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만났던 유미 씨는 드라마 PD를 꿈꾸던 고등학생이었다. 수년이 흐른 지금은 의료 일선에서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한다. 드라마 PD와 간호사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 것인지 유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유미 안녕하세요. 간호사 유미입니다.
유미 씨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직업으로 본인을 소개했다. 이제 유미 씨의 삶에서 간호사는 빠질 수 없는 단어가 됐다.
유미 씨와 만난 어느 봄
유미 원래는 PD가 되고 싶었어.
Q.왜?
유미 학생 때는 재밌는 일을 하고 싶었어. 드라마 보는 것도 좋아하고 대본집 읽는 것도 너무너무 좋아했거든. 내가 드라마를 보면 행복하니깐 직접 기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었어.
Q.그런데 왜 간호학과에 가게 된 거야?
유미 수능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거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엄마가 먼저 간호학과 얘기를 꺼내더라. 나중에 결혼하고 애를 낳더라도 다시 일하기 괜찮을 것 같다고. 멀리 보신 거지. 또 지인의 딸이 간호사가 돼서 잘 다니는 걸 보니깐 괜찮다고 생각했나 봐. 나도 일리 있다고 생각해서 정시 원서를 전부 간호학과로 넣었어.
윤필 그렇게 하고 싶던 꿈이 있었는데,간호학과로 전부?
유미 전부. 근데 다 떨어져서 강제 재수했지. 사실 재수 기간에 흔들린 적도 있어. 9월 모의고사가 너무 잘 나온 거야. 그때 '간호사 말고 드라마 PD 할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 그랬는데 현역보다 점수가 더 안 나왔어. 결국 다시 간호학과. 간호학과에 가게 됐어. 지방으로. 난 솔직히 의료계에 큰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현실 때문에 간호사가 된 케이스야.
Q.그렇게 하고 싶었던 꿈이 한순간에 접어졌어?
유미 응. 성적이 안 나오니깐.
윤필 수능 이후에 현실의 벽을 체감했구나.
유미 성적표를 보고 엄청나게 울었어. 꿈이 좌절당한 기분이랄까. 내가 원하던 대학에 친구들이 하나둘 가는 걸 보니까 너무 부럽고 슬프더라고. 나도 한다고 했고 노력 안 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윤필 19살, 20살 그 어린 나이에 수능 하나를 보고 꿈을 접은 거잖아. 그게 너무 슬픈 거 같아.
유미 그때 내 학생부 활동 기록이 방송 계열 중심으로 되어 있었어. 당시에는 '돈 백만 원 받아도 좋아' '내가 하고 싶은 거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더라. 딱 성적표 받아 드니깐 난 안 되겠다 싶은 거야. 그 순간 아예 꺾여버렸어. 정말 한순간에.
윤필 나도 공감해. 사실 수능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도 아닌데 그때는 점수 하나가 인생을 가르는 기분이었어. 조금 더 나에 대해 고민해도 좋았을 텐데 아쉬워.
유미 그때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 오히려 주변에서 '너 성적으로 여기.' 이렇게 몰아쳤지. 내 인생의 중심은 나인데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깐 그냥 누가 하라 그러면 마음이 휘둘리는 거야. 그 사이에 애들은 하나둘 합격하고 나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윤필 맞아. 선생님이 내 성적표 보면서 갈 수 있는 대학 리스트를 뽑아 놓은 게 생각나. 심지어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학과까지 디테일하게 정해서.
유미 내가 간호학과 가겠다고 말했을 때 현명하다고 말씀도 하셨지.
Q.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PD와 간호사 사이는 너무 먼 것 같은데,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
유미 난 그때 내 인생이 밑바닥까지 왔다고 생각했어. 모든 게 불투명한 거야.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깐. 그래서 내 미래에 확신을 주고 싶었던 것 같아. 간호학과는 다른 학과보다는 취업이 수월한 편이잖아. '내가 성적 안 돼서 가고 싶은 길 못 가면 그냥 확실한 걸 택하자. 내가 가고 싶던 이름난 대학이 아니라도 우선 들어가자. 그리고 꼭 좋은 병원에 입사하자.' 그렇게 결심했지.
윤필 목표가 바뀐 거구나.
유미 고등학생 때는 대학을 봤다면 수능 이후로는 취업 생각만 했어. '내 인생 밑바닥까지 왔다. 무조건 서울 가야 한다.' 이 생각하면서 학점에 목숨 걸었어. 그래서 항상 전전긍긍. 조급해했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윤필 난 교수님이 너한테 낙엽 좀 밟으라고 했다는 게 너무 웃겼어. 그렇게 발랄할 수가 없는 애인데.
