한다.


사실 댓글을 단 모든 이들도 억울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교육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메리토크라시 패러다임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존엄성을 인정받기가 본질적으로 어렵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이 진짜 전제에 아무도 질문하거나 대항하지 않는가.

모든 구성원의 존엄과 평등을 보장하고 실현해야 한다는 도덕적 목적은 온데간데 없고, 그렇게 '평등을 보장해줬는데도 못한 너가 패자인거야', '이 정도 이해해줬으면 되었잖아'같은 시혜만 넘쳐난다.

그리하여 사람 간의 상호 존중과 인정, 다양성에 대한 포용과 관용, 연대 등의 가치와 태도가 일반화되고 뿌리를 내릴 틈은 보이지 않는다. 서로의 토양에서 각자도생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진지 30년이 넘어가지만, 이런 민주주의의 문화적-도덕적 기반은 형편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사회적 삶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메마르기만 하다.

시민적 예의 또는 시민적 문화의 부재 그리고 민주적 가치의 질식, 바로 지금 우리 민주주의가 직면한 또 하나의 근본적 문제다.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 철학의 기초를 세우는 작업을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한다.

“너는 너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인간을 목적으로, 다시 말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엄한 존재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이다.

칸트의 이 명령은 오늘의 문명 세계를 떠받치는 원리이자 이 원리를 집약한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 명령에 따라 실현된 나라를 칸트는 ‘목적의 나라’라고 부른다. 모든 인간이 서로를 목적으로, 존엄한 인격으로 만나는 나라가 ‘목적의 나라’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수단의 나라’에 살고 있다.





불평은 끝났고,

그럼 다시 희망에 대해서 말해보자


그래서 나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유효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개천’에 대한 절대적 비하와 ‘용’으로 상징화되는 가치의 문제점과 위험성이다.

이 말에서 개천은 전적으로 부정해야 하는 삶의 공간일 뿐 아니라 빈곤과 황폐, 그리고 패자들의 하찮은 삶의 표상으로 전락한다. 권력과 부를 향유할 수 없도록 태어난 ‘흙수저’들이 살아가는 고정된 공간으로 벗어나야 할 공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은 용이 사는 바다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말 놀랍지만, 놀랍지 않게도(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은) 개천은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에서 절대다수가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삶의 공간이다. 어렵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정황을 ‘개천’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살아가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씨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부정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용은 다른 생명과 ‘공생’하는 삶을 지향하는 표상이 아니다. 다른 존재들 ‘위’에 ‘군림’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지배자의 표상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세계는 개천에서 솟아나와 권력과 부를 향유하는 극소수의 용을 선망하고 양산해내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개천 자체를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드는 사회이다.

이것이 교육의 수단이자 목적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평생교육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쓰면서 사실은 나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자존감 없는 자아들의 폐허가 된 것에 대해 교육의 책임은 없을까?
학교 교육이 이를 심화시킨다면 평생교육이 이를 해결 내지는 해소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그리고 두 질문 모두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어버이 연합'의 사례에서 찾았다.

먼저 나는 태극기 집회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의 관점에서 이 사례는 나에게 큰 시사점을 주었다.


어버이연합 뉴스가 발표될 때 마다 온갖 비난이 SNS 상에서 쏟아졌다. 한참 젊은 세대들에게 '어버이연합'은 '왜 저래?',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의 대상이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다고 말하나, 아래 뉴스기사를 보고 잠시 그들에 대한 평가를 멈추고 다른 생각을 시작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0181

뉴스기사의 내용은 '대한민국 어버이 연합‘에서 ’어버이들‘에게 2만원을 주면서 갖가지 집회에 동원했다는 내용이다. 맹목적 반공의식과 폐쇄적 애국심으로 무장한 것 같지만 그들의 진짜 속내는 경제적 어려움과 관계에서의 고립이었다. 그 집회에 참여한 사람 중 80퍼센트 이상이 월 수입이 10~30만원 이하라고 한다.

과연 국가의 복합적인 사회제도적 보장이 있었다면 그들이 사유를 포기하고 자신을 2만원의 부품으로 사용되게 했을까? 어버이들을 하나의 집단적 범주에 넣어버리고 그들의 개별적인 삶을 보지 않은 것 역시 우리의 인식론적 폭력은 아닌가


둘째로, 평생교육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답에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다.

중등교육 교원자격증 이수 과정에서 읽게 된 평생교육론의 서문이 나에게 그런 확신을 줬다.

"평생교육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교육과 학습의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의 전반적 시스템을 재구조화하는 원리이자, 그것을 지탱하는 이념이다."라는 말이 그렇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구현하된 사회문화 체제가 평생학습사회라고 할 때 내가 지향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평생학습사회에 있다.


사회의 문제를 규정하는데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되며, 사실상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 그 사람만큼이나 나도 새로운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에 대한 학습이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급속한 변화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평생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니까 평생교육은 그냥 방법론이 아니라 사회에 '좋은 사람'이 많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내가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또 좋은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계속 배워야 한다고 알려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패러다임인 것이다.

그러니까 평생교육을 공부하는 나는 모든 세대가, 모든 삶이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 수 있게끔 일조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드라마 미생의 OST 의 마지막 소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교육이 만들어야 할 것은 가리워진 길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다.

평생교육이 그 길의 안내자가 될 수 있는 실천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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