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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이 함께였던 어머니의 감

단감

by 간장밥

그래도 이만하면 꼬마의 집은 화목했다. 꼬마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급격히 굴러떨어지는 중에도 집에는 웃음이 있었다. 꼬마는 알지 못했다. 최소한 십 년은 더 지난 뒤에 깨닫게 되었다. 위태로운 화목함을 위해서,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갈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당시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 중 하나는, 저녁 이후 과일 먹는 모습이었을 거다. 앉은뱅이 식탁에 가족 몇이 둘러 앉아 밥을 다 먹고나면, 어머니는 허리를 굽힌 채 밥상을 방 밖으로 내신다. 그리고는 쟁반 위에 과일 몇 개와 접시, 과도를 함께 들고 다시 들어오신다. 사각사각. 어머니가 과일 껍질을 벗겨내어 접시에 올리시면, 나머지 가족들이 낼름 과일을 집어간다. 어머니의 손 끝에 피어난 과일 속살은 가족들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달큼한 후식이었다.


꼬마는 어지간한 과일을 다 좋아했다. 은밀한 산미가 나는 사과도 좋아했고, 베어물면 즙이 줄줄 흐르는 배도 좋아했고, 씨앗을 다 발라낸 민둥산 참외도 좋아했다. 그렇지만 역시 감을 빼놓을 수 없었다. 물렁감. 너무 단단한 단감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녹아내리는 홍시도 아닌 것이, 손 끝에서 미끌거릴 만큼 물렁해진 감. 식감도, 맛도, 향도, 모든 게 꼬마 취향이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감을 사오실 때면, 꼭 과일장수에게 감 상태를 확인하곤 하셨다. 과일장수로서는 단감도 홍시도 아닌 애매한 상품을 처리하기 난감했을 터라, 우리 어머니 같은 손님이 참 반가웠을 거다.



꼬마가 감을 좋아한 이유는 또 있었다. 숟가락 보는 재미였다.


어머니가 꼬마에게 감을 깍아주실 때면, 꼭 숟가락을 함께 내어주셨다. 밥 먹을 때 쓰는 스댕 숟가락이 아니라, 감 씨앗 속에 숨겨진 숟가락 말이다.


감 씨앗 속에서 숟가락을 꺼내는 것은 은근히 귀찮은 일이다. 감 씨앗의 좁은 날을 지상으로부터 수직 방향으로 세운 뒤, 정확히 절반쯤 되는 지점을 칼로 잘라 쪼개야 한다. 아구가 들어맞지 않게 자르면, 숟가락은 여지 없이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뽀얗고 화사해서 마치 요정이 사용할 것 같은 앙증맞은 크기의 숟가락. 꼬마는 이 숟가락을 미니 숟가락이라 부르며 즐거워했다.


어쩌다 모양이 예쁘게도 나왔다 치면, 꼬마는 한참을 신기해하며 쳐다보곤 했다. 씨앗을 반으로 가른 것 뿐인데, 그게 뭐라고. 꼬마는 감을 먹을 때마다 소소한 재미를 누릴 수 있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감 씨앗 속 숟가락을 보며 행복해하진 않으셨겠으나, 씨앗에 들어갈 듯이 고개를 파묻고 반으로 갈린 감 씨앗을 바라보는 꼬마를 보며, 여러 감정들을 느끼셨을 거다. 예쁨. 행복. 사랑. 평화. 따뜻함. 은은함. 화목함. 또 어떤 단어가 어울릴까.


저녁 쟁반 위에 감이 오를 때마다, 어머니는 씨앗 속 숟가락을 꺼내 꼬마에게 건네주셨다.


하지만 어머니와 꼬마는 이제 함께 과일을 먹기가 힘들다. 금세 키가 커버린 꼬마가 타지에 있는 직장을 다니며 혼자 자취를 하는 까닭이다. 어머니가 깎아주는 과일은, 이제 일 년에 몇 번 먹지 못하는 처지다.



귀찮음. 꼬마가 자취를 하며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이다.


꼬마가 천성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스의 돌덩이 같은 집안일들은 꼬마를 귀찮게 하기 충분했다. 치워도 치워도 바닥에는 머리카락이 굴러다니고, 빨아도 빨아도 빨래감은 계속해서 쌓였다.


그래서 꼬마는 가급적 일을 벌이지 않는다. 밥을 먹는다 쳐도 그릇을 꺼내지 않는다. 꼬마에게 냄비는 조리도구이자 식기가 된 지 오래다. 심지어 상도 차리지 않는다. 인덕션은 그 자체로 식탁이 된다. 몇 년 간의 자취생활 끝에 꼬마가 터득한 설거지 최소화 식사 방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일을 먹을리 만무하다. 감 씨앗을 세로로 잘라서 숟가락을 보건 말건,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먹지조차 않는다. 먹지 않아도 되는 과일을 굳이 왜 사오며, 집 안에서 보관은 어떻게 할 것이며, 과일을 깎는 것도 귀찮은데, 깎고 나면 하다못해 과도라도 설거지를 해야 하고, 과일 껍질도 뒷처리가 필요하다. 이렇게 귀찮음 투성이인 일을 꼬마가 할 리가 없다.


꼬마의 삶에서 과일은 사라졌다. 감 씨앗 속 숟가락과 함께.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머니도 사람인데, 귀찮음이 없진 않으셨을 거다.


그러나 짐작컨대, 그 시절 그 때의 어머니는 귀찮음을 인식조차 못 하셨을 거다. 그만큼 자식놈의 웃음은, 당신에게 아편 같았을 테니까. 그 웃음이 주는 행복이 너무 커다랐던 나머지, 귀찮음에 대한 인지 능력은 마비되었을 거다.


어머니는 본인의 수고로움은 미처 생각지도 못 하셨을 거다. 그래서 매번 감 씨앗에서 숟가락을 꺼내어 주셨을 거다.



애진작에 어머니는 환갑을 넘겼다.

꼬마도 서른을 한참 넘겼다.


하지만 집에서 어머니가 감을 깎아 주실 때면, 서른 넘은 꼬마는 환갑 넘은 어머니를 조른다. 씨앗에서 숟가락을 꺼내달라고 한다.


어머니는 꼬마에게 쿠사리를 하신다.


니가 애냐.

니 나이가 몇이냐.

엄마 귀찮게 좀 하지 마라.


하지만 꼬마는 어머니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조름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 어머니는 마지못해 씨앗을 반으로 갈라내신다.


언제나처럼,

씨앗에는 뽀얗게

하얀 숟가락이 들어있다.


언제나처럼,

꼬마는 미니 숟가락을 보고 헤헤 웃고

늙은 어머니는 꼬마를 보며 기분 좋게 혀를 차신다.


참나원.

그게 그렇게 좋아?


어머니가 묻고,


헤헤, 응.


꼬마가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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