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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행, 첫 술, 다시 밤바다

소주 : 대선 C1

by 간장밥

첫 여행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보름쯤 남겨둔 즈음. 친구놈과 둘이 부산으로 향했다.


그 놈 역시 첫 여행이었다.



스스로에게 썩 유쾌한 출발은 아니었다. 축하연이 아닌 위로연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의 도전. 고입과 대입.

그리고 두 번의 실패.

고입과 대입.


부산 여행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고안한 나들이였다.



크게 속 썩이지 않고 자라왔다. 남들이 다 한다는 일탈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집을 나간 적이 없음 물론이거니와 소주 한 잔 마시지 않았다. 나름대로 착한 아들이었을 거다.


우리 둘 모두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의 여행은 무탈할 수 없었다. 가정이나 학교라는 울타리가 없는 벌판에서의 첫 걸음마. 몇 번씩 넘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산역에서 내리면서부터였다.


본인들 몸통만한 캐리어를 끌고 미어캣처럼 좌우를 휙휙 둘러보는 두 남고생. 젖비린내가 지워지지 않은 두 호구는 참 먹음직스러운 먹이였을 거다.


"어데 가는교?"


단단한 목소리. 피부가 그을은 택시기사가 접근했다. 두꺼운 살갗에 깊게 패인 주름과 팔뚝까지 걷어올린 소매 밑으로 슬쩍 보이는 이름 모를 흉터들이 이유 없이 무서웠다.


"아, 저희 버스 타러 가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본능적으로 포식자의 냄새를 맡고 둘은 자리를 황급히 피했다. 때때로 겁은 정말 도움이 된다.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나름대로 고급 호텔. 체크인을 위해 로비 데스크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저, 여기 예약을 했는데요."


너무나도 일상적인 말이었지만, 직원의 반응은 당황스러웠다.


"네...에?!"


끝이 올라간 어투. 네?그런데요?와 같은 느낌이었다.


"두 분...이세요...?"


영문을 모른 채 그렇다고 대답했다. 편의상 예약은 부모님 이름으로 했다는 말과 함께.


"죄송하지만... 두 분은 체크인하실 수 없습니다. 20세 이상의 성년과 함께 오셔야 합니다."


말그대로 날벼락. 상황을 한참 설명해도 호텔측은 요지부동이었다. 부모님과의 전화 연결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미성년인 두 분께서는 체크인을 하실 수 없습니다."


결국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새로운 숙소를 잡아주시기까지, 우리는 PC방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짐을 끌고 해변을 걸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원정게임. 3시간이 걸려 도착한 부산에서의 첫 일정이었다.



간신히 도착한 새로운 숙소. 이미 계획했던 스케줄은 다 틀어져버렸다.


여유있는 모래사장 산책, 동백섬과 누리마루의 풍경 관람. 가능한 시간대가 아니었다. 분명 오전 기차를 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저녁시간이 가까워왔다.


첫 여행이라는 긴장 속. 연달았던 일들. 헝크러진 일정. 진이 빠질 법했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른 게 회였다.


옷을 챙겨입고 숙소 앞으로 나가서 택시를 부른다. 오래지 않아 차가 도착한다.


"광안리 횟집 센터로 가주세요."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계신 기사님은 부산역 앞에서 뵈었던 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상시 장착하고 있는 미소와 행동 하나하나에 배어있는 친절.


"회 드시게요? 그럼 광안리로 가지말고 해운대 쪽이 낫죠."


말투에서는 바닷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래, 토박이시구나. 택시 기사라면 동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TV에서도 본 적이 있다. 맛집을 제일 잘 아는 직업이 택시 기사라고. 우리는 행선지를 기사님께 맡겼다.


"해운대에 잘 하는 횟집이 있나요? 그럼 거기로 가주세요."


"네~ 제가 잘 아는 횟집으로 모실게요~"


무언가 신났다. 그 신남의 이유를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길이 험했다. 언덕을 오르기도, 비탈길을 내려가기도 했다. 왼쪽으로 한참을 가더니, 다시 오른쪽으로 한참을 갔다. 네비도 지도도 없는 상황에서 길을 아는 건 오직 기사님 뿐이었다. 우리는 불안한 마음에 뒷좌석에서 수근댔지만, 기사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건지.


당초 예상했던 금액의 두 배쯤 되는 숫자가 요금계에 찍히자, 비로소 횟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택시는 우리를 횟집 앞에 떨구고, 제까닥 왔던 길로 돌아갔다.


휑했다. 주변에 다른 식당은 없었다. 심지어 컴컴했다. 불이 켜진 곳은 오직 그 횟집 하나였다.


휑한 것은 주변 뿐이 아니었다. 횟집 안에도 손님은 전혀 없었다. 우리 둘 뿐이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떨떠름하게 자리에 앉는 우리. 횟집 아주머니가 다가오셨다.


"뭐 먹을 거니?"


"모듬회 주세요. 얼마에요?"


"얼마 줄 건데?"


'...?!'


놀랐다. 식당에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경매장인가. 선제시라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뉴가 없다. 가격이 없다. 정찰제가 아니었다. 대체 이 곳은 어디란 말인가.



"너희 학생이지?"


횟집 아주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원래 모듬회 제일 작은 게 8만원인데, 학생들이니까 특별히 7만원에 줄게."


택시기사의 얼굴이 스쳐갔다. 우리가 오늘 내는 횟값 중에서 얼마가 그 사람에게 갈까. 택시기사와 아주머니가 마치 사기패처럼 보였다.


