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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취미

두 다리와 땅만 있다면 어디든 걸을 수 있어!

by 몽삶

돈이 없다.’

스물일곱의 나는 자취를 하며 보조 작가로 일하는, 조금 늦은 사회 초년생이었다.
남들이 한 번 다니는 대학을 두 번이나 거쳐, 굳이 굳이 돌고 돌아, 비로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처음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땐, 중학생이었다. 막연히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며 나도 저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처음 꿈을 꾼 순간으로 기억한다. 진수완 작가님의 <경성스캔들>이었다. 역사를 좋아했던 중학생 시절, 드라마 속 인물의 대사를 보며, 일제 강점기의 선조들의 마음이 와닿아서, 현대의 작가가 당시의 마음을 상상하며 짚어내는 작가의 일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는 역사도 좋아했기에 드라마 중에서도 <허준>, <불멸의 이순신> 등 사극을 유달리 좋아했는데, 이 공통점은 상상의 영역이라는 점이었다. 살아보지 않은 시대인 과거의 역사, 존재하지 않는 가상현실의 드라마.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기 좋아하는 나에게 판타지를 무한대로 제공하는 재미있는 콘텐츠였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라는 직업은 시험이나 라이선스가 분명한 일이 아닌 것 같고, 보편적인 취직과는 거리가 멀어 직업으로 삼아 돈을 번다는 생각을 쉽사리 하지 못했다. 막연한 상상 속 직업에 가까웠다.

해서, 역사를 전공으로 한 직업을 진로로 잡았으나.. 아귀가 맞지 않는 바퀴, 덜컹거리며 굴러온 시간들이었다. 목적 없는 성실을 쫓던 어느 날, 졸업 후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더라, 돌아본 어느 날. 드라마를 보고 나도 저런 걸 쓰고 싶다고 적어 둔 일기를 봤다. 내 이름을 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글도.

그렇게 막연하던 꿈을 그대로 흘려보내기 싫어서 선명하게 만들기를 결심하고

드라마 작가 되는 법을 쳐봤던 것 같다.

23살 돌이켜보면 내 삶에 가장 큰 결정이자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다.

진로를 정하고, 예대에 편입해서 글을 배웠다. 전공으로 부족한가 싶어 졸업학년 때 안산에서 여의도의 작가 교육원을 오가며 대본을 습작했다.

졸업 후엔 보조작가를 하게 되기까지.. 나름 순리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중이니, 이제는 열심히 일해 돈을 벌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작가가 될 거라는 믿음이 충만했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니, 이제는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고 자리를 잡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생활비를 정해 놓고 남은 돈을 저축하면 1년에 얼마를 모을 수 있을지 계산하며, 10년 후의 나를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소박한 월급에 맞지 않는 소비 욕구와 이성의 싸움이 계속됐다.

야심한 밤 배달 음식을 시키고, 만 오천 원짜리 액세서리를 사고, 다이소에서 언젠가 쓸 주방용품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나를 위한 소비’를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새 영수증에 찍힌 이천 원, 만 원이 차곡차곡 쌓여 신기하게도 이백만 원을 넘긴다.

여기에 한 달에 서너 번 친구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마이너스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살다 간 영원히 거지가 될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일산에서 서울까지 나가기 어렵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약속을 미루기 시작했다.


숨만 쉬어도 하루에 2만 원은 쉽게 나가는 방에서 오도카니 앉아,

창밖 날씨를 보며 멍을 때리는 시간이 늘어갔다.


통창의 오피스텔은 지은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이중새시 대신 낡은 실리콘이 흐물거렸고.

겨울이면 그 틈 사이로 찬 공기가 그대로 들어왔지만,

꽃이 피는 봄엔 오피스텔 단지 안의 벚꽃나무가

겨울엔 흩날리는 눈이 그림처럼 걸리는 곳이었다.

근사한 풍경 덕에 생활비를 세이브하며, 엉덩이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속도 없고 돈도 없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나가 걸었다.

‘돈이 되면서 즐거운 건 덕업일치, 돈이 되지만 즐겁지 않은 건 일이라면...
취미란 본래 돈이 안 되더라도 즐거운 게 본질 아닌가?’

게다가 돈 들이지 않고 즐길 수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취미다.

"돈 안 드는 취미... 뭐가 있을까?"

‘숨쉬기? 홈트레이닝?’ 같은 것들이 떠올랐지만, 결국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공원에 산책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면면들에서 하루를 착실히 보내는 건강함이 느껴졌다.

입꼬리에 걸린 은은한 미소가, 멀리 보는 사람들의 눈이 맑았다.

누군갈 만나지 않고 돈을 쓰지 않고도 밖으로 나와 즐거울 수 있다.


걸었을 뿐인데, 취미가 될 수 있구나.

그날 밤 일기에 집 근처에 걸을 수 있는 호수 공원에 감사하며 '돈을 번 기분'이라고 썼다.


스물아홉, 온전히 백수였던 나를 붙들어 준 것도 결국 산책이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 유럽 여행을 가겠다는 버킷리스트는 팬데믹 앞에서 허무하게 무산되었고,
모아둔 여행 경비는 생활비로 사라지고... 일도, 생활도 고립되었던 시기.

‘곧 서른’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러 마음까지 먹먹해질 때. 별수 없이 동네를 휘적휘적 걸었다.

‘사는 게 별 건가.’ 싶다가도,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생각이 제멋대로 널뛰며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그러다 발바닥에 쥐가 난 듯 저려올 즈음, 널뛰던 생각들도 지쳐서 힘을 잃을 때.

‘사는 건 별거고.’ ‘나는 이 모양이다.’라는 무심한 생각이 툭 붉어졌다.

마치 철학자가 깨달음을 얻은 뒤 평온을 찾은 것처럼.
바뀌지 않는 현실 대신 내 마음가짐이 바뀌고, 현실마저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싹튼 경험이었다.


걸었을 뿐인데, 마음이 바뀌었다.

그 후로도, 마음이 뒤숭숭해질 때마다 마치 하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다.


산책의 효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신 건강이 좋아진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의학적 근거를 대지 않더라도, 경험에 빗대어 보면 확실하다.

일단 나가 걸으면, 코앞에 있던 문제들에서 멀어지고

너무 가까워서 차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난주에 만났던 친구의 아리송한 말이라든가,
풀리지 않을 것 같던 고민의 해답이라든가,
나조차도 몰랐던 내 마음이라든가.


산책을 한다고 월급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카드값이 저절로 메꿔지는 것도 아니다.
당장 꿈을 이뤄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발밑의 까끌한 흙을 밀어내며 한 걸음씩 걷다 보면,

'까짓 거, 해볼 만하지 않아?' 하는 용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흰 천과 바람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윤지후처럼,
'두 다리와 땅만 있다면 어디든 걸을 수 있어!'


언제든 가난해질 수 있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사는 프리랜서인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난해도 할 수 있는 무료 취미를 애정한다.

맛집을 공유하듯, 취미를 공유하는 마음으로. 다들 산책을 애정했으면 좋겠다.



스물아홉, 많이도 걸었던 일산 호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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