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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Oct 28. 2020

왕따는 참치김치볶음을 싸간다

참치김치볶음

부끄러운 고백을 하기 위해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본다.



나는 왕따다.


원래는 아니었다. 잘 어울렸다. 체육시간에는 몸을 부대끼며 공을 차기 바빴고, 쉬는시간에는 쉴 새 없이 장난을 쳤다. 생일날에는 친구들을 집으로 잔뜩 초대하기도 했다. 시장에서 사 온 떡볶이와 노릇하게 구워진 전기구이 통닭, 어머니가 직접 끓여내신 미역국까지. 차려진 음식도 많았지만, 찾아와준 친구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먼 동네로 전학을 간 친구가 부모님을 졸라서 찾아와주기까지 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모두가 피하기 시작했다. 왜일까. 말을 얼버무리는 아이들을 붙잡고 억지로 물어보기도 했고, 스스로 고민하기도 했다. 옷을 촌스럽게 입었나? 눈치 없이 못 할 말을 했나? 유행하는 게임을 안 해서 그런가? 냄새 때문인가?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억지로 반복하는 칫솔질에 애꿎은 혓바닥 벗겨질 뿐었다.


따돌림이 새로운 일상이 되니, 이전의 일상은 오늘의 상상이 된다. 실제 겪어 적었던 일기들이 허구의 소설이 되어버린다.


더 이상 체육시간에 몸을 부대낄 일은 없다. 공 하나를 휙 던지며 자유롭게 놀라는 체육선생님의 말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차라리 강제로 짝을 지어 체조라도 시켜줬으면 좋겠다. 모두가 운동장 한 가운데서 공을 쫓는데, 왕따는 본인에게 공이 올까 도망다닌다. 모두가 다같이 축구를 할 때, 왕따는 혼자 피구를 한다.


쉬는시간에 장난칠 사람은 없다. 장난질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수업시간이 끝나가는 게 두렵다. 차렷, 경례를 하고 선생님이 교실을 나서면, 재빠르게 고개를 파묻고 책상 위에 엎드린다. 어서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잠은 시간을 지운다. 짧은 쉬는시간이 지워지면, 다시 평화로운 수업시간이다. 조별 수업이 아니라면 말이다.


생일은 없다. 그러니까 축하도 없다. 학교에서 왕따는 태어남을 축복받지 못하는 존재니까. 없는 게 나으니까.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학교에서는 급식을 했다. 그런데 난 데 없이 올해부터 급식이 중단됐다. 급식실이 있는 오래된 건물을 다시 짓는데, 급식실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는 급식을 못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잠깐동안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게 됐다.


아이들은 이 작은 변화를 즐거워한다. 그럴 법 하다. 급식에서 식판에 오르는 반찬은 고작 세 가지 쯤. 그다지 맛있지도 않다. 그런데 도시락을 싸오면 얘기는 달라진다. 몇 명이 함께 모여 밥을 먹기 때문이다. 각자 반찬을 세 가지씩만 싸와도 셋이면 벌써 아홉가지다. 넷이면 열두가지, 다섯이면 무려 열다섯가지다. 그러니까 모든 아이들에게 지금의 점심시간은 이전보다 더 풍족한 시간이 된 거다. 단 한 사람, 왕따를 빼고.


늘어난 반찬의 수만큼 신났기 때문인지, 점심 시간은 이전보다 더 소란스러워졌다. 4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서로의 책상을 끌고 친구의 책상에 붙여댄다. 책걸상 끄는 소리, 도시락통 여는 소리,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한 데 뒤섞인다. 소음이 커졌기 때문에 아이들의 목소리도 따라 커진다. 결국 소리지르다시피 얘기하지 않는 이상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왁자지껄이라는 말이 얌전하게 보일 정도로 시끄럽기 그지없다.


왕따는 홀로 고요하다. 책상 옆면에 달려있는 고리에 걸어둔 원기둥 모양의 보온 도시락을 얌전히 꺼낸다. 도시락 주머니의 지퍼를 열 때도 조심이다. 왠지 이 소란스러운 풍경에 왕따가 내는 소리가 섞이면 안 될 것 같다. 이 교실은 왕따를 위한 자리가 아니다. 왕따는 책상도 의자도 옮기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은 채 조용히 수저만 움직인다. 태풍의 눈 같다. 왕따는 멈춰있지만 주변은 요란하다. 말하고보니 딱 맞는 비유는 아닌 것 같다. 태풍의 눈은 태풍의 중심이지만, 왕따는 교실의 끝자락 어딘가 간신히 매달린 존재이니까.


