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필 Sep 25. 2023

서초동 변호사 말고 가을 씨 (2)

윤필의 주변인 인터뷰 프로젝트

윤필  그러면 너는 자신감이 많이 차 있는 상태로 입학했겠다. 여태까지는 원하는 만큼 결과가 따라줬으니깐.

      

가을  대학 때는 공부한 거에 비해서 잘 나오는 편이었으니깐 그랬지. 근데 여기서는 얄짤없어. C+이 나왔다니깐. 공부 열심히 했는데 너무 충격이었어. 다들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씩 있더라고. 누구는 집안 문제, 누구는 오랜 꿈이어서. 누구는 장학금 타려고. 다들 간절한 동기가 있어. 그런 애들이 열심히 하는 걸 누가 막겠어. 나도 열심히 해야 하는 거지. 그냥.  

    

윤필  아유 힘들다. 공부하는 거 대단해.     


가을  그런가? 근데 생각해 보면 공부가 제일 쉬운 거 같아. 책임감이 덜하고 주어진 거 하면 되니깐. 오늘 공부 안 하면 미래의 내가 책임지는 거지.     


윤필  그래도 앉아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흔들릴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     


가을  당장은 하루하루 공부하는 성취감이지. 근데 그건 내가 여기서 찾은 정신 건강 비법이고... 일단 나를 증명하고 싶다는 거랑. 또 뭐가 있을까. 예전부터 나는 혼자 공부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이 있었어. 학원이나 과외 없이. 여기 와서도 마찬가지야. 솔직히 지금까지도 책을 한 번도 마음껏 사본 적이 없어. 남들과는 출발점이 다른 거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하고 싶다. 그게 나한테는 가장 큰 동기부여인 것 같아.    

  

윤필  어찌 보면 핸디캡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오히려 너를 일으켜 세우는구나. 멋지다.    

 

가을  건강할 땐 이게 동기부여가 되는데 이런 마음이 나빠지면 ‘아 이런 환경 때문에 내가 못 하는 거야’ 이렇게 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망해. 남 탓하면 망할 수밖에 없어. 스스로 어화둥둥 해야 하고 나는 이런 환경에 있지만 이만큼 해낼 수 있어. 이런 생각으로.     


윤필  역시 건강하네. 나는 솔직히 남 탓, 주변 탓 많이 해. 지금 말 듣고 반성했어.      


가을  고등학생 때는 이런 동기부여가 잘 됐어. 그때는 애들이 대부분 다 사교육을 받던 시기였잖아. 아무래도 요즘은 그때보다는 덜 하지.

     

윤필  그게 쉽지 않은데 대단하다. 사실 성취하는 데 실패하고 그런 경험이 누적되다 보면 사회에 불만 가득한 사람이 되기 십상이잖아. 근데 너는 노력으로 그걸 정면 돌파해 온 거니깐. 나도 처지 비관 그만해야겠다.

     

가을  갈수록 처지를 바꾸는 게 어렵긴 해. 어른들이 어렸을 때 열심히 하라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물론 그렇다고 지금부터 희망을 버릴 이유는 없지.     


윤필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해본 거니깐.     


가을  당연하지. 그리고 성취하는 것 말고도 세상에 행복한 일이 많잖아. 성적순으로 행복한 게 아니니깐.


윤필  대화하면서 느꼈는데 스스로 불만족스러운 게, 네가 원하는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해서 그런 거잖아.

   

가을  그렇지. 아무도 안 주는 압박을 혼자..     


윤필  그동안 계속 잘 해왔으니깐 자신에게 거는 기대치가 높은 거야. 지금은 힘들겠지만 잘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가을  이제는 진짜인 거야. 대충해서는 안 되는 학문이니깐. 열심히 해야지.          


윤필  그럼 이 길로 접어든 걸 후회한 적도 있어?     


가을  막상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신기하지? 처음에는 정말 불확실한 마음으로 왔어. 이게 맞나 하면서. 지금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길에 확신만 커져. 정말 다행이지. 대학생 때 불면에 시달리며 실컷 고민한 결과니깐 그때 내 선택을 믿어주려고 하는 것 같아. 다만 더 좋은 로스쿨에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고.  


윤필  그게 장래에 영향을 많이 미치니깐 그런 거지?     


가을  소위 말하는 ‘SKY’ 로스쿨 아니고서는 비슷하긴 한데 스카이면 정말 다른 삶을 살거든. 빅로펌 인턴도 하고. 출발이 좀 다르지. 근데 빅로펌 같은 곳은 내가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윤필  안 맞아서?     


가을  응. 최근에 실무 나간 곳에서도 너무 바빠서 일하는 동안 핸드폰 한 번 볼 새가 없더라. 근데 이걸 저녁 먹고 또 하고 새벽에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깐 너무 싫은 거야.


