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기가 된 기분으로 낯선 이국땅에 서다.
힘들 때마다 계속 반복되었던 생각. 유럽 가보고 싶어. 어마어마한 유적지와 어지러운 골목들. 그리고 고풍스런 옛 건물들이 즐비한 구시가지와 현대식 시가지가 함께 공존하는 곳.
과거와 현재가 함께 살고 있는 곳.
당시에는 왜 그렇게 유럽을 갈망했는지 몰랐지만, 가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과거와 현재를 잘 버무리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와 화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떠났다고나 할까.
첫 행선지는 터키였다. 직관적으로 가장 혼돈스럽고 이국적인 국가를 고른 것이었지만, 역시나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거기 간 이유는 분명했다.
가기 전,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만류가 심했는지 모른다.
-여자 혼자는 위험하대.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야.
-남자들이 끈덕지대
-차이 먹고 기절하면 큰일난대
여러가지 추측과 걱정이 난무했지만, 난 일단 혼자 이스탄불에 떨어지기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사실은 .. 모두가 이야기하는 '여자 혼자는 그곳은 정말 위험하다' 라는 점 때문에 더 가고 싶었다. 그 시기의 나는 어떤 도전이 필요했고, 여자 혼자 위험하다는 지역을 안전하게 여행해내는 것을 내 자신감 회복의 첫걸음으로 삼고 싶은 어떤 묘한 오기랄까.. 그런게 발동했다. 게다가, 정말 그곳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만큼 위험한 곳인지? 나 같은 이방인을 어찌 대할지 정말 순수한 궁금증이 솟아났다.
그렇게 38리터 배낭 하나, 유레일 패스, 여권, 몇 개의 카드만 달랑 들고 맨 처음, 터키 이스탄불에 떨어졌다.
난생 처음보는 무슬림들, 낯선 언어와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 어리둥절 트램을 타고 일단 술탄 아흐멧으로 간다. 지금이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여행다니는 유명 여행지라지만, 그 당시에 여자 혼자 그 이슬람 도시를 여행하는 용감한 사람은 그닥 많지는 않았었는가보다. 그래서 그런지 그 낯선 여행자는 내가 의도했던 대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움을 얻기 시작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공항에서 내려 도시로 가는 버스에서부터 낯선 사람들의 인상깊은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트램에 내 옆에 앉은 영어를 잘하시는 아저씨께서 말을 걸어오신다. 내 앞의 남자도. 나는 별로 경계하지 않는다. 여행중이냐고 해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왜 혼자 여행하냐고 해서 혼자 여행하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라고 대답한다. 어디를 여행할 예정이냐고 해서 아직은 모르겠고, 터키 동부쪽까지 가보고 싶은데 그곳은 아직 전쟁중이라 여자 혼자 여행하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해서 갈까 말까 생각중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 아저씨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아니, 위험하지 않아. 가 보고 싶으면 가봐.
응? 위험하지 않다고요? 전쟁중이라면서요? 여자 혼자도 그렇고, 다들 말리던데.
그 아저씨는 씨익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 비율로 나쁜 사람도 많이 모이기 때문에 위험해 보이는 것일 뿐이지, 실제적인 비율은 어디나 똑같아. 좋은 사람과 위험한 사람이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어. 살아가면서 명심해야 할 건 위험한 지역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거야. 나는 오직 신과 나 자신만 믿어. 그러면 위험한 환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져.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
네가 가고 싶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가고 싶다면, 꼭 가봐. 신이 너와 함께할테니.
나는 알라 신을 믿지는 않지만, 뭐 특별한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거부감 없이 따뜻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보통은 '신의 뜻이니, 네가 가봐야 한다' 라는 말만 듣다가, 참 신선하게 들렸다.
'신'이 너와 함께할테니, '네' 가 가고 싶은 곳은 맘껏 가라니..
그렇게 이국에 떨어지자마자 처음 만난 그 아저씨는, 따뜻한 미소로 많은 걸 얻는 여행 하라고 인사를 건네신 뒤, 내가 내릴 역을 알려주시고는 트램에서 내려서 자기 갈 길 가신다. 그리고 나는 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가 웅장하게 마주보고 있는 술탄 아흐멧 구시가지에 떨어져서 눈이 두배로 땡그래져서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여긴.... 뭐야?? 뭐 이런 곳이 다 있어....
아야 소피아와 블루모스크가 이렇게 가깝게 마주보고 있는 줄 몰랐다. 사진으로 충분히 보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지리적 가까움에 난생 처음 어지러움 같은 걸 느꼈다. 정말 고대 도시에 떨어진 기분이랄까. 이렇게 도시 전체에 다닥다닥 웅장하게 붙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 드디어 신세계에 떨어졌구나. 내 여행이 시작되었구나. 등짝에 매고 있는 배낭만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왼쪽엔 1000년동안 기독교와 이슬람, 두 종교의 박치기 싸움장으로 기구한 역사를 가진 아야 소피아.
오른쪽엔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휘둥그레지는 블루 모스크.
사진으로 표현이 안된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과거의 유산에 압도당해 정신이 혼미했다. 내 발걸음에 달라붙는 터키 상인들의 시선들을 느끼며 저벅저벅 내 호텔을 향해 걸어가는 내내 내가 다른 별세계에 떨어진 느낌.
자. 일단 이스탄불에 떨어졌다. 4개월간의 여행이 시작된다. 난 무얼 배우고 어떤 걸 느낄 것인가.
