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의 주변인 인터뷰 프로젝트
지아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들이 궁금하더라. 선생님이 됐으면 어땠을까, 편집자 공부를 했다면 뭘 하고 있을까. 지금 회사에 지원을 안 했으면? 이건 진짜 너무 궁금한데? 대학생 때 창업 좀 해볼걸.
윤필 편집자 쪽으로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아 그쪽으로 갔으면 지금도 공부하고 있으려나? 가끔 궁금하긴 해. 지금보다 물질적으로는 아쉬웠을 것 같은데 정신적으로 더 풍요로웠을까?
윤필 두 가지가 항상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지아 맞아. 사실 알 수 없는 거잖아. 그쪽으로 갔는데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상태일 수도 있는 거고. 알 수 없어서 재밌는 것 같아. 순간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무튼 내가 쉽게 회사에 들어간 건 아니었으니깐 이대로 나오긴 아까웠던 것 같아.
윤필 그랬는데 옮긴 지 1년 다 되어 가네.
지아 맞아. 옮긴 것도 그렇고 이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입사한 지 3년이거든.
윤필 아까 경력이 쌓이고 있는 건지 고민이 많다 했잖아.
지아 업무 자체가 엄청난 전문성이 필요한 건 아니다 보니 고민이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 고민을 진급 뒤로 미뤄 놓고 있어. 생각하기 너무 싫지만 어떻게 할지 정하긴 해야 해. 사실 지금 있는 곳에서 아주 일부만 경험해 본 거잖아. 거만한 생각일 수도 있지.
윤필 전문성을 굉장히 많이 언급하는데.
지아 대체 인력이 되고 싶지 않아.
윤필 어디든 갈 수 있는?
지아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이 와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싫지. 그러려면 전문직이 되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윤필 성취감이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지아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불안감. 사기업이라 성과주의가 심해. 실제로 팀장이나 임원들이 하루아침에 잘리는 걸 여러 번 봤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내가 조금만 전문성이 없어도 나를 대체할 젊은 인력은 많은데 내가 이대로 있어도 되나 하면서. 공기업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공기업이나 공무원 쪽으론 가고 싶지 않아.
윤필 일을 열심히 하네. 월급 루팡이 아니네.
지아 월루는 아닌 것 같아. 진짜. 월루는 아니야.
윤필 월루 아니야. 대화하면서 느꼈어. 넌 월루가 아니야! 확실해! 심지어 일에 열정이 있잖아. 내가 경험한 회사마다 꼭 한 명씩은 타성에 젖은 사람이 있었거든. 그냥저냥 다니는 게 느껴져. 일을 위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지아 그런 사람이 되게 많아.
윤필 너처럼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큰일을 해보고 싶은, 그런 게 안 느껴졌어. 그에 비해 너는 의지가 느껴져.
지아 나는 욕심이 있는 거 같아. 일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를 수도 있겠네.
윤필 일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거.
지아 그 생각 자체는 동의하는데 그렇게 못 하겠더라.
윤필 정신 건강엔 그게 나을 수도 있는데 일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계속 신경 쓰는 것도 스트레스야. 그게 안 되는 사람이니까.
지아 맞아. 하루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는데 어떻게 행복과 연관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아침에도 내가 했던 게 잘못되는 꿈을 세 번이나 꿨어. 최근에 처리한 업무가 작은 실수도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단 말이야. 어떻게 무사히 끝냈는데 꿈에 일이 잘못된 것처럼 나오는 거야. 분리가 안 돼.
윤필 맞아. 나도 그래.
지아 일을 계속하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대단해 보여.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내고 있겠구나. 어떤 일을 하든 진짜 악착같이 버티고 있겠구나.
윤필 그냥 누워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드는 거야. 나 혼자 살기도 힘든데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자식까지 낳았지. 다들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집을 사고 어떻게 가정을 꾸리고 사는 거지.
지아 어떻게 한 직장을 10년, 20년을 다니고.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윤필 다들 힘든데 그 상태에서 계속 버티다 보니까 시간이 지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지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윤필 그럼 너는 어떻게 버티고 있어? 요즘 하는 고민은 뭐야?
지아 최근에 엄청 무기력했어. 쉴 틈 없이 바쁜데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원래는 혼자 있는 걸 되게 좋아했는데 갑자기 집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져.
윤필 지아가 무기력을 느끼다니. 뭔가 변화가 있었나 보다.
지아 일도 그렇고 인생 자체가 너무 외로운 것 같아. 최근에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바도 많았고. 개인적인 이별도 있었지만 그거 말고도 친구랑 안 좋은 것도 있었고. 요즘 그런 일들을 겪다 보니 인간관계에 회의가 들었어. 그리고 이렇게 무기력할 때 말할 사람이 없는 거야. 물론 얘기하면 친구들이 잘 들어주겠지. 근데 얘네도 힘들 텐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생각이 드는 거야.
