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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필 Feb 27. 2022

하고 싶은 걸 굳이 뒤로 미루지 말자

방송국 퇴사 후 자연인이 된 나. 고작 한 달 다녔지만 나의 에너지는 바닥나 있었다. 번뇌의 시간 탓에 정신 에너지 고갈, 왕복 다섯 시간 통근에 신체 에너지 고갈. 무엇보다도 심각한 사안은 '취준 에너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취준 에너지'란 취업 준비 에너지의 준말로 취업 의지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냥 내가 만든 말이다) 


방송국과 인연 맺기 전, 몇 개 쓰진 않았지만 자소서를 쓰면서 너무 괴로웠다. 완벽주의자이면서 냉철한 자기 객관화 능력을 탑재한 나는 자기소개서 젬병이다. 자기소개서는 취준생 사이에선 일명 '자소설'로 불린다. 나의 강점을 극대화해 어필하는 것이 자소설의 핵심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나를 포장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쓸데없는 자기 검열로 쓸 수 있는 서류를 반 토막 냈다. 게다가 나는 문과인데 말이지... 또 완벽주의 성향으로 인해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나를 위해 생긴 말 같달까? 쓰고 보니 부끄럽고 철부지 같다.


그렇다. 나는 스스로 기회를 줄여가며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생계유지를 위해서 적당한 타협이 필요한데 타협이 안 됐다. 아직 정신을 덜 차린 것 같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나는 부자도 아니고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고집을 부리는 건 딴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에게 솔직해져 봤다. 직장에 들어가고 싶은가 물었는데, 아니었다. 난 평범한 직장인이 되기를 원치 않는 것 같다.


어쨌든 나이는 점점 먹어가고 친구들은 하나둘 제 갈 길 찾아가는데 참 막막했다. 그래서 노트를 꺼냈다. 앞으로의 계획 말고 하고 싶은 것을 적기 시작했다. 이력서를 쓸 때는 막막했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되고 싶은 건 없지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인생 계획이 힘든 거였다. 생각이 많은 성격 탓에 이 변수 저 변수 고려하느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랄까. 우선순위 정하는 게 힘들 만큼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나는 종종 머릿속으로 하고 싶은 것을 그렸었다. 그리고 늘 결론은 똑같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해보자.' 

'취업을 하면 도전해 보자.'


하고 싶은 걸 적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걸 굳이 뒤로 미룰 필요가 있나? 지금 해도 상관없잖아?' 


글로 옮기니깐 솔직히 나답지 않게 패기가 넘쳐서 좀 웃기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다. 방송국에 다니던 시기에 영원한 이별을 경험했다. 이제 서른 줄에 접어든 사촌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자주 왕래하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처음 맞아 본 이별이라 충격이 꽤 컸다. 


우리가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 가다가 차에 치일 수도 있고 병에 걸릴 수도 있는데 내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거 자체가 행운이구나 하고. 그때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다.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내 인생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도 모자라다는 것. 잊지 말자. 


그래서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기로 했다. 취준 에너지도 잃어버린 마당에 젊음의 패기로 한번 해보기로 했다. 난 지독한 현실주의자라 이런 선택을 할 줄 몰랐는데 알고 보면 나는 지독한 낭만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우선은 이 선택을 쭉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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