유미 솔직히 맨날 공부만 한 건 아니지만... 성적에 집착을 많이 했어. 친구들한테 예민하게 굴기도 했어. 만약에 조별 과제에서 제 역할을 안 했다? 그럼 불러.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거 해야 할 거 아냐?"
Q.그렇게 보낸 4년을 되짚어 보면 어땠어?
유미 후회 없었다.
윤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 멋있다.
유미 맨날 울었어. 성적 안 나올까 봐. 공부할 때는 1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치열하게 산 것 같아. 애들이 말하길, 쟤는 왜 옆을 안 보냐고. 앞만 보고 달린다고 경주마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 서울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컸지. 다시 돌아가서 하라면 절대 못 해. 너무 발악하고 살아서.
Q.그러고는 꿈에 그리던 병원에 합격하게 됐잖아. 입사하게 되었을 때 어땠어?
유미 정말 행복했어. 목표를 이룬 거니깐 정말 행복했고 그동안의 노력을 보상받는 기분이었어. 오죽하면 사원증도 목에 걸고 잤겠어. 아주 품고 다녔어.
윤필 이제 들어온 지 1년이 됐는데 입사 초기랑 변화가 있어?
유미 마음이 허해. 계속 허해. 6개월 정도 됐을 때 환상이 다 허물어지면서 마음이 공허해지더라고.
윤필 현실에 부딪혀서 그랬나?
유미 그런 것도 있지. 나도 도대체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대학생 때는 시험이라는 목표가 있으니 노력해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그게 곧 성취고 동기부여까지 됐단 말이야. 근데 여기서는 뭔가를 하면 그건 당연한 거고 못했을 때는 혼이 나. 만족감을 채울 수가 없는 거야. 성장하는 삶이 아니라 정체된 삶이라고 생각했어. 나도 도전하고 이루고 싶은데 도전이 없어.
윤필 간호사의 업무가 그럴 수도 있겠다. 간호사는 처방대로 일하는 거니깐.
유미 맞아. 능력을 인정받기가 어려워. 하면 하는 거고 못하면 일 못하는 간호사야. 성취감을 얻기가 힘든 것 같아. 그래서 B급 간호사라는 말까지 들었잖아.
윤필 그럼 나머지 6개월을 어떻게 버텼어?
유미 뭔가 해보려고 많이 노력했어. 병원 밖에서 친구들도 만나고 데이트도 해보고 동호회도 들어가 봤지. 학원도 다니고. 물론 코로나라 제약이 많았지만 계속 무언가를 하려고 했어. 병원 밖에서.
윤필 살려고 그런 거야.
유미 맞아. 살려고 그런 거지. 그러다 보니 1년이 지났네. 돌이켜보면 그냥 버틴 것 같아. 그런데 그마저도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못 했어. 인력이 부족하니깐 갑자기 불려 나가기도 하고. 영어 학원을 등록해도 가지를 못 했어. 하고 싶은 걸 못 하니깐 해결이 안 되더라고. 우울했어. 쉬어야 하는데 못 쉬니깐 정신적으로 힘들더라.
Q.그럼 계속 마음이 허한 상태로 일하고 있는 거야?
유미 그렇지. 한 3년 차가 되면 해소되지 않을까? 퇴사와 함께? 보통 대학원 진학이나 이직 조건이 경력 3년이거든. 근데 나는 퇴사하면 과연 행복할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 퇴사하면 하루 이틀은 좋겠지. 그런데 그 후엔 어떻게 먹고살지 또 고민해야 하니 힘들 것 같아. 돈 벌려면 숙명인 것 같아. 쉽게 벌 수 있는 게 아니니깐.
윤필 어렸을 때는 꿈, 좋아하는 일을 많이 생각했는데 이제는 현실을 생각하는구나.
유미 그러네. 돈 버는 건, 하고 싶은 일이 아니어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겠지. 대신 그 사람은 나름대로 스트레스받으면서 좋아하는 것을 잃을 수도 있겠지? 모르겠다. 난 돈 벌려고 하는 거야. 부모님이랑 좋은 곳에서 여유 있게 시간도 보내고 그러고 싶어서.
윤필 그럼 계속 버티는 건가?
유미 버틸 수밖에 없어. 간호밖에 배운 게 없으니 달리 갈 곳도 없고.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도 이런 고민을 하더라고. 사회초년생들이 하는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아.
Q.너무 우울한 얘기만 했나? 그래도 병원에 들어가서 좋은 점도 있을 텐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야?