변화는 우연히 찾아왔다.


우리 반에는 돌멩이라고 불리는 아이가 하나 있다. 실제로 머리가 나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성이 석씨여서 붙여진 별명 같다.


점심시간이면 돌멩이는 여기 저기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도통 자리에 앉아있는 법이 없었다. 숟가락포크를 하나 들고서는 남의 반찬을 한 포크씩 먹고 다닌 것이다. 그러니까 돌멩이에게는 매일이 뷔페였다. 왕따는 돌멩이가 부러웠다.


그 날도 같은 일상이었다. 아이들은 소란스럽고 풍성한 식탁을, 왕따는 고요하고 단촐한 도시락을 차렸다. 왕따의 차림은 참치김치볶음이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신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반찬. 왕따는 참치김치볶음을 좋아했다. 어머니의 반찬을 좋아했다. 어머니를 좋아했다.


왕따가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을 때, 누군가 불쑥 왕따의 영역을 침범했다. 돌멩이였다. 고개를 들어 돌멩이의 얼굴을 보는 사이, 어느새 돌멩이의 숟가락포크는 어머니가 싸주신 참치김치볶음을 뜨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말도 못 하고 머뭇대는데, 벌써 참치김치볶음은 돌멩이의 입으로 쑥 들어갔다. 그런데 이어진 돌멩이의 반응은 미처 예상하지 못 한 것이었다.


"와, 얘네 엄마 참치김치 진짜 맛있다!"


진심 어린 감탄. 돌멩이는 조금 더 먹어도 되냐며, 몇 번인가를 더 집어먹더니, 아예 의자를 가져와 밥을 먹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교실에서 누군가가 선뜻 나한테 다가오는 게 얼마만인지. 하나의 책상에 두 사람의 수저가 놓인 장면이 참 생소했다.


"야, 너 내일도 이거 싸올 수 있어?"


그 때부터 왕따는 참치김치를 싸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참치김치가 그렇게 좋느냐고 물어보신다. 그렇게 자주 먹으면 질리지 않느냐고 하신다. 나는 대답한다. 전혀 물리지 않는다고. 맛만 좋다고. 친구들도 난리를 친다고. 인기 폭발이라고.


사실은 아니다. 질리기도 한다. 똑같은 반찬을 일주일에도 몇 번씩 먹는데 어떻게 안 지겨울 수가 있을까.


반대로, 전부 빼앗기다시피해서 못 먹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맨밥을 억지로 씹어 겨우 삼킨다. 짭짤한 반찬은 다 비었는데 밥만 남겨가면 어머니가 이상하게 여기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참치김치만 있다면 교실 구석에서 혼자 밥 먹는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조금이나마 왕따임을 잊을 수 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최소한 돌멩이만이라도 참치김치를 계속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제발 이 반찬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점심시간은 외딴 시간이 될 테니까.


그래서

왕따는 오늘도 참치김치를 싸왔다.



나이가 먹으면 입맛도 바뀐다지만, 별로 공감이 되지는 않는다. 어렸을 때건 지금이건 왕성한 식욕 탓에 가리는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도 지금도 계란물 입힌 분홍 소시지에 케첩을 뿌려먹는 걸 좋아한다. 선홍빛 생간을 기름장에 콕 찍어먹는 것 역시 변함없이 좋아한다. 예외가 있다면, 참치김치볶음이다.


여전히 맛은 있다. 맛 없기가 힘든 음식이다. 그러나 혀가 아닌 가슴이 밀어낸다. 참치김치볶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의 아린 기억들이 떠오른다. 진한 카페인 음료를 마신 것처럼 심장이 두근댄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게 된 거다.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수 천 밤이 더 지난 오늘도 아물지 않았다. 앞으로 몇 번의 밤이 더 지나야 이 기억이 옅어질지 모르겠다. 아직도 악몽을 꾼다. 식은 땀을 흘리며 저린 손발을 만지며 새벽에도 벌떡 일어난다.


따돌림은 한 사람에게서 음식 하나를 영영 앗아가버렸다.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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