윤필 맞아. 어렵지.
지아 예전에는 그런 거 없이 그냥 연락해서 힘들다고 말했거든. 지금은 각자의 힘듦이 있다는 걸 아니까 그걸 나누지 못하겠더라. 그러다 보니 인생은 지극히 혼자구나, 내가 주변 사람들을 위해 하는 행동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괜한 생각도 하게 되고. 혼자 있는 집이 어느 순간 너무 조용해. 그게 싫은 거야. 눈물 나고.
윤필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게 많았구나.
지아 또 회사에서 사람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있지. 좋은 분들이지만 가끔 힘든 부분이 있잖아. 말로 표현하기도 사소한 것들.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면 내가 뭘 위해 사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괜히 무기력해지고 힘든 것 같아.
윤필 난 네가 이 무기력의 원인을 짚어내고 있다는 게, 긍정적이라고 생각해. 멋져.
지아 이거를 짚어내지 못했었어.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봤어. 내가 진짜 왜 이러지 하면서. 친구들도 변한 거 하나도 없고 몇몇과의 관계만 틀어졌을 뿐이고 뭐 일도 사실 그냥 하는 건데 갑자기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졌을까. 그냥 돌이켜 봤을 때 이것저것 겹쳐서인 것 같아.
윤필 도대체 언제 생각이 없어지는 걸까? 항상 생각이 많아. 뭘 준비할 때는 준비해야 하니깐 생각이 많고 들어갔을 때는 신입이니까 그렇고 이제는 진급 걱정도 해야 하고. 끝없는 고민인 것 같아.
지아 저번에는 생각이 든 게, 내가 좀 단순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더라고. 인생이란 뭘까? 나는 무얼 위해 이렇게 살까? 이런 생각하는 게 싫은 거야. 흘러가는 대로 살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생각이 많다 보니 더 자주 우울해지는 것 같아. 근데 생각을 제어할 수 없잖아. 어쩔 수 없겠더라고. 그냥 답을 조금씩 찾는 수밖에 없어.
윤필 우울하거나 무기력한 적이 많았어?
지아 최근에 좀 많았던 것 같아. 아니다. 입사하고 좀 많아진 것 같기도 하네.
윤필 환경이 변해서.
지아 원래 무기력을 자주 느끼는 성격인 것 같기는 해.
윤필 번아웃 같이?
지아 평소에 최대한 열심히 살려고 하다 보니까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갑자기 확 무기력해지는 게 있어. 한동안은 괜찮았다가 최근에 좀 크게 터졌던 것 같아. 저번 주말에는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일어나서 한 끼 겨우 먹고 설거지하고 그러고 계속 잠만 잤어. 한 시간 일어나 있다가 내리 잠만 잔 거지.
윤필 원래 되게 부지런하잖아. 그 와중에 설거지도 했어.
지아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고. 운동도 못 가겠고 청소도 못 하겠고 일어나지도 못 하겠고. 그렇게 누워있었는데 사실 나아지는 건 없었어. 오히려 일하러 나갈 수 있다는 게 위로가 되더라.
윤필 나갈 구실이 있으니까.
지아 나가서 일하고 사람들이랑 부딪히고 하니까 그래 이게 사는 거지 싶더라고. 그것 때문에 힘든데 막상 거기서 위로받는 게 신기했어.
윤필 일상에서 스트레스 얻었는데 다시 그 일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게 참.
지아 억지로라도 나를 그 무기력에서 꺼내주는 거잖아. 어쨌든 나는 일을 하러 가야만 하니까. 이게 되게 묘했어.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 때문에 지쳤다고 생각했는데 이 일조차 없었다면 진짜 힘들었겠구나 싶더라고. 또 한편으로는 이게 아예 없었다면 무기력도 없었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생각 좀 그만해야 하는데.
윤필 평소에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많이 고민하는구나.
지아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잘 살고 싶은데 뭐가 잘 사는 건지도 모르겠어. 요사이 친한 친구들이 결혼을 많이 했거든.
윤필 맞아. 결혼. 그것도 있을 것 같아.
지아 친한 친구들한테 큰 변화가 연속으로 생기다 보니 나까지 싱숭생숭해지는 거야. 이 나이쯤이면 원래 결혼하는 게 맞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고. 그러다 보면 결혼은 꼭 해야 하는가부터 시작해서 엄청 복잡해지는 거야.
윤필 나도 그래.
지아 그런 것 때문에 나는 왜 혼자인가부터 시작해서 괜히 더 무기력해지고.
