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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면접 보고 왔어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by 사공리셋

창업 후 1년이 흘렀고, 빨래방의 매출은 점점 눈에 띄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든 지도 앱에다 플레이스등록을 하고, 플레이스광고, 블로그, 인스타, 당근마켓 등등 동네생활권의 모든 바운더리에 광고로 우리 가게의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 거의 1년 시점이었다.

소소한 시비와 사건사고들도 분명 있었다.

어쩌면 빠르게 다 겪어봐서 빠르게 적응을 해간 건지도 모르겠다.

기계소리에 민감한 옆가게 아주머니, 부품하나의 불량으로 매장바닥에 물난리, 상가 주차장 사용 시시비비, 노숙자아주머니 한분, 새벽시간 중학생들...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크게 감당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매일 CCTV를 들여다보며 무인이지만 실시간 사람들을 지켜보며 24시간 유인가게 사장님이 되어 거짓말 조금 보태어 하루에 20~30분마다 CCTV를 확인했다.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일지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나도 모르겠어서이다.

가끔 이렇게 지내는 내 모습에 현타가 오기도 했다.

타고난 예민이에게 사람을 대면하지 않는 가게라 그나마 괜찮다고 여기지만, 빨래방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나 또한 기계작동이 미숙할 때이고 보니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두렵고, 가게가 자리 잡기 전까지 잘 응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마음의 집착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처음 회사에 입사 후 호되게 사회생활을 배우며 눈치 보고 일했던 바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했다.

기계작동과 키오스크 사용안내에 친숙해지고 껄끄러운 일들을 하나둘씩 해결해 나가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무던해지는 날이 점점 오기는 했다.

마음무게의 강도가 덜어지고 있었는데, 몸 움직임의 패턴은 매일 똑같았다.

빨래를 다녀간 사람이 한 명이든 몇십 명이든 나만의 청소루틴을 하지 않으면, 손님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내가 가둔 틀 안에서 생겨난 '청결강박'이라고 해야 할까. 꾸준히 올라가는 매출은 그것을 잘하고 있다고 인정이라도 하듯 더 타당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너무 힘이 들었다.

출근하기 싫은 날처럼 아침잠이 쏟아지거나 몸이 무거운 날은 연차를 내 듯이 누군가 대체근무자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강박이었다.

고객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소통창구에 '깨끗하다. 깔끔하다. 쾌적하다'와 같은 기분 좋은 메시지들은 그렇게 나를 매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없는 평온한 날은 올까?'라는 생각.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회사 만 년 차가 되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안정적인 급여를 받던 그 시절 그 시간이 떠올랐다. 퇴근 후 모드를 전환해서 취미생활이든, 엄마의 역할이든 맺고 끊기가 가능했던 회사생활이 그리웠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퇴사 후 3년 차 막바지인 올해가 아니면 진짜 이 일은 끝일 것만 같아서 다른 형태로 접근해 볼 수 있는 나의 경력을 섞여 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정말 문득 올라왔다.


이력서를 넣었다.

의료 IT회사였다.

의료기사 면허증, 종합병원. 대학병원의 경력.

그동안 온갖 삽질을 하느라 이직을 목표로 IT회사 이직과 관련된 준비를 해온 것도 없었고, 어떤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오직 나의 이력에만 도취되어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평소 편한 복장으로 빨래방을 청소하고 아이들 숙제 챙기고 학원 라이딩을 하며 정신없는 일과를 보내다 가까운 쇼핑몰을 들렀다.

몇 가지 정장들로만 거울 앞에 가져다 대어 보고 있으니 점원분이 물으셨다.

"어디 좋은 데 가시나 봐요"

"아... 내일 면접 보러 가요"

"어머나, 면접이면 단정한 게 최고죠. 언니는 얼굴이 밝아서 어떤 색깔도 다 잘 어울려요. 그래도 무게감 있는 걸로 골라드릴게요"

"근데, 어디 면접 보는지 물어봐도 돼요?"

