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임을 찾는 과정
발목이 부러졌다.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 개찰구로 잰걸음을 하던 중, 깨진 보도블록을 밟았다.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라 부러졌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이만보를 걸었고, 새벽에 퉁퉁 부은 발목으로 잠에서 깨야 했다.
다음 날 병원에 방문해 엑스레이를 찍고 발목이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만화적 상상처럼 부러진다고 당장 걷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병원에선 처음이면 모를 수 있다고 했다. 부러진 것인지 삐끗한 것인지..
의사 선생님은 걷는 걸 피할 수는 없지만, 운동은 삼가고 최대한 발목을 덜 쓰라고 하셨다.
- 그럼, 산책도 안 되는 건가요?
- 산책은 걷는 거니 당연히 안되지요.
의사 선생님은 조금 전 내 말을 들은 건가? 하는 의문이 서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산책과 걷는 것은 너무나 다른 행위인데. ‘산책 금지령’을 처방받은 나는 절뚝이며 돌아오는 길에
‘산책’을 잃어버린 후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발목이 부러진 어느 날,
산책을 잃고서 산책을 애정하고, 성원하고, 응원하고, 권장하고, 영업하고, 예찬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발목이 부러졌고, 에세이를 쓰고 싶어졌다.
이 문장은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진 이야기와 흡사하다.
가상의 이야기를 지어 쓰는 것이 전공인 나는 말도 많고 글도 많지만.
많은 글 중에서도 내 이야기를 내어 보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특이하지도 별나지도 않고, 굳이 내어 보일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러,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을 신기해했다.
자신의 반짝이는 부분을 기가 막히게 갈고닦아 내보인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내 특별함을 찾지 못해 반짝이는 에세이 작가들을 보며 생각한 것은 부러움이라 해야겠다. 아니 어쩌면 일종의 질투였을지도 모르겠다.
내밀한 마음속 깊이 무언가 내보일 반짝이는 것을 품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것이 없어 가상의 세상에서 타임루프에 걸린 자가 되기도 하고 인류의 마지막 소명을 떠안은 난데없는 선택받은 자들을 그리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구상하던 내가 나를 소재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 것은 발목이 부러져서였다.
아픔보다, 불행보다, 이벤트라고 생각한 나 자신도 얼마나 콘텐츠가 목말랐기에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매일 하는 산책을 할 수 없어지자.
내가 매일 걷는 인간이고, 산책 중독자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걷지 못해 안달이난 나를 보며 너 참 유별나다고 한 지인의 말에 불이 켜졌다.
‘아, 나의 별남은 이거구나.’ 별거 아닌 듯 별거인 사건이었다. 나에게 당연한 무언가, 일상의 귀퉁이가, 이야기의 소재가 될 기미가 있다는 것.
또 그런 걷기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
말 많고 글 많은 자가 애정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눈을 빛내듯.
나처럼 걷지 않는 사람들에게 걷기를 영업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알았을 때.
삶이라는 바다에 산책이라는 잔잔한 파도가 또는 바람이 얼마나 재미있은지.
이걸 모르면 손해, 이제라도 알면 다행! 약장수의 마음으로 눈을 반짝이며
글로 끼를 부려봐야지 야무진 다짐을 했더랬다. 영업에 진정성을 더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나의 삶이 고민이 여러분은 어떠한지 궁금해서 주렁주렁 꺼내게 되었다.
산책을 하며 했던 고민, 고민을 이기기 위해 했던 산책.
그 무한루프 속의 소소한 발견과 공감, 귀여운 풍경 등.
발목이 부러지고, 산책을 하지 못하게 된 일을 작은 불행으로,
산책의 소중함을 알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행복의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소중함이란 건 일상을 유지할 때는 모른다.
일상이 특별하단 것도 일상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된다. 장염에 걸리고서야, 매운 음식을 먹을 수 있던 것이 특별해지고. 연인과 헤어지고서야 그 연인의 특별한 다정함, 장점이 그리워지듯. 다리가 부러지고서야 산책의 특별함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잃어본 코로나 때 산책을 만났던 것도.
돌이켜 보면, 불행과 행운의 등가 교환이었다고 생각한다.
3년간의 통제와 제약 속에 살아야 했던. 인류가 동시간에 나눈 상실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다시 돌아온 일상에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추억하며 그때의 답답함이 벌써 흐릿해졌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난한 암흑기였다.
그때 우리는 믹스커피를 삼천 번 젓는 것이 유행할 만큼 단절된 시간을 버티는 법을 찾고 있었다.
달고나 거품이 올라오는 걸 지켜보며, 어쩌면 우리 마음도 조금은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금세 꺼지곤 했다. 집 안이 세상의 전부였고, 창문은 유일한 바깥이었다.
날마다 확진자 수가 오르내렸고, 그 숫자에 따라 마음의 날씨도 변했다.
배달음식의 냄새가 하루의 리듬이었고, 줌 화면 속 표정으로 서로의 안부를 짐작하던 시절이었다.