윤필  역시 돈을 많이 받는 데는 이유가 있어.     


가을  맞아. 근데 난 그렇게 하고 싶진 않더라고. 물론 합리화일 수도 있어.


윤필  이번에 실무 나간 곳 얘기가 궁금해. 어땠어? 그 환경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거잖아.     


가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거. 사실 살면서 고소할 일이 별로 없잖아. 생겼다면 정말 큰 일인 거지. 근데 나는 이게 업무인 거니깐 6시 퇴근이라고 끝난 게 아닌 거야.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한 직업이라고 느꼈어.      


윤필  인생을 가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보니.     


가을  응. 그게 가장 무서웠어. 근데 변호사님들은 의연하게 하시더라. 업무에 과몰입하지 않는 것, 그것까지가 능력인 것 같아.      


윤필  병원에서 사람 죽는 게 일상인 것처럼.     


가을  맞아. 출퇴근도 시간대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 어느 날은 안 나오기도 하고 늦게 오기도 하고. 그런 업무 환경을 보니깐 스스로 엄격하게 통제해야 하는 직업이구나 다시 한번 느꼈어.     


윤필  두려움이 더 컸어, 기대감이 더 컸어?     


가을 완전 반반이야. 근데 그 기대감이 업무와 잘 맞겠다는 그런 종류의 기대감이 아니라 돈에 대한 기대감이야. 어떤 의뢰인이 직장인 한 달 월급 웃도는 수임료를 한 번에 내는 걸 보고 좀 놀랐어. 물론 일이 엄중한 만큼 책임이 크게 따르겠지.    

 

윤필  긍정적인 것 같아.

    

가을  나? 왜?     


윤필  일이 힘들고 중압감을 느낀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한 보상으로 또 기대감이 생겼다고 하니깐.     


가을  그런가? 사실 변호사 업무의 핵심은 글쓰기라 일 자체는 할 만한 것 같아. 일종의 백지를 채우는 개념이거든. 이번에 거기서 성범죄 피고인 입장에서 글을 썼었어. 어쨌든 범죄자도 받을 만큼의 벌을 받아야 하니깐 필요한 일이지. 근데 성범죄자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당장은 일을 골라서 할 수 없겠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그렇겠지? 난 정부에 관심이 많아서 행정 심판 이런 걸 하고 싶어. 기관이랑 다투는 거니깐 분야만 잘 선택하면 글 쓰는 문제거든. 그러면 하는 것 자체는 크게 스트레스가 없을 것 같아.     


윤필  실무 경험이 굉장히 도움이 된 거 같네.     


가을  규모가 큰 로펌이 아니다 보니 당장 몇 년 뒤의 현실을 본 느낌? 도움이 많이 됐지.            

   

윤필  그럼, 미래의 너를 떠올렸을 때 어떤 법조인이 되어 있을 것 같아? 딱 떠오르는 모습.     


가을  어느 정도의 미래?     


윤필  변호사가 되었다고 했을 때 너의 모습?     


가을  한 5년 후에는 일 자체를 어렵지 않게 하고 나만의 전문 분야가 있는 거야. 아! 편하면서 예쁜 정장을 입고 있어야 해. 그렇게 또각또각 출근하면 동료들도 다 좋은 동료들이야. 내 또래의. 오전부터 일 생각 안 하고 점심 뭐 먹지... 아냐 아냐! 열심히 해야 해! 맛있는 점심을 먹고 재판을 가. 물론 내 차를 타고! "판사님 무죄입니다! 이 자를 무죄로!" 어필해. 승소하고 기일이 종료돼. 의뢰인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감사 인사를 하고 뿌듯해 스스로. 저녁엔 사람을 만나. 그리고 집에 가. 난 워커 홀릭이니깐 좀 더 일해. 중간에 브이로그도 찍어. 잠을 안 자. 그리고... 음... 그렇게 살면 좋을 것 같아.       


윤필  뭔가 공감 간다.   

  

가을  조건이 많지?     


윤필  얘기를 들어보니 이 길을 선택한 걸 진짜 후회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야.     


가을  오랜 꿈이 아니어서 그런가? 오히려 기대를 많이 안 했기 때문에 더 행복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 그리고 난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거든. 사내 변호사도 하고 싶고 정부 기관에서도 일하고 싶어. 내 성격상 한 곳에 3년만 있어도 질릴 것 같아. 그런 면에서 변호사란 직업이 참 좋아.     


윤필  환경 일도 해야지. 요즘엔 많이 생각 안 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환경 쪽 일은 계속하고 싶은 거지?     


