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어려서 돌아가셨으니, 할어버지와의 기억은 없다. 그러나 추억은 있다. 할아버지가 어린 나를 안은 모습. 할머니가 노상 보여주신 사진 속 포즈다. 어쩌면 세뇌된 추억이지만, 어쨌든 머릿속 사진첩 한 켠에는 할아버지가 나를 안고 있는 그림이 잘 저장됐다.
추억된 할아버지는 가끔 꿈에 나오시곤 했다. 신기하게도 할아버지가 꿈에 나오시면 꼭 좋은 일이 있곤 했다.
그 날도 그랬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날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밥은 참 맛있게 먹곤 했는데, 간식은 그닥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과자를 먹는다면 열 중 여덟은 치토스였다. 치토스는 어린 시절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과자 중 하나였고, 제일 좋아했던 과자였다.
그 날도 치토스가 먹고 싶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시장 중간쯤 있는 슈퍼를 지날 때, 치토스가 먹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평소에 워낙 군것질거리 사달라는 말을 안 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선뜻 과자를 사주셨다.
마침 치토스는 이벤트 중이었다. 추첨을 통해 경품을 주는 행사였는데, 물건이 나름 괜찮았다. 한 봉지를 더 주기도 했고, 모자를 주기도 했고, 어디 여행인가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제일 탐났던 건, 새빨갛게 강렬한 치토스 잠바였다. 요즘이야 곰표 패딩점퍼, 하이네켄 모자, 참이슬 백팩을 돈만 주면 살 수 있지만, 그 때만해도 식음료회사와 의류회사의 콜라보 상품이 없던 때였다. 그러니까 치토스 잠바는 꽤나 유니크한 아이템이었다. 또래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만했다. 순전히 치토스를 먹고 싶어서 샀지만서도 치토스 봉지 뒤에 그려진 잠바 그림에 자꾸 눈이 갔다.
그리고, 정말 됐다.
할아버지가 꿈에 나온 다음 날이었다.
소설처럼 딱 치토스 잠바가 당첨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이벤트에 당첨이 된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하필 탐나던 딱 그 상품. 잠바를 가지러 직접 오리온 본사를 찾아가야했고, 신이 잔뜩 난 채로 어머니와 함께 회사를 방문한 기억이 난다.
남들 눈에는 우연처럼 비추어질 수 있겠지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가 당신의 손자가 갖고 싶다는 치토스 잠바를 하나 선물해주신 거다.
모양은 야구점퍼에 가까웠지만, 재질은 바람막이에 더 가까웠다. 얇은 비닐 소재였고 보온재가 충전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한동안 치토스 잠바만 줄창 입고 다녔다. 치토스 잠바를 입으면 왠지 춥지 않았다. 뭔가 든든했다. 누군가가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어렸을 때는 치토스 밖에 몰랐다. '과자'하면 '치토스'였다. 어린 내가 알고 있는 과자가 많아봤자 몇 개나 됐었겠는가.
할아버지가 그랬다. 비록 티키타카 얘기를 주고 받은 기억은 없었지만, 할아버지는 어린 내가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의 큰 일부였다.
시간이 흘렀다. 머리는 커지고 기억은 쌓였다. 나의 사회는 점차 확장되고, 아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할아버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갔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죽은 사람이었다. 일 년에 세 번, 제사와 차례로만 만나는 사람이었다. 할어버지는 더 이상 세계의 큰 일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갔다.
치토스 역시 그러하다. 어려서는 과자가 곧 치토스였다. 과자라는 세계에서 치토스는 제왕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맛있는 과자들이 너무 많이 나왔다. 과자 뿐 아니라 맛있는 음식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자연스레 치토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런 날이 있다. 콕 집어 치토스를 먹고 싶은 날. 그런 날, 치토스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 아무리 고급스러운 케이크래도, SNS에서 핫하다는 디저트래도, 치토스를 먹고 싶은 날에는 오직 치토스만이 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다. 비록 비중은 줄었을지언정, 치토스는 내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치토스는 이미 내게 의미가 크다.
할아버지도 그렇다. 어른이 된 나에게, 할아버지는 수 많은 아는 사람 중 하나다. 서로 유려하게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내게 갖는 의미는 크다. 단지 일 년에 세 번 만나고 마는 사람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다. 그 어떤 사람도 할아버지를 대신할 수는 없다. 할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없다.
할아버지가 주신 잠바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져 버렸다. 요즘은 꿈에 잘 와주시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마트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치토스처럼 마음 속 한 켠은 할아버지 코너로 공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