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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Oct 21. 2020

한 달 내내 라면을 끓여내신 어머니의 속

떡라면

아주 어릴 때에는 나름 살만했다고 한다. 동생이 태어날 때만 해도 괜찮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매년 여름마다 바다로 바캉스를 떠나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 차를 타고 속초 가는 길. 강원도 산등성이에서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구름이 새어들어오던, 그림동화 같은 풍경이 아직 선하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IMF. 집이 망했다.


초등학생 때였다. 게임에 빠져있던 때.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후다닥 컴퓨터 앞에 앉는 게 일과였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돌아와 인사를 하고 컴퓨터가 있는 방에 한달음에 들어왔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위화감. 컴퓨터가 통채로 사라진 것이다. 갑자기 없어질 물건이 아니었다. 비록 가정용 게임기 신세로 전락한 컴퓨터였지만, 앞으로는 컴퓨터의 시대가 될 거라며 부모님이 거금을 들여 사주셨던 놈이었다. 안방에 계신 어머니께 여쭈었다. 컴퓨터가 어디 갔냐고. 어머니는 듣기 좋은 말투로 차근히 설명해주셨다.


"음, 우리 집에 잠깐 문제가 생겼어. 테레비랑 장롱 같은 비싼 물건들 있지? 얼마 뒤에 아저씨들이 오셔서 그런 물건들을 다 가져가실지도 몰라. 컴퓨터를 계속 방에 두면 꼼짝없이 빼앗기고 말 거야. 그래도 괜찮아?"


"아니요..."


"그래. 엄마 아빠도 우리 아들 컴퓨터 계속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 그래서 잠깐 숨겨뒀거든. 우리집 옥상 지붕 밑에 조그만 공간 있지? 거기에 컴퓨터를 잘 숨겨뒀어. 아저씨들 왔다 가면 바로 다시 꺼내줄게. 지금 한번 같이 가볼까?"


"...네"


어머니를 따라 계단 한 층을 오르자, 옥상으로 나가는 철 옆에 돗자리로 얼기설기 가려진 한 무더기의 짐이 보였다. 컴퓨터였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 하는 컴퓨터의 모습이 괜시리 처량했다.


대체 누가 왜 우리집에서 우리 물건들을 가지고 가는 걸까.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건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어머니께서 설명하셨던 건, 빨간 딱지였다. 압류였다.


안타깝게도 그 컴퓨터가 다시 쓰이는 법은 없었다.



밥 때는 어머니께 고역이었다. 일을 하다 말고 자식들의 끼니를 챙겨주어야 하는 것도 그랬고,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걸 먹여주어야 하는 것도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자란 탓에, 맛있는 맛을 알아버린 자식들인지라 밥 챙겨주기는 더욱 까다로우셨을 거다.


어머니의 선택은 라면이었다. 타당하고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일단 값이 싸다. 라면만으로 쌀도 필요없다. 별다른 반찬도 필요 없다. 김치면 된다. 많은 부대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또한 간편하다. 일을 하면서 집반찬까지 만들기는 버거우셨을 터다. 라면은 칼질조차 필요 없다. 5분이면 뚝딱 완성이다. 게다가 맛있다. 기름에 튀긴 면에 MSG가 가득한 스프. 어머니의 아들딸은 라면을 좋아해왔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달랐을 거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었다.


라면은 매일 밥상에 올랐다.



어머니는 계속 노력하셨다. 운명에 체념하고 무기력하게 복종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의 입맛을 알기에, 조금씩 다른 라면을 끓여내려고 애쓰셨다. 어떤 날은 계란을 몇 개 넣어 휘휘 저어 끓이셨고, 어떤 날은 고춧가루와 파를 얹어 끓이셨다. 어떤 날은 냉동 만두도 넣으셨고, 어떤 날은 김치국물을 넣기도 하셨다. 오리지널 신라면, 하얀 국물의 사리곰탕면, 도톰한 면발의 너구리. 라면 종류도 겹치지 않게 하려 고민하셨다.


