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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라라 Nov 01. 2024

백일떡은 그냥 받는 게 아니래요.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어 아이 백일 떡을 가지고 앞집을 찾았다. 우리 집 현관을 열고, 몇 걸음 걸어가 초인종을 몇 번 눌렀는데 사람이 없어 보여 문고리에 걸어 놓고 뒤돌아 다시 몇 걸음의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현관문이었다. 가족 빼고 물리적으로 이렇게 가까운 곳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을까. 고작 문 두 개 사이를 두고 앉아 있으면 때론 한 집안의 다른 식구들보다 가까이 있을 것도 같았다.

 

 며칠 후, 느닷없는 벨소리에 나가보니 앞집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앞집 아주머니는 우리 친정엄마 나이 즈음 되어 보였다. 나이를 잘 가늠을 못하는 내가 보기에 그랬으니 우리 엄마보다 좀 적었을지도, 혹은 많으셨을지도 모른다. 오가며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세요."만 하는 사이였다. 그 이상의 얘기는 할 것도 없었다. 간혹 오지랖 넓은 남편이 더 대화를 끌어내곤 했다.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 다녀오시나 봐요.", 하거나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후에는 "다 고쳤나 봐요. 금방 고쳐서 다행이에요."와 같은. 말주변 없는 나는 남편에게 쓸데없는 말들을 한다고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남편은 개의치 않고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스몰토크를 많은 사람과 나누었다. 하긴, 우리 집이 꼭대기 20층에 있어 앞집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스무 층을 올라가는 긴긴 시간 동안 '안녕하세요' 한 마디만 하기에는 침묵의 공간이 너무 컸다.


 앞집 아주머니는 포도 한 박스를 들고 계셨다.

 "저번에 떡 맛있게 잘 먹었어요."

 "아니, 안 주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아이 건강하게 자라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어릴 적, 골목에서 놀던 때 이후로 이웃과의 이런 교류는 너무나 오랜만이라 어찌할 줄 몰라가며 주신 포도 한 박스를 얼떨결에 품 안에 가득 안았다. 이웃과의 교류 경험으로 삶이 채워져 있는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원래 그러는 거야. 백일 떡은 그냥 받는 게 아니라고 하거든."

 "그래? 난 몰랐는데. 부담드리려고 준 게 아닌데...."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맛있게 먹어."


 백일 떡을 드리지 않았는데도, 가끔 앞 집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직접 농사지었다는 팔뚝만 한 고구마를 잔뜩 가져왔을 때는 한동안 고구마튀김을 질리도록 해 먹었다. 우리 집은 도심 한가운데였지만 어디 시골에 집이 한 채 더 있어 오가며 생활을 하시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상추가 걸려있기도 했다. 현관문 손잡이에 걸려 있는 농작물들을 보며, 감사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우리 이거 안 먹는데...' 싶기도 했다. 그래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면 꼬박꼬박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받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가끔 꽃 농장에서 박스 꽃을 직거래 주문할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손질 안된 꽃들이 한가득 배달 온다. 그 꽃을 집안 여기저기 꽂아 놓고 아이 학원 선생님께 조금씩 드리기도 하고, 꽤 많은 양을 앞 집에 드리기도 했다.

 "제가 꽃을 주문했는데 너무 많이 와서요."

꽃을 드릴 때도 참 조심스럽다. 절화는 화분과 달리 매일매일 꽃병에 있는 물을 갈아주어야 예쁘게 오래 볼 수 있는데 그게 꽤 귀찮은 일거리다. 그렇지 않으면 꽃이 금방 시들 뿐더러 금방 물이 썩어 냄새나고 꽃을 버릴 때도 줄기가 물러져 손 대기 싫은 상태로 변해버린다. 그래서 꽃을 조금 줄 때는 너무 초라하지 않을까, 많이 줄 때는 뒤처리 하기 번거롭지 않을까 고민스럽지만,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꽃을 나눈다. 받는 사람이 뒷일은 알아서 하라지.


 가끔 있는 일이었다. 일 년에 두세 번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집에 십 년을 넘게 살았으니 묵힌 정도 십 년 치가 쌓였다. 딱 그만큼이었다. 대화를 세 마디 이상 길게 나누지도 않았고 집에 무언가 넘쳐날 때, 조금씩 나누는 정도였다. 없는 걸 사서 주는 게 아니라 넘쳐날 때 생각나는 그 정도.


 백일잔치를 했던 그 아기는 열 살이 되었다. 우리의 유일한 소통공간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아이는 "안녕하세요" 말하며 꾸벅 인사를 했고,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많이 컸네." 하고 인사를 받아주셨다. 우리 집 아이는 앞 집 아주머니의 넘실넘실 문 넘어 스며드는 애정도 먹고 컸다.


 십여 년 사는 동안 층층이 많은 집들이 이사를 가고 들어오고 했다. 한 층에 두 집씩 스무 가구가 같은 엘리베이터를 공유하는데 어느 집은 주인이 서너 번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앞집은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도 있었고 십여 년 동안 나가지도 않았다. 우리가 먼저 나가게 되었다. 이삿날을 잡고 앞집과 마주쳐 짧은 대화를 나눴다.

 "저희 다음 달 초에 이사 나가게 되었어요."

 "어머, 그래요? 좋은 집으로 가서 좋은 일 가득 생기길요. 축하해요."

 그냥 이사 가는 것뿐인데 좋은 집일지 나쁜 집일지 뭔 줄 알고 저렇게 말씀하시지, 생각했지만

 "네,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덕담을 받아먹었다.

 

 우리가 살던 곳에 들어올 사람은 신혼부부였다. 아이 없는 맞벌이 신혼부부. 아마 집에서 요리할 시간도 적고 팔뚝만 한 고구마를 보면 화들짝 놀랄 텐데. 안 받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우리가 이사 간 맞은편 집도 신혼부부였다. 아이 없는 맞벌이 신혼부부. 얼굴보기는 이전 집보다 드물었다. 나는 아직도 앞집 부부 얼굴을 잘 모르겠다. 엘리베이터 앞 공간도 이전보다 넓었다. 전에는 다섯 걸음 남짓 거리였는데 이번엔 열댓 걸음쯤 되는 것 같다. 멀어진 만큼 안도하면서, 멀어진 만큼 멀어졌다.


 나는 짧은 시간 일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동료 직원이 아이를 낳아 백일 떡을 받았다. 나는 돌 때쯤 되는 아이가 입을만한 사이즈의 옷을 사 포장했다. 교환할 수 있게 영수증도 넣었다.

 "백일 떡은 그냥 받는 게 아니래요. 아이 건강하게 크길 바랍니다."


 스몰톡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나를 포함해서. 그런데 꼭 스몰톡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다. 아주아주 톡도 괜찮다. 백일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그것까지 없는 삶은 좀 서운할것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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