"IT회사요"

"아 경력자신가 봐요. 우리 나이에 면접에 불러주는 게 어디예요. 호호호"


경력자. 우리 나이.


IT경력자는 의료 IT기업이니 그냥 들이대보는 거였고, 점원분의 외형적 연배가 나와 비슷해 보였으니 우리 나이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20대 때는 너무 떨려서 밤잠도 설치고, 거울 보며 표정연습도 하고 우황청심환도 챙겨 먹었는데 지금의 나는 털레털레 옷쇼핑을 즐기며 오랜만에 차려입고 서 있는 전신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흡족해하는 게 전부였으니, 그동안 참으로 많이 컸구나 싶었다.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잘 운영되고 있는 빨래방을 그만둔다는 말로 들려질까 봐, 혹은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 또한 지금의 나의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확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면접을 위해 회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몇 십 명은 되어 보이는 직원들이 가득 찬 공간에 칸막이 책상들.

너무 조용해 숨소리도 들리면 안 될 것 같은 적막감.

친절한 여성 분이 면접장으로 안내해 주셨다.

도작해보니 나 혼자였다.

일대일 면접 같았다.

두리번거리며 기다리고 앉아 있으니 조금 뒤 젊은 남자분 세 명이 들어왔다.

내 기준에 젊은 남자 세 분이었지만, 각 파트별 팀장님들이셨다.

갑자기 현타가 왔다.

팀장이라는 분들의 나이가 저렇게나 젊고, 이래나 저래나 IT회사에서 나는 초임이 되는 건데, 의료 임상과 IT기술까지 갖춘 실무자를 뽑고자 면접장으로 부른 것 같긴한데, 저분들을 팀장으로 모셔야 한다는건데...

면접이 40분 넘게 이어지며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어떤 프로그램들을 사용해 보셨어요?"

"그 프로그램 사용 시 어떤 부분이 불편하거나 문제점들이 있다고 보이셨나요?"

"어디까지 작업해 보셨나요?"

"여기 일하는 사람들이 1년 넘게 하루 종일 배워도 친숙해지지 못할 기술들입니다. 가능하시겠어요?"

"불시에 야근도 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어리네요?"

"집이 1시간 거리네요"

.

.

'결정적으로 네가 당장 이곳에 들어와서 일할 가진 기술이 없잖아'

'우리가 월급을 주면서 가르칠 수도 없고 말이야'

'여기는 IT회사라고'

그들은 그 말이 하고 싶었던 듯 점점 면접의 내용은 여기까지라고 알려주는 것 같이 흘러갔다.

"밖에서 조금만 대기해 주십시오. 저희가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거의 10분 이상 대기를 했다.

10분 이상 이야기를 나눴다는 건 아주 애매했다는 이야기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까지 연락이 없으면 불합격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홀가분하게 회사 밖을 나왔다.

그런데 몸이 반응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기 위가 너무 쓰리고 아파서 한참을 회사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었구나...

붙어도 아는 게 없어서 잘할 수도 없는데, 야근이라도 하게 되면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건데, 빨래방을 하면서 이 먼 거리를 통근하며 어떻게 시간을 나눠 쓸 건데....

정말 단지 나의 기나긴 이력을 날려버리는 것에 대한 불안. 속상함. 두려움 여러 가지 이유였던 것 같았다.


나를 탈락시킨 회사였지만, 감사했다.

면접의 막바지에 집으로 돌아가면 '00 프로그램'을 열심히 준비해 보세요'라며 조언도 주시고, 말씀을 참 잘하신다는 칭찬과 함께 가는 길 조심히 가시라고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 주신 팀장님 덕분에 기분도 좋았다.

홀가분함. 감사함. 모르겠지만 뿌듯함.

그렇게 나는 이 면접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방황하지 않기로 했다.


머리 대신 내 마음이 움직이는 곳으로 향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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