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방송 작가를 뽑는 면접장에서 들은 질문이었다. 1초 사이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말하면 너무 패기 없어 보이나?'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천직이라 말하는 건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능글맞게 받아칠 요령이 없는 나는 솔직함을 택했다.
"아니요."
면접장에 있던 사람들은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세대 차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단어였다. 당신들은 그저 '잘할 수 있다' 대답했었다고 요즘 애들은 역시 다르다며 말이 오갔다. 조금은 찝찝한 결론이었지만 어찌 됐든 솔직함이 먹힌 듯했다.
“그럼 왜 작가 하려고 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걸 얘기하진 않았다. 그래도 진심을 얘기했다. 가장 그럴듯하면서 가장 진심인 이유를 꼽았다.
“제가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아주 어릴 때는 남들이 우와- 할 정도로 알아주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고 싶었지. 인턴을 몇 차례 경험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 외 다양한 환경들을 접하면서 직업 가치관이 바뀌었다.
학교 근로장학생으로 일할 때는 8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문서와 씨름하는 사무원을 지켜봤다. 한때는,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그곳의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동경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생각이 변했다.
‘내가 이 직장에 다니면 과연 행복할까?’
자문했을 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사무 행정직은 나와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 대부분을 쏟는 곳이 직장인데, 그래도 조금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자고 다짐했다. 나는 그 이후로 내가 잘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우선순위로 두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방송 작가에 지원한 것은 꽤 합리적이었다. 난 방송 기자가 되고 싶었다. 글쓰기에 자신이 있었고 사회 이슈와 방송매체에 관심이 많았다. 또 세상에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멋있었다.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원한 곳은 시사 보도 프로그램으로, 기자는 물론 작가, PD와 일할 수 있었다. 작가와 PD에도 큰 관심이 있던 나에겐 너무 좋은 기회였다. 방송 환경을 경험하고 관련 직종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내가 이 산업과 맞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회였다. 면접관은 물었다.
“생각보다 힘들 수 있습니다. 돈이 적고 처우가 안 좋을 수도 있고. 그래도 할 건가요?”
방송 작가 처우가 안 좋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 결심은 하고 갔지만 면전에 이런 소리를 하니 맥이 빠졌다. 그래도 이건 정답이 있는 질문이었다. “아니요”는 정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많은 지원자 중 나를 뽑은 이유는 이 일에 가장 열정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의 눈을 틀리지 않았다. 열정이 있었던 게 맞다. 내가 그곳에 간 이유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 거기에 갈 이유는 없었다. 최저 임금 웃도는 급여에 엄청난 통근 시간 등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었다. 엄청나게 불안했지만 엄청나게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면접을 보고 얼마 뒤 합격 연락을 받았고 편도 두 시간이 넘는 머나먼 직장이 생겼다. 엄청난 통근 시간에 내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 뒤 방송국을 그만두었다. 갑작스러운 전개이지만 그렇게 되었다. 방송국 퇴사와 함께 설상가상 대학까지 졸업하면서 내 고민은 더욱 깊어져 갔다. 직장에 대한 회의, 나 자신에 대한 고민. 그렇게 지독한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자신에 대해 이토록 고민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방송국 면접에서 받았던 질문이 떠올랐다.
"작가가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천직이 세상에 존재할까? 머리를 수백 번 굴려본 결과, 당장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난 하고 싶은 건 많지만 되고 싶은 건 없다. 그래도 어딘가에 천직이 있다고 믿고 싶다. 이 헛된 희망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일종의 프로젝트를 시작해보려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기록이랄까? 다양한 삶,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나중에 봤을 때 더 큰 내가 되어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힘차게 시작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