나를 알게 된 것도, 내가 걷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코로나 이후, 걷는 습관은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
단절의 시간 속에서 얻은 이 단순한 행위가, 어느새 내 삶을 지탱하는 근육이 되었다.
상실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잃고 나서야 남는 것들, 상실로 알게 된 것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좋은 양분이 된다.
산책은 단순하고 확실한 환기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잠시 정지 버튼을 누르듯, 내가 가는 삶의 방향과 목적이 흔들릴 때, 온전히 나를 돌아보는 시간으로 썼다.
생각을 정리하기보단, 멍 때리고, 잡생각을 늘어놓고, 노래를 듣고, 망상을 하며 어디로 흘러가는지 종잡을 수 없는 나의 시간들을 잠시.. 느리게 흘러가도록 해보기.
산책을 마치면, 산책하기 전과 이어지는 타임라인이지만, 그 시간을 꾸리는 내가 조금 단정해진 기분이 든다.
그래서 매일 걷는다. 매일 하루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살았다는 단정하고 단단한 마음이 들기 때문에, 그 기분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잘 살고 있다는 믿음과 기분으로 행복을 느끼기에 그런 기분을 갖고 있다면..
잘 사는 삶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모든 짓거리는 행복을 위한 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오랜 고민과, 문제와, 아픔들이 언젠가 풀릴 거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이란 말이 무거울 때가 있다.
꼭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 같아서, 나아지지 못하면 실패하는 삶 같기도 한 말이다.
어제보다 더 나아질 필요가 있을까 반문한 적도 있다. 더 나은 삶을 생각해야 삶의 동력이, 희망이 행복으로 환전되기 때문일까.
나아간다는 것,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것을 즐기는 일일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았다. 어제와 같은 내일, 또는 어제보다 못한 하루라도.
그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모두 다 나의 시간과 과정이다.
어제와 같은 발걸음을 걷고, 어제보다 못한 걸음수라도 매일 걷는 것이라면 결국 어제의 걸음과 오늘의 걸음이 합쳐져 많은 걸음을 만들 것은 분명하다.
그 걸음만큼 고민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어떤 하루도 그 과정이 아닌 일이 없다면, 더 나은 하루가 아니어도 의미가 있다.
덜 될 하루도, 미숙하고 부족한 하루도, 슬픈 하루도, 나를 발견하는 모든 하루라면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하는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불행한 사건으로 인한 행복의 발견덕에 '발목이 부러져도 산책'하는 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던 것처럼
길치의 산책은 모든 선택과 결정 뒤 따르는 성취와 보람, 방황과 후회 기타 등등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그 누구도 이번 생은 처음이라.
걷다 보면, 만나는 뜻밖의 길처럼,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갈림길을 만나고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어떤 순간에 어떤 선택과 결정이 최선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돌이켜 보면 그 길이 나았을 것이라는 미련과 후회가 따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또한 그 길을 가보지 않아 할 수 있는 추측일 뿐이다.
추측은 대부분 틀리고, 상상은 대부분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어림짐작은 어림없는 헛다리일 확률이 크다. 부분을 보고 전체를 미루어 보는 일은 대게 그렇다.
그것으로 상대나, 대상을 판단하고 귀결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걸 세계의 확장으로 허용하는 편이다.
애초 상상이라는 단어의 뜻이 코끼리의 뼈만 보고 코끼리의 형상을 그려내는 일이라고 하니 그럴 것이다.
실제로 공룡의 뼈를 보고 생각해 낸 파충류의 공룡이 실은 사실과 멀었다는 현재의 평과 같이.
뼈대 위에 어떤 살이 붙는지는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시작은 어떤 대상일지 몰라도 생각의 가공을 거치고 나면 전혀 다른 대상과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내가 골몰하던 대상에 새로운 단서를 주기도 한다.
익숙한 것을 반복하며 삶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할 때
돌이켜 보면 죽을 때까지 못 해본 게 더 많은 것이 인간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다른 감상을 불러오기 때문에 매일이 다르고 매 순간이 다르다.
똑같은 길에서 똑같은 풍경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오늘은 왼쪽에서 뒹구는 고양이를 볼 수도 있고, 다음날은 나뭇가지에 감이 달린 것을 또는 하늘을 가로지른 비행운을 볼 수도 있다. 그날의 온도 습도 공기란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선명한 메모는 그날만의 기분, 새로운 경험을 기억하게 하는 기록이다.
산책을 기록하기로 한 마음 또한 이것이었다.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발걸음 그 뒤에 오는 새로운 감각에 대한 것들을 휘발되지 않게 기록해 두고,
삶의 새로움을 다채롭게 만드는 것.
새로움에 두려워하지 말 것,
새로운 걸 발견하기를 즐겨할 것
새로움을 숨 쉬듯 볼 것.
산책만 한 것이 없다.
누구든, 언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거운 삶의 무게를 덜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