윤필 잘 살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 행복하고 싶고.
지아 맞아.
윤필 한 번 사는 인생 잘 살고 싶지. 그래도 왜 무기력했는지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한 거. 그게 진짜 멋진 거야.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거니깐.
지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이렇게 괜찮다가도 집에 가면 무기력해질 수도 있고. 그걸 아니깐 일부러 더 움직이려고 하는 것도 있어. 열심히 살려고는 하는데 눈앞에 놓인 것들 하느라 끝나는 것 같아. 집안일하고 운동은 그야말로 살아야 하니까 하고. 그러고 나면은 시간이 많지 않아. 이 상태에서 뭔가 더 하려면 의식해서 촘촘하게 시간을 써야 하는데 정말 쉽지 않아.
윤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갖고 싶은데 집에 와서 씻으면 잠깐 누워서 핸드폰 보게 되잖아. 그러다 보면 1시간 후딱 가 있어. 내일을 준비하려면 자야 하는데 그럼 미래 준비할 시간이 없어.
지아 종일 일하고 와서 잠깐도 못 쉬나 하는 보상 심리 같은 게 있어.
윤필 맞아. 나한테 위로되는 시간인 건 맞는데 지나고 보면 허탈하지.
지아 사는 게 똑같네.
윤필 너는 더 하고 싶은 게 있는 거야?
지아 진짜 도파민 중독인 건지 모르겠는데 또 새로운 운동을 배우고 싶어.
윤필 운동!
지아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푸는 좋은 방법인 것 같아서.
윤필 건강한 방법.
지아 독서도 좋아하긴 하는데 책 읽기로 스트레스를 푸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안정되어 있을 때 읽는 건 좋아. 근데 마음이 복잡할 때 책 읽는 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 그럴 때 그나마 도움이 되는 게 운동하는 거였단 말이야. 일단 운동은 시작하면 힘드니까 아무 생각도 안 들거든.
윤필 뭔가 슬프네.
지아 이번에 수영 배웠을 때도 느꼈어. 지금 당장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으니까 집중해야 하는 거야. 근데 그게 되게 좋더라. 그래서 자꾸 새로운 운동에 눈이 가더라고. 이제는 헬스도 일상이 되어서 새로운 걸 배워서 내 스트레스도 풀고 생각도 정리하고 싶어.
윤필 현실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한 거야?
지아 그런 거 같아. 생각을 안 할 수 있게 하는 거. 몸을 막 움직이는 거. 그런 걸 바라는 것 같아. 갑자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조금 슬퍼지네.
윤필 그렇게 살다 보면 지금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순간이 올 수도 있어.
지아 괜찮아지는 순간이 오겠지.
윤필 진짜 시간이 안 갔으면 좋겠다가도 이럴 때는 미래의 내가 궁금해.
지아 맞아. 3년 후에 나는 어떨까? 백수인 거 아니야?
윤필 행복한 백수일 수도 있어.
지아 행복하면 됐지. 행복하면 됐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우리의 대화는 이 질문으로 쭉 이어졌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 머릿 속에는 항상 행복에 대한 질문이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정의는 구체화하지 못한 채 일상에 밀려 휘발되어 버리곤 했다. 오늘 대화를 해보니 지아 씨 또한 자신의 행복에 잔뜩 물음표를 품은 채 지내고 있지만, 그 행복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옆에 있는 나도 함께 가는 중일까?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아주 답이 없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아 씨는 중요한 갈림길에 섰을 때 퇴로를 마련한다고 했다. 검색해 보니 퇴로는 '물러날 퇴'에 '길 로'를 써서 뒤로 물러날 길이라는 의미다.
퇴로(退路)
뒤로 물러날 길.
퇴로라는 말은 지아 씨와 어울리지 않는다. 인생을 건 모험은 두렵다고 말한 그녀지만, 지난날 지아 씨의 선택을 떠올려보라. 세상의 시선이 지아 씨의 멋진 인생을 따라주지 않을 때, 그녀는 과감하게 새로 시작했다. 열망 가득했던 꿈이 아니라고 판단이 섰을 때,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거취가 정해지지 않은 순간에도 그녀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것도 가보지 않은 길로 가기 위해서 말이다. 퇴로는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지아 씨는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늘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고 있다. 퇴로가 아니라 진로(進路)를 말이다.
생각이 많은 게 싫다는 지아 씨. 가끔 단순한 사람이고 싶고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고 말한 지아 씨. 내 눈엔 삶에 진심인 그 모습이 빛나 보인다. 그녀가 남들이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 그 이상으로 말이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지금 이 순간이 훗날 지아 씨에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줄지 기대된다.
지아 씨와 우리의 남다른 퇴로를 응원하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