유미 나 알아주는 환자 있을 때? 장기 입원해 계신 환자분이 "선생님이 있을 때가 제일 좋아요." 해주셨는데 그때 기쁘더라.
윤필 너의 노력을 알아줘서?
유미 노력을 알아준다기보단 그냥 반가워해 주니깐 좋았어. 그 외엔 서울에 살고 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사고 싶은 게 생기면 살 수 있다? 끝.
윤필 끝?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유미 음. 여름이었나? 대학생 때 친구들이랑 병원 근처를 온 적이 있어. 그때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생각했었거든. 근데 지금은 거기를 따릉이 타고 달리고 있네? 추리닝 바람으로 커피 사 먹겠다고 그러고 있는 거야. 그때 '나 성공했네!' 하면서 한번 뿌듯했어.
Q.서울이 너한테는 큰 의미였구나. 대입 때의 아쉬움 때문일까?
유미 서울=성공.
내 편견이지만 서울엔 성공한 삶이 있는 것 같아. 근데 그렇게 동경했던 삶인데 막상 살아보니 별거 없더라. 거기서 또 허탈함을 느꼈지.
윤필 만약 서울권이 안됐다면?
유미 무조건 재도전했을 거야. 심지어 난 우리 병원만 붙었으니깐. 아마 안 됐다면 너무 우울했겠지? '4년 동안 이렇게 노력했는데 나를 받아주는 병원은 없네' 하면서 우울했을 거야.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감사한 일이다.
Q.아까 버틴다고 말했지? 그럼, 일을 계속하려면 동기가 필요하잖아. 그런 동기를 어디서 부여받고 있어?
유미 맞아! 그게 진짜 내 고민이야. 지금은 돈을 쓰면서 동기를 부여받는 것 같은데 이것도 입사 초기라 그렇지, 갈수록 동기부여가 안 돼. 그러면 그때는 뭘 위해서 일을 해야 하나 그걸 고민하고 있었어.
윤필 소비로 일의 추진력을 얻는 데도 한계가 있지.
유미 맞아. 이제는 사고 싶은 것도 없어. 어느 시점이 지나니깐 딱히 살 게 없어. 초반에는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돈을 많이 썼어. 이제는 돈 쓰는 게... 3분의 1을 적게 쓰더라고? 먹는 것도 그 맛이 그 맛이고.
윤필 소비의 즐거움도 점점 줄어들고.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취미로 눈을 돌렸구나.
유미 배우고 싶은 건 많은데 하질 못하고 있어. 노래도 배우고 싶고 동양화도 배우고 싶고. 근데 또 코로나를 조심해야 하는 직종이니깐 가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는 좌절해.
Q.직장 밖에서 일의 원동력을 찾고 있구나? 직장 내에서 동기부여 요소는 아직 못 찾은 거야?
유미 아예 못 찾았어. 못 찾을 것 같아.
윤필 시도를 해봤는데 영 아니야?
유미 시도해봤지. 늘 환자한테 잘하자, 결심하면서 출근을 해. 근데 환자 열댓 명 보고 나면 무너지는 거야. 시간이 갈수록 몸 하나로는 벅찬 수준인 걸 느껴. 그럴 때 너무 화가 나. 그런데 환자들 입장에서는 '왜 나 한 번 더 안 봐주냐' '너 하는 게 뭐냐' '앉아서 쉬고 있냐'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지. 차트 정리하고 인계하느라 바쁜데 앉아서 쉬는 줄 오해하시고. 그러면 회의감이 드는 거야. 출근할 때는 잘 챙겨야지, 친절하게 해야지 생각하고 오는데 자꾸 현실에 부딪혀.
윤필 의지가 자꾸 꺾인다는 거구나. 동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거나 승진하거나 그런 거는?
유미 있지. 근데 능력을 인정받고 싶단 생각이 안 들어.
윤필 왜 안 들까?
유미 여기에 큰 뜻을 품은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가? 간호사로 크게 성장해서 수간호사가 돼야겠다든지 그런 꿈이 없어. 난 그냥 '여기 들어와야지' 그게 끝이었어. 그래서 무너진 거야. 선배 간호사들은 간호 신념이 있대. 근데 난 신념이 없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너는 왜 환자들을 궁금해하지 않냐는 말을 많이 해. 난 원래 성격 자체가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편이거든. 근데 이 일을 하려면 환자에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해. 물론 환자에 관한 공부가 부족해서 혼날 때는 그 순간 다짐하기도 하는데 집에 오면 피곤해서 공부할 수가 없어. 공부하려고 두꺼운 책도 사고 노트도 샀는데 제대로 해보질 못 했어. 답이 없지?
