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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보통의 삶

샛길로 빠져보는 산책과 보통의 삶에 대한 단상.

by 몽삶
심지가 곧게 선 사람의 삶을 보며 감탄하고
바람보다 빨리 눕는 삶을 보며 신기해하며
나는 누워야 할 때 버팅기고 버텨야 할 때 맥없이 짓무르기를 자주 한다.

“행복은 내일을 살아낼 용기야.” 엄마가 그런 말을 했었다.

어릴 땐, 내일을 살아내는 데 왜 용기가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아침잠이 달았고, 학교 가는 게 귀찮았고, 수업이 지루할 뿐인 금쪽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점점 퍽퍽하게 닿아서, 용기가 부족해서, 자꾸만 멈추고 싶어서.
그래서 어느 날, 엄마에게 말했다.
“이제는 엄마가 했던 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그랬더니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너는 아직 몰라. 넌 성공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하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 모르는 거야.”

알고 싶지 않은 심연의 감정.

그걸 알게 되면,아주 작은 용기로도 내일을 살아낼 수 있을까. 행복이 더 소중해질까. 그때가 되면, 우리 엄마처럼. 죽은 줄 알았던 화분에서 돋아난 새순 하나에도

하루 종일 행복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늘과 내일로 줄창 이어지는 삶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같은 시간이라.

때때로 눈도 못 뜰 태풍같이 느껴지는데, 엄마의 시간은 실바람 같아서 어떻게 저러지 싶다.

태풍을 지나온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태풍의 눈 속인가 싶고.

엄마가 태풍의 눈에서 온전히 키운 나는 온실을 벗어난 실내용이라,

매일의 날씨에 줏대 없이 이리저리 휘청이며 웃자란 것이라.


얼만큼의 용기가 있어야 내일을 살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요즘 같은 초여름, 해가 쨍쨍한 와중에도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이 있다.

사람에겐 시원한 바람일 뿐이지만, 가로수의 잎이 흔들리고, 작은 들꽃들은 바닥에 눕는다.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태풍을 지나가는 자세 같은 걸까.

태풍을 지나는 사람들 중..


심지가 곧게 선 사람의 삶을 보며 감탄하고

바람보다 빨리 눕는 삶을 보며 신기해하고

나는 누워야 할 때 버팅기고 버텨야 할 때 맥없이 짓무르기를 자주 했다.


어쩔 때는 복에 겹다가 어떨 때는 한없이 부족한 것 같은 삶에서

적절하지 못한 나는 보통의 삶을 사는 보통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보통의 삶은 행복과 잠깐 스치고 불행과 오래 동행하는 것 같아.

매일 산책하며 작은 행복을 줍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의 산책 파트너는 ‘불안’이다.

불안을 안고 걷는다, 아침엔 오늘 하루의 해내야 할 일, 어제의 숙제를 떠올리고.

저녁엔 지난 하루의 나를 돌아보며.. 뿌듯해하거나 이대로 괜찮은가 걱정하며.

잃어버린 마지막 조각을 찾듯 완전한 안정을 찾아

동네를, 멀리 떠나 여행지에서, 뜻하지 않게 길을 잃은 길치가 되어...

잠시, 보통의 불행과 나란히 걸으며. 불행을 마주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과 우울과 슬픔과 좌절과 갈망과 지난 후회를 아주 작은 것들로 바꾸어본다. 산책 후. 나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내가 커튼을 걷고, 물을 마시고, 일을 마주하는 것. 하루의 루틴이자, 나와의 약속인 셈이다.

그 누구도 알아보지 않는 일을 매일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행복을 위한 일이라 해도 매번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날의 산책은 우울감으로 가득하고, 어느 날은 침대에서 한 발자욱도 나가기 싫은 날이 있다.

걷는 것이 능사가 아닌 날도 있다. 때로는 제자리가 더 나은 날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의 하루가 진척이 없는 날은 일단 걷는다.

공원이 도심의 병원이듯 산책은 현대인의 우울에 적절한 처방전이 된다.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 병원에 가기까지 걱정과 두려움, 귀찮음 따위로 병원에 갈 용기가 필요하듯.

매일 나가 걷는 다는 건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에겐 하루의 공백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며 결핍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다독여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가 올 때, 우울할 때 더 나가 걷는다. 길가에 다른 사람들을 보며 세상에 오늘을 살아가는 각각의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가늠해본다.

내 수고는 나만 알면 된다는 말은 어쩌면 타인의 수고를 돌아보기에 여유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언젠가 남들이 내 수고를 알아주었으면 인정욕구와 칭찬을 갈구하던 때가 있었다. 어릴때는 일거수일투족을 부모님께 보고하며 어린 동생을 샘냈었고, 고등학교땐 시험이라도 잘 본 날엔 부러 틀린 것을 속상하다며 역설적인 자랑질을 하기도 했다. 또 사회생활에서도 나는 조이 쑤시고 근질거리는 쪽에 가까웠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갔을 텐데. 꼭 뭐라도 알면 그렇게 나누고 싶어 입이 근질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메타인지의 시간을 거쳐 또 나이를 들어감에 있어 입을 닫고 귀를 여는 일을 연습했다. 그렇게 나를 단련하는 시간을 들여 나를 파악하기를 나는 ‘표현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유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즉, 입이 방정이고, 망신살이 뻗치기 좋은 유형이란 이야기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주변인들에게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것, 단점으로는 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에 대한 ‘내가 왜그랬지?!’로 시작하는 참회의 산책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신호구나 깨닫고, 어쩌면 영원한 동반자가 될지도 모르는 불안과 함께 서성이듯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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