사기에는 사기지. 뻥카를 날렸다.


"우리 할머니 고향이 부산이세요. 3만원이면 씨름부 둘이서도 먹고도 남을만한 회를 산다고 하시던데요? 보통 2만원이면 된다시던데?"


할머니 고향은 충청도다.


"그건 막회집이라고, 아무렇게나 쓱쓱 썰어서 초장만 덩그러니 주는 경우지. 그런 가게들은 또 얼마나 더럽다고. 우리집은 달라. 아주 위생적이고 정교하게 회를 떠. 스끼다시도 얼마나 괜찮다고. 나오는 거 보면 깜짝 놀랄걸?"


어린 학생의 뻥카는 짬이 가득 찬 베테랑 아주머니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렇지만 계속 되는 협상 끝에 결국 5만원에 합의를 보았다.


"우리가 진짜 이렇게 판 적이 없어. 돈 없어 보이는 학생들이 부산까지 놀러왔다니까 특별히 해주는 거야. 대신 다음에도 꼭 와야 된다?"


아주머니는 계속 여운을 주었다.



곧 나온 회는 가관이었다.


우선 양. 아주 작은 크기의 회가 세 점씩 열두 덩이. 세 점을 이어붙여봐야 평소에 먹던 회 크기가 간신히 될까. 두껍지도 않았다.


그리고 맛. 이미 일부를 사용한 생선을 보관해놓았다가 내어주었나 싶은 만한 맛. 생선살이 머금고 있어야 할 수분마저 없었다. 서울의 싸구려 해산물 뷔페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또 그렇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서울 말투를 쓰는 풋내기 둘이 찾아왔는데, 이 탐스러운 먹이를 어떻게 가만 두겠는가. 곱게 돌려보낼리가 없다.


종일 마음이 상했던 하루. 마지막 끼니인 저녁조차 호구 당한 상황. 우리는 어두웠다. 여행답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 때 눈에 띈 것이 소주였다. 부산소주. C1.



"야, 우리 소주 마셔볼까."


일탈은 아니었다. 이미 법적으로는 어른이었으니까.


그러나 일탈이었다. 한 번도 마셔보지 않았던 술을 진짜 어른처럼 저녁과 함께 해보다니. 일상과 달랐다.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었다.



한 병이 나온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어딘가 멍청해보이는 초록빛. 값 싸보이는 두꺼운 유리. 그 속에 병목까지 차오른 액체.


표면에는 자잘한 이슬들이 맺힌다. 차갑게 냉장보관이 되어있던 모양이다.


각자의 앞에 놓인 작은 유리잔. 반 뼘쯤 될까. 무색투명한 알코올 냄새가 따라담긴다. 넘치지 않게. 7할 정도.


잔을 가져와 입술에 댄다. 술이 혀 끝에 닿기도 전에 향은 이미 코 속으로 들어가있다. 맛보다 향을 먼저 보는 음식. 이게 술이구나. 탁. 털어넣는다. 달큼한 맛이 슬쩍 돈다.


소주가 입 안 구석에 닿기 전에 목구멍 뒤로 얼른 넘긴다. 술이 잠시 머물렀던 자리에는 맛보다 짙은 향이 남는다. 인위적인 것 같으면서도 깔끔한 향이다.


향으로 시작해서 맛을 지났다가 다시 향으로 끝나는 음식. 이게 소주였다.


맛.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대로 기분이 좋아졌다.



먹고 마시는 게 이렇듯 신기하다. 종일토록 지쳐있던 심신을 순식간에 회복시킨다. 행복을 만들어낸다. 그 어떤 행위와도 견주어봐도 뒤지지 않는다.



첫 여행에서의 첫 술. 맛있는 음식과의 첫 만남.


소주와 초면이었지만 금새 잘 어울렸다. 평생 함께 할 친구를 만난 기분. 흥이 살짝 올랐다. 그대로 향한 곳은 광안리. 밤바다였다.


밤바다와는 구면이었다. 그렇지만 밤바다는 볼 때마다 압도적이었다. 만물의 시야를 닫아버리는 검정색. 새까만 어둠을 짓눌러 묻고 있는 듯한 모습. 철썩이는 소리만으로 전신을 휘감아치는 웅장함. 그 거대함.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대로 빨려들 것 같아,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보고, 보고, 보았다.

눈에 담다가 흘러넘친 바다가 우리를 다 잠기게 할 때까지.


다시 밤바다, 다시 밤바다.

마음이 말했고, 몸이 따랐다.


바다는 우리를 도취시켰고, 우리는 바다에 도취되었다.



음식은 행복이다.

그러니까 식음은 행복해지는 일이다.


요리는 행복을 제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리사들은 모두 천국에 가야 마땅하다.


소주 한 병. 천원짜리 그 음료 하나가 친구와의 첫 여행을 살렸다.



물론 모든 음식이 행복은 아니다. 맛있는 음식은 따로 있다.


맛있는 음식은 대개 각자에게 맛있다. 예외 없이 모두에게 맛있는 음식이란 없다.


직접 먹어봐야 비로소 행복인지 알 수 있다. 남들이 맛있다고 해도 내게는 아닐 수도, 남들이 아니라고 해도 내게는 맛있을 수도 있다. 평생을 함께 할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소주와 만난 그 날처럼.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그래서 즐겁다. 불확정적인 행복을 찾아다니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다.


식도락. 맛으로 인한 즐거움. 행복. 미각이 다할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오늘도 반복해서 고민한다.

오늘 저녁 뭐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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