윤필 책도 사고 노트도 샀는데 의지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신념, 애정이 없으면 출근할 때마다 힘들 것 같아. 어떤 마음으로 다니고 있는 거야?
유미 학교에 출석 도장 찍듯이? 그렇게 다니는 것 같아. 돈 벌어야지.
윤필 정말 하루하루 살고 있구나?
유미 하루 살이지.
윤필 왜 큰 뜻이 생기지 않을까? 언제든 떠날 마음을 갖고 있어?
유미 솔직히 오래 일하고 싶어. 정말 오고 싶었던 병원이고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병원이잖아. 그러니깐 나도 오래 다니고 싶거든.
윤필 오! 근데?
유미 그냥 여기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 옛날처럼 간절하지 않아.
윤필 복잡한 마음이네. 왜 그럴까?
유미 그래서 엄마랑 얘기를 해봤어. 왜 이렇게 내가 밖으로 나돌까? 그러다가 생각이 들었어. 원래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닐까. 만약 내가 드라마 PD가 됐다면, 하고 싶은 일 한다는 생각에 쉬는 날에도 열심히 공부했을 것 같거든. 그런데 지금 일은 단순히 일로 치부해 버리는 거야. 돈벌이는 돈벌이고 노는 건 노는 거고. 그래서 휴일에 병원에서 연락이 오면 정말 괴롭더라. 일하고 집에 가서 아무 생각 안 하고 싶은데 또 연락이 와. 코로나 때문에 나오래. 나 쉬어야 하는데.
윤필 휴일에 연락 오는 걸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더군다나 너는 늘 오버타임으로 일하고 퇴근하잖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대단해.
유미 그런가? 사실, 이 얘기하면 친구들은 변명 좀 그만하라고 하는데... 열심히 하다 보면... 너무 열심히 하면 그만두고 싶을까 봐. 지칠까 봐. 그래서 항상 이번 한 달만 잘 넘겨보자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것 같아. 출근 도장 찍으면서. 물론 환자들한테 소홀하면 안 되지.
윤필 하루하루 버티는 마음.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 같아. 그럼 가까운 미래에 대한 계획은 생각해 봤어?
유미 이게 목표가 없으니깐 더 그런 것 같아. 아마 3년 차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그게 내 전환점이 될 것 같아. 다들 마의 3년이라고 하거든.
Q.3년 뒤에도 계속 다닐 의향이 있어?
유미 반반이야. 그만두더라도 뭘 할지 몰라서 계속 고민 중이야. 딱히 다른 병원으로 갈 마음도 없고 계속 간호사를 할 거라면 이 병원에 있는 게 낫지. 난 새로운 도전하는 거 너무 좋아하지만, 지금까지 배운 게 간호니깐 갑자기 생뚱맞게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거나 그러고 싶진 않아. 아! 맞다, 목표 중의 하나가 대학원 가는 거야. 대학원에 가면 더 생기가 있지 않을까? 또 뭐가 있을까. 우리 쪽 계열은 공무원을 많이 하기도 해. 근데 난 공무원이 되고 싶진 않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하고 싶거든. 인계 주는 일이 너무 힘들더라고. 했니, 안 했니 얼굴 붉히면서 동료랑 얘기하는 건 나랑 안 맞아. 성향에 따라 이직 방향이 달라지는 것 같아.
미래 얘기를 하니 유미 씨의 얼굴에 약간의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톤도 조금 밝아졌다. 계획이 없다고 말은 했지만 역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질문을 조금 더 해보기로 했다.
유미 씨가 찍은 캐나다
Q.그럼 이직한다면 어떤 쪽으로 하고 싶어?
유미 원래 신입생 때만 해도 미군 간호사를 하고 싶었어. 영어를 하면 만족감이 생기더라고? 언제는 캐나다에 갔는데 외국 친구들이랑 말이 잘 통하니깐 너무 행복한 거야. 회화반도 높은 반으로 배정받고. 노력해서 인정받으니깐 기쁘더라고. 그래서 외국에서 간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캐나다에서 한 달 동안 있어 보니깐 외로울 것 같더라. 그래서 한국에서 영어를 쓰면서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찾아보니깐 미군 기지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있더라고. 거기는 시스템 자체가 미국이어서 오버타임도 없고 일하는 환경도 괜찮대. 지금은 영어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자연스레 꿈이 접어지긴 했어. 최근에 SNS에서 미군 간호사 게시물을 우연히 봤는데 신입생 시절이 떠올라서 기분이 묘하더라.
윤필 오. 중요한 얘기인 것 같은데? 이 계열 내에서 뭔가를 꿈꿔봤다는 거잖아.