어린 나 역시 어머니의 발버둥을 느낄 수 있었다. 농도 짙은 노력이었다. 지금의 우리집은 라면이 아닌 메뉴를 차릴 여력이 없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 사내아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라면을 맛있게 먹는 것 정도랄까. 그래서였다. 끼니 때마다 다섯 살 어린 여동생의 말을 가로막으며 "와! 맛있겠다!"를 외쳤다. 여동생은 또 라면이냐고 투정을 부리려했기 때문이다. 과장된 몸짓으로 라면을 한 젓가락 크게 들어 또 먹어도 맛있다며 게걸스럽게 먹는 것. 어머니의 힘을 덜어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움이었다.



그 날은 떡라면이었다.


이미 라면은 먹을대로 먹어온 상황이었다. 한 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밥상에 라면이 올랐었다. 세 끼가 모두, 그러니까 하루종일 라면인 날도 있었다. 그 날은 라면이 아니길 바랐었다.


그러나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바스락거리는 비닐 포장 뜯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 냄새다. 앉은뱅이 밥상 위에 빈 그릇 몇 개와 수저, 그리고 라면 끓인 냄비가 얹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안방에서 밥을 기다리는 아들딸을 위해, 어머니는 라면이 차려진 밥상을 들고 오셨다.


어린 여동생은 다시 칭얼대려 했다. 라면이 싫다는 신호다. 평소였다면 과장된 환영으로 여동생의 말을 가로막았을 터다. 일부러 큰 소리로 맛있겠다고 외쳤을 거다. 하지만 그 날 여동생의 말을 가로막은 건 조금 다른 소리였다.


"와... 오늘도 라면이네...?"


일부러 밝고 높은 톤으로.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어머니가 알아차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짐짓. 중의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을 던졌다.


어머니를 보았다. 얼굴이 보였다.


후회했다.

후회하는 데에는 찰나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당혹스러움과 미안함이 절반쯤 섞여있는 표정.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날의 밥상에서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 하셨다. 약간의 더듬거리는 말. 오늘은 특별히 너희들이 좋아하는 떡을 넣었노라는 말. 민망스러웠다. 빈 공기에 어머니가 덜어주신 떡 라면 한 그릇.


꼬불꼬불한 면발 사이로 절반쯤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떡이 괜히 무안했다.



어른이 되었다. 취직을 했다. 공무원인 아들과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 다니는 딸. 어머니께 두 자식은 자랑거리다. 컴퓨터를 숨겨야 할 일은 없다. 한 달 동안 매일 라면을 먹어야 할 일도 없다.


취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술에 취한 날. 떡라면 사건을 어머니께 처음으로 말한 날이었다. 어머니께 여쭈었다. 그 때 기억나시냐고. 아직도 어머니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고. 그 날의 죄송스러운 마음이, 아직도 깊이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고. 정말 죄송했다고.


어머니는 되레 아들에게 미안하다 하셨다. 라면만 먹여서 미안하고, 그런 말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 하셨다. 너희들은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달라고 하셨다. 너희들은 자랑이라고 하셨다. 인생의 커다란 선물이라고 하셨다. 이미 너희들로부터 수많은 행복을 받았노라 하셨다. 어머니가 우셨다.


떡라면은 어머니의 땀이었다. 어린 아들에게 빨간 딱지를 설명해야 할 정도로 꺾일대로 꺾인 상황에서도, 가난이 휘두르는대로 휘둘리지 않고 자식을 위해 애쓰신 어머니의 몸부림이었다. 우리 남매가 각자의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된 건, 결코 우리의 공이 아니다.


가끔 동생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부모님 이야기가 꼭 나오곤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매번 다를지언정 결론은 항상 같다. 우리가 그 흔한 일탈 한 번 하지 않고 여기까지 자라날 수 있었던 건, 우리 가족 덕이라고. 부모님 덕이라고.


그러니까 더 이상 우리에게 가난으로 미안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 뿐이다. 누구보다 무겁고 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어느 누구도 맛보지 못한 떡라면을, 우리는 맛 봤다.



지금도 이 글을 보고 계실 어머니께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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