가을  하고 싶긴 해. 당장은 아니고 한 10년 뒤? 일단 졸업하고는 서초동에서 3년 정도 송무를 배우겠지? 변호사 업무의 본질이 송무니깐. 그걸 잘해야 어딜 가든 실력 있는 변호사로 인정받을 수 있어. 근데 솔직히 말하면... 별로 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해야겠지. 3년 정도는 해야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경력이 생기니깐.


윤필  버텨야겠구나.  

   

가을  맞아. 변호사 시험 끝나면 좋은 로펌 가는 것도 준비해야 하니깐 그것도 일이고. 계속해서 나를 증명해야 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내 꿈이 실현될지는 미지수지만... 그래서 좀 더 기대되는 것 같아. 나중에 국회 쪽에서 법을 만들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일선으로 운동하는 쪽에 갈 수도 있으니깐.   

 

  

윤필  오늘 들어보니 역시, 하고 싶은 걸 뒤로 미룬 게 아니라 그걸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


가을  그런가? 근데 먼 목표를 가지고 지금 동기부여 하는 게 힘든 것 같아. 시간의 간극이 너무 커.  

   

윤필  수련하는 과정인가 봐.  

    

가을  맞아. 완전 수련 중이야. 그래서 혼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해’ 이런 생각 많이 하지.          


윤필  지금 환경 일을 하는 사람이 소수이잖아. 그걸 이루기도 힘들 수도 있고 그 꿈을 향해가다가 목표를 잃어버릴 수도 있잖아. 그런 생각 한 적 있어?     


가을 정말 많이 했지. 일단 로스쿨 와서 1학년에서 2학년 올라가는 시기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점점 내가 돈을 벌 나이가 되니깐 돈도 너무 중요하고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있고.     


윤필  그래서 계속 경계하는 거야?


가을  경계해야지. 요즘 ‘고인 물’이란 표현 많이 쓰잖아. 난 사람은 고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면 생각이 썩어. 난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정말 싫어. 물론 한 분야의 일을 오래 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고였다고 볼 순 없지. 어쨌든 갈수록 그 선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매몰되지 않고 고이지 않는 것.     


윤필  고인다는 건 어떤 의미야? 되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게 있어?     


가을  본인의 생각이 있는 건 좋아. 근데 자기 말만 맞다고 하는 사람들 있잖아. 정말 추하더라고. 나도 그런 어른이 될까 봐, 어떤 가치만 맹목적으로 좇는 그런 어른이 될까 봐 두려워.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그런 어른이 되는 게 꿈이기도 하잖아. 자기 분야에서 자리 잡고 할 말 다 하고 목소리 큰. 그런 거 생각하면 참 어려워.     


윤필  새삼스럽지만 내 친구가 변호사가 된다는 게, 너무 신기한 것 같아.  

   

가을  너무 웃기지 않아? 내가 변호사가 된다니! 누가 날 믿고 사건을 줘. 나도 날 못 믿겠는데.     


윤필  진짜 학생 때부터 봐서 그런가 상상이 잘 안 되긴 한다. 그래도 될 거잖아!


  

윤필  자, 이제 드디어 마지막 질문이다. 넌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어?     


가을  난 실력 있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 착한 변호사, 인상적인 변호사 말고 실력 있는 변호사. 난 그게 착한 것 같아. 싸가지는 없어도 실력은 있어야 해.      


윤필  난 공익 얘기할 줄 알았는데.     


가을  공익에 대해 말할수록 실력이 있어야 해. 실력 없으면 아무런 힘이 없어. 난 문제를 해결하고 싶거든. 완전히, 확실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그냥 허황되게 길에서 외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 일을 하려면 오히려 현실주의자가 되는 게 맞는 것 같아.      


윤필  진심이네.


가을  정말. 진심이네. 나, 까먹고 있었네.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서점에 들렀다. 찬찬히 둘러보다가 한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   

  

가을 씨가 떠올랐다. 인터뷰 내내 그녀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함께 떠오른다.      


‘건강하다’      


우스갯소리처럼 반복적으로 했던 그 말. 근데 정말, 진심으로, 건강한 마음을 가진 가을 씨가 부러웠다. 마음 그릇이 갈수록 작아져 고민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가을 씨는 참으로 단단하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로스쿨에 왔다는 이 사람. 이렇게 수단이란 표현이 멋있었던 적이 있었나? 이런 멋진 사람의 꿈을 감히 수단이라는 단어로 깎아내려도 되나 싶다.


요즘 자신과의 싸움에서 매일 진다고 했지만 오늘도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계속 도전하는 사람, 돈을 많이 벌고 싶지만 돈 못 버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이 아이러니한 사람. 노력이란 단어를 믿고 숱한 어려움을 이겨낸 그런 사람.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 형태가 변호사가 아닐지라도 가을 씨는 무엇이든 해낼 사람이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서초동 변호사 말고 가을 씨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