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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Sep 27. 2023

엔간하면 그냥 올려줘요

회사에 결혼 공지하기 (2)

사내 인트라넷에 결혼 공지를 처음 올릴 때, 나는 모든 게 다 부끄러웠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을 업무망 게시판에 적는다는 것도 부끄러웠고, 그 내용이 연애니 결혼이니 한다는 것도 부끄러웠다. 심지어는 그런 글을 쓰는 행위조차도 부끄러워서, 굳이 공휴일 이른 오전에 사무실에 나가서 공지글을 작성했다. 남들 다 출근할 때 글을 쓰고 있으면 어깨 너머로 우연히라도 들킬까 싶어서다. 그렇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글을 올린 날보다 그 다음날의 반응이 더 폭발적이었다. 글 쓴 당일에는 읽은 사람이 몇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결혼 공지를 두 번씩 재차 올리는 것은 우리 회사에서 일반적인 일이었다. 몇 주 전에 한 번, 그리고 며칠 전에 다시 한 번.


일종의 리마인드였다. 당사자들에게는 일생에서 딱 한번 있을 빅빅빅이벤트이지만, 남들에게는 흔한 일정일 뿐이지 않는가. 당장 달마다 몇 번의 결혼식을 부지런히 다녀줘야 하는데. 그러니까 까먹지 말라고, 이 날 이 때 어디서 누구네 결혼이 있으니까, 직접 축하도 좀 해주고 축의도 좀 해주라는, 그런 의미의 리마인드였다.


하지만 내게는 해당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결혼식이 없으니까. 단 1명의 하객도 모시지 않기로 했으니까. 계좌번호조차 까지 않았으니까. 숨어서 몰래 공지글을 썼을만큼 남들 관심을 즐기지도 않았고.



몇 해 전, 이직의 기회가 있었다.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분야였고, 워라밸도 더 나았으며, 위치도 세종 따위가 아닌 서울이었다. 마음이 꽤 흔들렸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직장을 옮기지 못 했다. 사람 때문이었다.


지금의 직장을 처음 들어왔을 때, 운이 참 좋았었다. 당시 모셨던 과장님, 국장님은 물론 함께 일했던 주무관님, 사무관님, 서기관님들도 워낙 사람 좋은 분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인생 첫 직장생활을 아주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었고, 그게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회사 복도를 거닐면 사람들을 마주친다. 그런데 그렇게 마주치는 사람들 중, 웃으면서 인사하지 못 할 사이가 없다. 저녁 약속도 잦았다. 나를 편하게 생각하고, 술잔을 부딪히는 걸 꺼려하지 않으시는 분들이 나를 자리에 불러주신 덕택이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이직을 고민할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과연 내가 다른 회사에 들어가서 새로이 사람들을 만난다면 지금처럼 괜찮은 관계를 쌓을 수 있을까.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끝내 이직을 결심하지 못 했다.



회사에 결혼을 알리고 나서 크게 체감된 것 중에 하나가 이 사람 관계였다. 역시 주변에 좋은 분들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결혼 축하가 쏟아졌다. 이렇게 괜찮은 사람을 숨겨두고, 왜 그동안 여자친구 없는 척을 했냐는 장난 섞인 농담들도 많이 들었다. 노웨딩 무하객을 결정한 용기와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칭찬도 참 많이들 해주셨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몸둘 줄 모르고, 오직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다.


끝까지 축의를 물어보시는 분들께는 이렇게 대답했다.


두팔 : 자리도 못 모셔서 밥 한 끼 못 드리는데 어떻게 계좌만 띡 적어올리겠어요.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마음만으로도 너무 충분합니다.


한 마디 우스갯소리를 덧붙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두팔 : 아니 뭐 주신다면야 받지만. 요즘 뭐 카카오페이도 있고 뭐.


실제로 주시겠다는 축하 마음을 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리며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우리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돈을 주시면서 “어허! 어른이 주는 돈은 안 받겠다고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시잖는가. 딱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락이 와서 계좌를 물어보시면 어쩔 수 없이 말씀드리곤 했다. 젊은 분들은 정말 카카오페이로 주시는 경우들도 적잖았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 역시 남들처럼 결혼 공지를 두 번 하게 됐다. 과장님 한 분께 혼이 났기 때문이다.


첫 번째 공지글을 올리고 나서, 예전에 모셨던 과장님들께는 따로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었다. 내가 혼이 났던 것도, 그런 자리에서였다.


두팔 : 과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지금 안 바쁘신가요.
이솝 : 오 두팔! 응응 괜찮아. 살이 좀 빠진 거 같네?
두팔 : 앗, 그래보인다면 너무 다행인데요! 그나저나 과장님 저...
이솝 : 그래, 봤어. 결혼한다고.
두팔 : 네, 그렇게 됐습니다.
이솝 : 아니 그럼 그 때도 여자친구가 있었던 건가?
두팔 : 네, 그 때도 있었죠. 근데 이렇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서로 굳이 얘기하지 말자 이래서. 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이솝 : 아유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감쪽같이. 요즘 사람들은 그런가?


언제 만나도 남을 편안하게 해주시는 분. 그런 힘이 있는 분이었다.


이솝 : 근데 어떡해. 가서 축하해줘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 하겠네.
두팔 : 그러게요. 너무 송구스럽네요. 저희가 노웨딩 결혼을 한답시고 과장님을 자리에도 못 모시고.
이솝 : 나는 응원해요. 허례허식을 안 하겠다, 뭐 그런거잖아?
두팔 : 예, 뭐 일종의 약간 그런.
이솝 : 그렇잖아도 올린 글 보고 역시 두팔이다 했어. 본인이 직접 쓴 거지?
두팔 : 네, 제가 직접 썼습니다. 아, 글씨 얘기하신 거면 그건 폰트에요! 글씨까지 직접 쓰진 못 하고 글만 썼습니다. 제가 워낙 악필이라.
이솝 : 난 또 손편지를 써서 스캔 떴는 줄 알았네.


