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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Nov 18. 2020

냉면 먹는 맘이 예전 같지 않다

평양냉면 : 마포 을밀대

걸레 빤 물 맛. 아기 오줌 맛.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맛. 이전까지 평양냉면에 대해 들은 맛 묘사였다.


살짝 늦은 평일 오후. 몇 십년은 됐음직한 짙은 구릿빛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버지와 함께였다.


몇 개 테이블에는 머리가 허옇게 샌 어르신들이 혼자 냉면을 한 그릇씩 드시고 계셨다. 검은 머리 손님은 아버지와 나, 딱 둘 뿐이었다.


분위기도 적막했다. 고요했다. 여기가 음식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여기 원래 이래요?"

"응, 여기 원래 이래."


어린 눈에는 신기하게만 보였던 풍경이, 이 집에서는 일상이었다.



주문한 냉면이 나왔다. 살짝 탁한 국물에 잿빛 면. 별다른 고명도 얹어져 있지 않은 심심한 모양새. 그간 고기집에서 먹어왔던 냉면과는 다른 종류의 음식이었다.


맛 역시 그러했다. 생김새를 쏙 닮은 맛이었다. 옅게 끓인 녹차물에 간을 하다 만 듯한 느낌. 이게 물인지 육순지 헷갈릴 정도로 슴슴한 맛. 얼음 때문에 이가 시리다는 것 정도가 유일한 자극이었다.


겁내던 만큼은 아니었다.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그렇지만 맛있다는 소리가 나올 맛은 아니었다. 그냥 그런 맛이었고, 굳이 내 돈 주고 사먹을 맛은 아니었다. 두 번 먹을 맛은 아니었다. 한 번 정도 맛봤으니 그걸로 되었다. 이거면 충분했다.


신비로운 일이 펼쳐진 건, 몇 주 뒤였다.



집이었다. 휴일이었고, 쉬고 있었다. 별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 밋밋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별안간이었다. 난데없이 평양냉면이 생각났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맥락도 없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생각이었다. 심지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먹을 음식은 못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마침 아버지가 집에 계셨다. 바로 말씀드렸다. 갑자기 평양냉면이 생각났노라고.


그 날 저녁, 평양냉면집을 다시 함께 찾았다.



다시 간 그 곳은 전보다 손님이 많았다. 아마 밥 때에 더 가까워서 그랬을 거다. 머리 검은 손님도 더러 보였다.


냉면은 몇 주 전 그 모습대로였다. 크게 떠서 입에 넣는 한 젓가락.


맞다.

이 맛 맞다.


여전했다. 속에서 강렬하게 잡아당기는 맛은 아니다. 화려한 맛은 아니다. 당장 또 먹고 싶은 맛은 아니다. 세련되고 트렌디한 맛은 아니다. 혀를 자극시킬 맛은 아니다.


그러나 묵직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맛은 아니지만, 강물처럼 무겁게 흘러가는 맛이었다. 남들이 뭐라해도 흘러갈 강은 흘러가듯이, 냉면의 맛이 그러했다. 평양냉면을 먹는다는 것 자체로 만족스러웠다. 그 존재가 스스로 맛이었다.


그렇게 평양냉면 애호가가 되었다.



평양냉면은 맛집이 많았다. 아버지를 쫓아 이 곳 저 곳을 따라다녔다. 이 집은 어떻느니 저 집은 또 어떻느니. 아버지는 당신이 알고 계신 구성진 이야기들을 냉면에 말아주셨다. 재미있었다. 입이 즐거웠고, 귀가 즐거웠다.


어느 날, 냉면집에 가는 길. 그 날의 냉면집은 을밀대였다. 이미 몇 번은 함께 갔던 곳이지만, 그 날 따라 아버지가 으시대며 말을 건네셨다.


"기가 막힌 걸 알아왔다. 얼.음.빼.고.양.많.이."


생뚱맞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이게 무슨 암호 같은 소린가 싶었다.


우습게도, 그건 정말 암호였다. 나 단골입네 하는 을밀대용 암호였다.



을밀대에 가서 냉면을 주문할 때, 암호를 슬쩍 얘기한다. 얼음 빼고 양 많이. 그러면 냉면이 살짝 바뀌어 나온다. 이를 시리게 했던 얼음은 사라지고, 면은 곱빼기가 된다. 가격도 같다. 이걸 이제야 알았다니.


진짜 재밌었던 건 영수증이었다. 거냉양많이. 우리가 이야기 한 암호가 영수증에도 선명히 적혀 나온다.


암호 주문으로 냉면 한 그릇을 마치고, 식후 담배를 한 대 피시는 아버지께 영수증을 들고 쪼르르 달려가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반쯤 오무린 입으로 연기를 내뿜으시며 자식놈을 향해 슬쩍 미소지으셨다.


다시 어린 아이가 된 듯 했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팔할이 먹는 거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사실 제일 값 싸면서 다양하게 펼쳐보여줄 수 있는 경험이 먹는 거다. 궁궐 같은 집에서 사는 경험, 주시고 싶었을 거다. 장 보듯이 명품을 사제끼는 경험, 주시고 싶었을 거다. 부다다닥 소리가 나는 스포츠카를 모는 경험, 주시고 싶었을 거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은 자식에게 주기 힘드셨을 거다. 이유는 단순하다. 돈이 없었으니까.


상대적으로 먹는 건 저렴하다. 의식주라지만, 고급 빌라에서의 경험이나 맞춤복의 경험보다는 맛집 경험의 가성비가 훨씬 낫다. 알뜰살뜰히 머리만 알차게 잘 굴리면, 정말 다채로운 경험을 줄 수 있는 게 맛집 경험이다. 짐작컨대, 그래서 팔할이 먹는 추억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쌓인 추억들은, 꽤 재밌다. 다행한 일이다.



이미 젊음의 꼭대기를 지난지 오래다. 내리막을 걷고 있는 걸 절절히 체감한다. 우리는 함께 늙어가는 처지다. 한 쪽이 늙어가고 한 쪽이 자라던 때는 지났다.


그렇지만 여전하다. 아직도 아버지와 맛집을 다니는 게 그렇게 재미지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맛난 음식을 함께 먹는 게 그렇게 흡족스럽다. 어머니의 안주로 아버지와 술을 마실 때면, 기분이 좋고 흥겨워서 몇 병이고 마시게 된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마음이 마냥 밝지만은 않다. 오롯이 기쁨으로만 가득하지는 않다. 앞으로 이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어질 화목함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섭다. 이러다 이 재미가 없어지면 어쩌나 싶다.


아버지는 예전 같지 않으시다. 살갗은 검어졌고, 그보다 더 검은 반점들이 얼굴을 잠식해나간다. 피부는 생기를 잃고 쳐져간다. 하다 못해 다리털마저 듬성해졌다. 그렇게 자신하시던 주량조차 줄었다. 취해감이 점점 빨라진다.



마주하기에는 버겁게 두려운 것들이 있다.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것만으로 서늘해지는 생각들. 그럴 때면, 애써 그것들을 무시한다. 이미 알지만, 내가 나를 속이려고 한다. 괜찮다고. 별 거 아니라고.


그러나 당연하게도, 속여지지 않는다.



겨울은 냉면의 계절이다. 분명히 이번 겨울에도 아버지와 냉면을 먹으러 갈 거다.

그러면 다시 또 느낄 거다.

불안한 행복함.

위태한 따뜻함.


그 무서움.

속여지지 않는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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