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숲으로 Oct 29. 2022

와인이 생각난다면, 단연코 이곳으로.

-제주 시내의 보석같은 와인바


제주살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장단점이 뚜렷해져 갔다.

조금만 나서면 보이는 바다와 멋진 경치, 무엇보다 항상 감탄사를 내뱉게 하던 구름과 하늘. 제주 특유의 여유로움과 느림의 아름다움이 주는 기쁨만큼,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길도 잘 모를 뿐더러 차 없이는 다니기 불편한 환경이 주는 답답함과 외로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정말 가볍게 만나서 수다 떨 친구 한 명 없는 현실은 나를 저절로 시간부자로 만들어주었다.

아이 챙기고, 집안일 하고, 매일 하는 홈트하고, 맡은 작업을 마무리해도 항상 밤늦게 퇴근하는 남편이 오기까지 여유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내가 원체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쉬는 것을 잘 못하는지라 역시 이번에도 무언가를 시작했는데 그 결과 비어있는 시간의 상당부분을 와인으로 채우게 되었다.


아! 내가 그 시간동안 와인을 주구장창 마셨다는 오해는 하지 말아주시길.

와인 관련 강의를 듣고 책을 읽으며 공부를 시작했는데 와인이라는 것이 원래 알면 알수록 더 어렵기에 초창기에는 지브리 샹베르뗑, 마고가 어쩌고, 까베르네 쇼비뇽, 말벡, 끼안띠, 바롤로 등등이 어쩌고 저쩌고 하니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는 듯 했지만 이런 지식들은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고 읽으며 서서히 정리되어 갔다.


그.러.나. 골프 치는 분들이 구력이 무시 못한다고 얘기하듯이 와인 역시 '주력'이 가장 중요한 법. 즉, 와인을 정말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다양한 와인을 많이 마셔봐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와인은 그 자체도 맛있지만 음식과의 페어링을 통해 숨은 포텐셜이 마구 터지는 것이 또 다른 매력 아닌가. 이처럼 와인은 마셔도 마셔도 새롭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밀당의 고수여서 책으로만 와인을 알아가는 한계는 날이 갈수록 분명했다.


와인에 대한 갈증이 나날이 심해지던 어느 날, 이런 고민을 한 방에 날려주는 기막힌 곳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것도 바로 우리 집 코앞에서! 걸어서 단 5분 거리에!


사실 이 곳은 우리 아파트 단지 정문으로 나가서 슈퍼나 서점을 갈 때 지나는 길에 있었기에 왔다갔다 하면서 자주 봤었고 이름이 다소 독특해서 눈여겨 본 덕분에 기억에 남아있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동안 가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 곳을 지나쳐만 갔던 시간이 아까울 만큼 참으로 아끼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남편의 제안으로 와인을 가볍게 마셔보자며 간 첫날 이후 우리 가족은 '와인'하면 이 곳을 떠올릴 만큼 자주 찾았고, 즐겼고, 아끼게 되었다.

칠링한 화이트 와인과 맛있는 음식.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넓은 공간에 테이블은 여유롭게 배치되어 있고 입구 가까이에 자리잡은 그랜드 피아노와 샹들리에, 그리고 벽면을 빼곡하게 둘러싼 와인병들은 '자, 와인 즐길 준비 되셨나요?'라는 말을 건네듯이 와인바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음식이 메인이고 와인은 선택 옵션 정도인 것이 아니라 이 곳의 주인공은 바로 '와인'!


그런데 내가 이 곳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단지 와인 때문만이 아니다.

사실 요리가 맛이 없었다면 제주도의 많고 많은 와인바 중 아무리 가까워도 이 곳만 문턱이 닳도록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주에서 나는 건강한 제철 식재료를 중심으로 셰프가 재해석한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타일의 요리들은 그 플레이팅과 맛 모두 아름다워서 먹다 보면 어린 시절 유행했던 미식 기행을 테마로 한 TV만화 주인공처럼 '美美!'를 외치게 된다.

서로 찰떡 궁합인 요리와 와인의 맛있는 만남은 흥겨움과 즐거움을 절로 높여주어 이 곳은 제주를 찾아 온 지인들을 초대하는 단골 장소가 되었다.


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장님과 매니저님, 제주 전통시장을 매일 다니며 좋은 식재료를 찾는 열정 넘치는셰프님이 만들어내는 이 곳은 말벡의 묵직함과 비오니에의 상큼함, 샴페인의 고급스러움을 모두 담은 '와인다운' 공간임이 틀림없다.


덧붙임 : 최근에 이 곳은 긴 시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바테이블을 중심으로 한, 더욱 힙하고 트렌디한 공간으로 변신하였다. 와인 리스트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 종류가 풍부해져서 골라 마시는 재미가 더욱 커졌다. 새로운 셰프님이 오셨는데 변함없이 개성있고 맛있는 메뉴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전 08화 작아서 더 아늑한 비건 카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