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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 해월 씨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

윤필의 주변인 인터뷰 프로젝트

by 윤필

9월의 어느 날, 회계사가 되어 금의환향한 친구 해월 씨를 만났다. 지갑 속을 뒤적이더니 딱 하나 남은 명함을 건네주는 해월 씨. 명함을 받아 드니 이름 옆에 예상치 못한 수식어가 하나 붙어있었다. 바로 ‘수습’이란 단어.


세월의 흔적이 가득해 보이는 명함과 다르게, 그녀는 입사한 지 갓 1년이 된 수습 회계사다. 국내 4대 회계 법인 중 한 곳에서 재직 중이며 은행 팀에 속해있다. 알아주는 직장에, 그럴듯한 업무에 멋짐이 가득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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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 어떻게 하다가 회계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해월 내가 국어국문학과를 전공 했잖아. 1년 다녀보니깐 알겠더라. 학문으로 배우는 건 역시 다르구나. 그리고 글 잘 쓰는 친구들이 너무 많은 거야.


윤필 맞아. 글 잘 쓰는 사람 많지.


해월 대학교 1학년 때 필수 교양으로 글쓰기 수업 같은 거 듣잖아. 내가 신입생 때 그 수업이 상대 평가였어. 한 반에 30명 정도? 점수 따기가 너무 힘든 거야. 다들 글을 엄청 잘 쓰고, 무엇보다 글쓰기에 진심이야. 자연스럽게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 뒤로 경영학과 이중 전공을 했고 한 학기 듣다가 네덜란드로 교환학생을 갔어. 거기서 생각을 많이 했지.


윤필 다양한 경험을 많이 했네?


해월 그런가? 교환학생 가서는 정말 쉬기만 했어. 거기서 생각을 많이 하면서 느낀 게,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어. 직장 말고 직업. 언제든 자유롭게 거취를 옮길 수 있는 뒷배경이 필요한데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봤지. 그래도 숫자로 공부하는 거 좋아했으니깐 회계사가 맞지 않을까 싶더라.


윤필 맞아. 평생직장은 없으니깐. 혼자 있어서 그랬나? 생각을 많이 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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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그때 현지인이 많이 사는 한적한 동네에서 지냈어. 한 시간에 한 번씩 바로 앞 교회에서 종이 울리고 길가에 소랑 양이 있고 그런 곳이었어. 창문 앞에 앉아서 하늘 보면서 생각 좀 했지.


윤필 마음 먹기 따라 힐링일 수도 있고 우울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해월 한국에서 늘 꽉 채운 삶을 살다가 한 번 그러니깐 좋더라. 그때는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으니깐.


윤필 즐기자, 이런 마음으로?


해월 응. 맞아.


윤필 근데 왜 네덜란드를 선택했어?


해월 그나마 물가가 안정적이고 다인종 국가여서 인종 차별이 조금 덜 하지 않을까 싶어서.


윤필 네덜란드어 따로 있지 않아?


해월 다 영어를 잘하더라. 내가 간 학교는 한국학과가 있는 곳이었어. 한국학과 동아리도 했었는데 거기 친구들은 영어, 네덜란드어, 한국어 세 개를 섞어서 쓰더라고.


윤필 좋은 기억으로 남았어?


해월 가서 탈춤 동아리 이런 것도 하고... 공부 빼고 다 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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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 국문과 가서 회계사 될 생각도 하고. 여러 고민이 많았네. 학과 공부가 잘 안 맞았어?


해월 어학은 재밌었어. 근데 현대 문학이 너무 안 맞더라고. 그것 때문에 과 공부를 접은 게 커. 교수님이 ‘내가 읽었을 때 마음에 안 들면 등단 못 한다’ 이렇게 말해. 교수를 할 정도니깐 학계에서 권위가 있는 분이지. 그런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의미가 있나 싶더라. 재미가 없었어.


윤필 아무래도 문학은 취향 차이가 좀 있지. 수학처럼 딱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국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뭐였어?


해월 솔직히 그땐 성적 맞춰서 간 거였어. 얼마 전에 생활기록부를 확인해 봤거든? 직업 희망란을 보니깐 다 광고 쪽으로 써놨더라고. 광고 기획자. 그거랑 가까운 학과를 고르다 보니 국문과를 선택한 것 같아.


윤필 광고 쪽은 생각 안 해봤어?


해월 했지. 교환 가기 직전에 광고 동아리를 했었어. 그때 준비하던 PT가 있었는데 거의 한 달 동안 팀원들이랑 밤새가며 열심히 했어. 근데 결과가 안 좋았어. 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맞더라. 생각보다 보람이 없었어. 그 과정을 겪어보니깐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싶은 거지.


윤필 한 작품을 함께 만드는 게 쉽지 않더라.


해월 맞아. 광고는 창의력이 중요한 줄 알았는데 로직을 세우는 단계가 굉장히 중요하더라고. 어려웠어.


윤필 학생 때 광고나 방송 분야 관심 갖는 친구들 많잖아. 나도 그중 하나였거든? 근데 팀플 한 번 하면 정신 차리게 되는 것 같아.


해월 맞아. 팀플이 메인이야.


윤필 그렇게 광고 기획자의 꿈은 멀어지고... 회계사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 것 같은데.


해월 취업?


윤필 취업이나 다른 전문 자격증도 있고. 변호사 같은?


해월 난 법조계는 단 한 번도 관심 가진 적 없어. 그건 정말 선택지에 없었어. 3년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돈 안 버는 상태에서 뭘 하는 거에 질렸어.


윤필 맞아. 수험 생활은 경제적인 게 늘 부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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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내가 학교 다닐 때 취업 특강을 많이 들었거든. 경력개발센터에서 하는 직무 특강 이런 거. 정말 할 게 없더라. 하고 싶은 게 없는 거야. 그나마 내가 관심 있는 건 재무, 회계 이런 건데.


윤필 경영학 공부하면서 재무나 회계 쪽이 잘 맞다는 걸 알게 된 거야?


해월 응. 근데 그게 있어. 분야는 좀 다르긴 한데, 내가 고등학생 때 수학을 좋아했어. 처음 1학년 때는 수학 내신 5등급으로 시작했거든. 근데 겨울방학 때 혼자 열심히 해서 2학년 때 2등급까지 올렸어.


윤필 우와, 멋지다.


해월 그때 느낀 성취감 때문인 것 같아. 노력해서 이뤄내니깐 ‘오 숫자 괜찮은데?’ 딱 좋은 느낌만 남은 거야. 그 뒤에도 숫자가 있는 공부는 좋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올 수 있지 않았나 싶어.


윤필 신기하네. 세무 쪽은 관심 없었어?


해월 회계사랑 세무사랑 시험 과목이 비슷하거든. 그래서 할 거면 더 어렵게 가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지.


윤필 멋지네. 어쨌든 시험을 준비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해월 언제든 쉬고 싶으면 떠날 수 있는, 그리고 돌아올 곳이 있는. 그런 걸 원했던 것 같아.


윤필 안정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해월 응. 어렸을 때부터 공무원 하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어. 근데 공무원도 참, 되기 어려운데 공부하고 투자한 거에 비하면 보수가 아쉬운 것 같아. 솔직히 사명감도 별로 없어.



다음 편에 계속.



덧말+ 아름다운 사진에는 해월 씨의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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