이런 저런 스몰토크로 축하하는 마음을 잔뜩 전한 뒤, 과장님도 물어보셨다.


이솝 : 그래요, 축하하고. 근데 계좌번호가 없던데?
두팔 : 예, 자리도 못 청하는데 계좌만 드리기가 너무 죄송스러워서요.
이솝 : 어쩐지. 내가 못 찾았나 하고 이리 저리 뒤져봐도 없더라고.
두팔 : 예, 일부러 안 올렸습니다.


혹여나 실수로 빠트린 게 아닌가 확인하시는 듯 했던 과장님은, 의도적으로 올리지 않은 거라는 내 말을 듣고 다시 말씀하셨다.


이솝 : 그래, 문자로 하나 보내놔줘요. 마음은 받아야지.
두팔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러더니 힘 있게, 부드러운 듯 뼈 있는 말씀을 하셨다.


이솝 : 엔간하면 그냥 올려줘요. 나처럼 궁금해하는 직원들도 많을 거에요.


언중유골. 나긋하게 말씀하셨지만, 그 어떤 호통보다 크게 혼나는 느낌이었다.


이솝 : 계좌번호는 올려줘야지. 안 올린 건 두팔이 입장에서고.



나는 생각이 깊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다행히 스스로의 경솔함을 빨리 인정하는 장점이 있다. 이번이야말로 이 단점과 장점이 모두 드러난 경우였다고 생각한다.


과장님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결혼 공지글에 계좌를 밝히지 않은 건 지극히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남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주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초대도 안 하고 돈만 내라는 사람으로 비춰지기 싫어서’가 더 정확한 이유였던 셈이다. 너무 나만 생각했다.


그래, 직원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난처했을지도 모른다. 이걸 그래서 축의를 받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돈을 내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주변에서 으레 봐왔던 형태의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에 명확한 가이드가 필요했던 것인데, 그 표지판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계좌번호까지 지워버렸으니. ‘축하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해요’는 내 마음 속에서만 있던 말이었다. 이직을 포기할만큼 좋아했던 게 이 회사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너무 나만 생각했다.


게다가 꼭 축의금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귀찮은 절차를 하나 더 얹어준 셈이다. 축의는 어떻게 하면 되냐고, 또는 계좌번호는 어떻게 되냐고 직접 물어보는 절차 말이다.


결국 나는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을 누르고, 계좌번호를 포함한 결혼 재공지글을 게시판에 올리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글을 올리자 마자 즉각 반응이 왔다. 옆자리에서 같이 일하던 짝꿍이었다.


경희 : 와, 드디어 올려주셨네요! 그동안 주변에서 축의 어떻게 하냐고, 계좌번호 아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되게 많았었는데!


이제라도 글을 고쳐 올린 건 역시 잘한 일이었다.



결혼식 없는 결혼은 누구에게나 낯선 일이었다.


결혼 당사자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결혼이었다면, 하다못해 스몰웨딩이나 셀프웨딩 정도만 되었어도 참고할 수 있는 자료나 물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테지만, 단 한 명의 하객도 없는 결혼은 어디서 배울 수도 자문을 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 딴에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런 저런 시행착오들을 겪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부디 그런 시행착오들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귀여운 우당탕탕으로 보였었기를 소망한다.


BEHIND : 두둘의 이야기

저와 두팔이는 상황이 조금 달랐어요. 물론 저도 회사생활을 하는 월급쟁이 입장이기는 하지만, 결혼할 당시에는 원소속 회사가 아니라 전혀 다른 기관으로 장기파견을 나가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예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들한테 결혼한다며 연락하기도 민망했고, 지역이 아예 다르다보니 직접 얼굴보며 인사드리기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회사 경조사 게시판에 결혼한다는 공지는 회사 동기에게 부탁해서 올렸지만, 끝까지 계좌는 올리지 않았네요.

파견 중인 기관에는 아예 공지도 안 했어요. 사실 저는 정말 내향적인 성격이라 인싸와는 거리가 멀고, 부서 동료들은 있었지만 같은 회사라는 소속감도 없었거든요. 파견 기간이 끝나면 아예 남남이 될 사이라는 생각이 더 컸죠. 저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 파견 기관의 직원들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파견이라는 제도 자체가 어쩔 수 없이 그렇죠. 나중에 결혼에 임박해서야 부서 직원들이랑 부서장님께만 말씀을 드렸어요. 연차를 쓰느라 어쩔 수 없었답니다.

그런데 생각도 못 했는데 여기 저기서 축의를 해주셨어요. 처음에는 카카오페이로 보내주셨는데, 정중히 거절하곤 했어요. 그랬더니 이거라도 받아달라며 선물을 보내주시기도 하셨고요. 나중에는 통장으로 직접 송금을 해주시더라고요. 저는 아무한테도 제 계좌번호를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예전에 더치페이를 하며 알게 된 계좌가 알음알음 퍼져서 거기로들 넣어주신 거에요. 카카오페이는 거절하기 버튼이라도 있는데, 계좌는 다시 되돌려 드리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아직 미혼인 사람들은 미래에 자기한테도 똑같이 해달라면서 고집스레 주기도 했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결국 감사히 다 받았네요.

이런 걸 여러 번 겪다보니 처음부터 계좌를 공개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어요. 축하해주시는 마음은 너무 감사할 따름인데, 괜히 저희가 고집을 부려서 귀찮음을 드린 것 같았거든요. 만약 제가 두팔이처럼 아는 사람이 많은 상황이었다거나, 파견을 나와있지 않고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면 아마 저도 재공지를 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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