멋진 관광지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 난 관광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 낯선 행성에 여행온 느낌으로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관광지를 지나 그들의 삶 터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터키 미마르 시난의 자미에서부터 갈라타 타워까지.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이스탄불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동선이다. 건축물과 외관만 봐서는 터키가 진짜 어떤 분위기를 가진 나라인지 알 수가 없기도 했고, 나는 사람들의 진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여행을 좋아한다. 터키어 한마디 못하는 예의없는 여행객. 그냥 길을 잃고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외국인이나 관광객은 나밖에 없는 순수 터키인들의 삶터인 시장거리. 외국인은 한 명도 없어 보여 살짝 긴장했지만, 모두가 자기 갈 길 바쁘다.
가게 앞에 옹기 종기 모여앉아 터키 전통차 '차이'를 마시면서 지나가는 유일한 동양인인 내게도 서슴없이 권한다. 관광지가 아니라서 영어가 아닌 터키어로 뭐라 말을 걸기에 나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들이 권하는 자기들이 먹고 있는 주전자에서 따라 주는 한 잔의 '차이' 앞에서 계속 망설였다.
본능적인 느낌으로 이 사람들이 권하는 차는 마셔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하도 '차이'에 관해 약 타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안좋은 얘기를 들은 게 많은 터라 사양하자 그들의 표정은 순박하게 너무 안타까워했다. "좀 안됐다...우린 좋은 사람들인데.."라는 씁쓸함으로 가득찬다.
내가 느낀 길거리의 터키는 '자연스러움'이었다. 일단 수많은 길거리의 동물들에 깜짝 놀라게 된다. 수많은 길고양이들, 개들, 새들.. 사람에게 의심없이 다가온다.
내가 가장 좋았던 건 길가의 과일 장수 아저씨. 내가 좋아하는 체리를 배터지게 싸게 먹을 수 있어서 여행 내내 사들고 다녔다. 체리가 품질이 다르다... 아직도 그립다..
이스탄불 뒷골목의 달동네. 겁 없이 저벅저벅 올라갔다. 내가 염소를 보고 반가워하자, 한 아이가 나서서 내게 좀 더 가까이 보여주려고 염소를 끌어준다. 해맑고 밝다. 낯가림이 특히 없는 것 같다. 이상하게 터키 아이들은 사람들을 보면 무조건 반가워한다. 신기할 정도로.. 그들의 교육 방식이 참 궁금해졌다
도너 집. 이 가게를 발견하고 이스탄불 관광지가 얼마나 바가지를 씌우는지 알게 되었다... ㅠ
엄청 싸다. 게다가 말은 한마디도 안 통하지만, 사람들도 순박하고 정성스럽다. 감동스러울 정도로 ...
술탄의 묘지 안. 터키 묘지들은 사람이 엎드려 있는 형상으로 머리에 터번을 씌워놓아서 꼭 사람같다.
펼쳐진 꾸란 너머로 보이는 술탄과 그의 가족들. 처음엔 섬뜩, 그 다음엔 묘한 ... 허무함이 밀려온 듯.
신시가지로 넘어오면, 터키가 못사는 나라 아니었나? 라는 내 고정관념을 가차없이 깨준다.
한국 서울과 똑같거나 더 분주한 모습. 명동 거리같은 모습에 트램만 얹어 놓은 느낌이다.
연인들은 애정표현이 자연스럽고, 여자들도 굉장히 세련되고 파격적인 노출 의상도 많이 보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대학교 앞에서 데모를 하는 모습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신시가지에는 예쁜 길도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꽃을 참 좋아하는 나라인 듯. 알록달록하게 가꿔놓은 걸 보면 ..
블루 모스크 앞 광장에서 터키식 공연이 있었다.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은 우비를 쓰고 남의 시선 가리지 않고 춤을 춘다.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모습이 .. 참 자연스럽고 자유로워 보였다.
갈라타 타워를 찾느라 길을 한참 헤매이고 있던 터. 도로 중앙에서 이쪽인가 저쪽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도로 정 중앙에서 잠깐 멍하니 휴식을 취했다. 이쪽으로 가는 사람, 저쪽으로 가는 사람. 방향이 엇갈린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살아도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이 정말 적겠지...?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바야흐로 세계지리 시간에 배우고 또 배웠던 '지중해성 기후' 가 뭔지 체감하기 시작했다. 햇빛이 묘하게 다른것이..
구름이 없는 곳을 비집고 햇빛이 쏴아 내려와 건물을 내려쬐는 ... 햇빛의 동선을 읽을 수 있다고나 할까.
위에 올라가 전경을 내려다보니, 햇빛을 받고 있는 건물과 그렇지 않은 건물의 명암이 너무 확연해서 신기...
이스탄불의 뒷골목을 보고서야 아.. 이게 터키 구나 라고 실감했다.
여느 다른 도시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번잡한 도시화된 구역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달동네도 있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조심해야 할 구역은 번잡한 도시구역이구나.. 라는 감이 왔다.
가난한 달동네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던 걸 같이 내어준다.
문제는 관광객을 노리는 전문 사기꾼들인데 그들은 달동네엔 없다.
사는 모습은 달라도 도시 기본 구조와 사람들의 따뜻한 심성은 한국과 굉장히 비슷한 터키 이스탄불.
며칠을 이스탄불에 묵었을까.. 어느 날 밤, 이스탄불을 떠날 준비가 되었구나 싶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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