유미 그런가? 생각해 보니 내가 병원에서 눈이 반짝거리던 순간이 있었는데, 우리 병원에 외국인이 온다는 거야. 그럼 내가 맡을 수도 있잖아. 평소에는 힘들어서 기숙사 오면 바로 쉬는데 그날은 어떻게 얘기할지 3시간 동안 공부를 했어. 룸메이트가 웬일로 그러냐고 묻더라. 내일 외국인 환자 볼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내 눈이 그렇게 반짝거리는 건 처음 봤대.
윤필 고등학생 때는 영어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잖아. 어떻게 된 거야? 힘들어하던 영어를 즐기게 됐다니, 너무 대단해.
유미 캐나다의 영향이 큰 것 같아. 그전까지는 자신감이 없었는데 캐나다에서 성취감을 느꼈어. 나날이 실력이 늘면서 자신감도 붙고. 그리고 부모님이 지원을 많이 해주셨어. 학원비도 내주시고 응원도 해주시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 말을 계속하면서 노력하니깐 되더라. 완전한 프리토킹은 아니더라도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지.
윤필 눈을 반짝였다는 순간이 딱 그때라 하니 의미 있게 생각해 볼 만한 것 같아.
유미 그렇지? 국제 간호 쪽 일을 하려면 영어를 정말 잘해야 해. 근데 공부할 여유가 안 돼서 계속 못 하고 있어.
윤필 현실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꿈이 무뎌지는 것 같아.
유미 맞아.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있으면 나도 이 좀비 소굴에서 똑같은 좀비가 될 것 같아. 능력이 있으면 탈출할 수 있겠지? 노력해야겠어.
윤필 좀비 비유라니 웃기면서도 슬프다.
유미 요즘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아서. 흘러가는 대로 사는 느낌?
윤필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어?
유미 응. 근데 난 그게 싫어.
윤필 오늘 들어보니깐 넌 절대 흘러가는 대로 살 것 같지 않아.
유미 그럴까?
Q.마지막으로 질문할게. B급 간호사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잖아. 그러면 네가 생각하는 A급 간호사는 뭐야?
유미 없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
윤필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야. 본인만의 이상적인 간호사 기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단호한 대답이네.
유미 이상적인 간호사? 글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까. 항상 친절하고 응급 처치 잘하고 화내지 않고 동료랑 잘 지내고? 글쎄 난 그런 사람 못 봤다~ 일 잘하면 성격이 지랄이고 환자한테 잘하면 동료한테 거지 같고. 다들 하나씩은 결여되어있더라고. 얼마 전에 정말 일 잘하는 어떤 간호사가 그만둔다고 했거든? 근데 간다니깐 다들 앗싸 외치면서 속 시원하다고 하더라고. 슬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반대로 좋은 동료가 떠난다고 하면 누군가 울어주기도 해. 그럴 때 많이 생각해. 환자에게도, 동료에게도 잘하자.
Q.인터뷰해 보니 어떤 것 같아? 우리 잘 살 수 있을까?
유미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내 인생을 이렇게 되짚어 본 날이 있었나 싶어. 다시 인생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윤필 나도 그래. 우리 행복하게 살자.
유미 씨는 A급 간호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 기준만은 갖고 있는 것 같다. 환자와 동료에게 최선을 다하는 간호사. 이런 어렵고 멋진 기준을 갖고 있으니 A급 간호사는 없다고 답한 듯하다. 어쩌면 유미 씨는 누구보다도 이 일을 잘 해내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
사실 이 인터뷰를 기획하며 내가 그린 청년의 이미지는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예상과 달랐다. 취업해도 여전히 방황하고 망설이는, 그냥 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곱씹어 보니 이게 진짜 청년의 민낯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멋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게 대단해 보였다. 일에 의지가 없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느껴졌다.
흘러가는 삶을 싫어하지만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며 낙담하던 유미 씨. 글쎄. 내가 보기에 그녀는 흘러가는 삶을 경계하며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다. 지난날, 실의에 빠진 친구 한 명을 구한 사실을 기억할까? 한 달 만에 일을 그만두고 씁쓸한 표정을 짓던 나에게 유미 씨는 말했다.
"네가 다른 곳에 갈 능력이 되니깐 그만둘 수 있는 거야. 난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못해."
의지박약이라 고통스러워했던 나는 한순간에 능력자가 되어있었다. 유약한 나를 위로하던 그 순간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머물러 있다. 능력이 없어 그만두지 못한다는 그녀의 말을, 난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단단한 의지와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나은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유미 씨의 삶이 너무도 대단해 보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