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새집으로 이사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날 저녁. 아직 가구가 다 들어오지 못해 휑한 침실에 커다란 침대가 덩그라니 놓여있다. 퀸도 킹도 아닌, 무려 라지킹 사이즈의 청록빛 페브릭 침대. 다른 건 몰라도 잠자리만큼은 좋은 걸 해주고 싶다던 여자친구(지금의 아내, 두둘)의 통큰 선물이었다.
그 날, 우리는 저녁을 양껏 먹은 탓에 잔뜩 포만감이 올라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집에 놀러온 여자친구는 얼굴을 마주 보게 돌아누워 내 팔을 베고, 자신의 한쪽 다리를 내 몸 위에 턱 얹어놓았다. 팔과 몸을 누르는 약간의 무게는 은근한 향기에 가려 잊혀지고, 별다른 대화 없이 고요한 행복이 이어진다.
그렇게 잠시의 침묵이 있은 후, 나(두팔)는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언젠가 반드시 해야만했던 이야기. 마음을 다잡고.
두팔 : 있잖아요, 그...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두둘 : 당연하죠!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요
뜸을 들일 수밖에. 우리 미래를 정할 중차대한 질문인데.
두팔 : 뜬금 없지만 혹시 웨딩 로망 있나요?
두둘 : 웨딩 로망이요?
프로포즈는 아니었다. (프로포즈는 안 했었지만)결혼은 애진작에 하는 쪽으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물어본 건, 결혼 얘기가 아니라 결혼식 얘기였다.
두팔 : 네네, 그러니까 뭐, 바라는 결혼식의 모습? 그런 거 있잖아요, 물 속에서 하고 싶다거나, 아니면 외국에서 하고 싶다거나?
두둘 : 아니 이게 뭐람. 오빠 물속에서 결혼하고 싶어요?
두팔 : 아뇨 나 말고~ 내 여자친구가 어떤 결혼식 하고 싶나 해서요~
두둘 : 그거 물어보려고 했어요? 귀여워!
두팔 : 그래서 웨딩 로망이 뭐에요
두둘 : 음, 나는...
골똘히 생각하는 여자친구. 긴장. 무슨 대답이 나오려나.
두둘 : 딱히 없어요!
의외의 대답. 곧이 곧대로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두팔 : 왜 여자들은 보통 그런 거 있지 않아요? 꿈꾸는 결혼식의 모습?
두둘 : 음, 난 정말 없는 것 같아요
대답은 같았다.
놀람 반, 다행 반. 나는 안도의 한숨을 짧게 삼키며 생각했다. 이거 잘하면 될지도 모르겠다고.
두둘 : 오빠는요?
자, 이제 나의 턴.
두팔 : 사실 나는....
두둘 : 뭔데 이렇게 또 뜸을 들여요!
두팔 : 내 웨딩 로망은 노웨딩이에요! 결혼식 안 하는 거
저질러버렸다. 커밍아웃. 여태 슬쩍이라도 내비치지 않았던 얘기였다. 여자친구는 아예 처음 듣는 얘기.
이제 여자친구의 반응을 살필 차례다.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다는 남자친구의 말을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받아들일까.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결코 일반적인 로망은 아니잖는가.
두둘 : 음... 괜찮을 거 같아요
곧 나온 대답은, 또다시 의외의 것이었다. 꽤나 다행스러운 편이었지만, 동시에 쉽게 상상하기 힘든.
혹시 이 사람도 결혼식을 안 할 생각을 했었던 건가?
두팔 : 엇 정말요? 원래 결혼식 안 하는 것도 생각했었어요?
두둘 : 아니요. 결혼식을 안 한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결혼식 안 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네요. 난 분명히 결혼식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울 건데, 안 그래도 되고요.
진짜였다. 여자친구는 정말 괜찮아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려도 되나.
순간 설렁탕이 떠올랐다. <운수 좋은 날>의 그 설렁탕. 불안하리만큼 잘 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그러고보니 이게 다가 아니다. 여자친구만 괜찮아서는 안 된다. 더 큰 산이 있었다.
두팔 : 어머님 아버님은 괜찮으실까요.
두둘 : 엄마 아빠한테는 내가 말하면 돼요. 엄마 아빠는 어차피 동생 결혼할 때 결혼식 해보면 되지.
선뜻 노웨딩을 받아들여준 것을 넘어,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걱정하지 말라는 여자친구. 세상에 이보다 더 든든한 대답이 있을까.
설렁탕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두둘 : 아, 대신 나 하고 싶은 건 하나 있어요.
결혼식도 안 한다는데, 뭐가 문제겠는가. 양심이 있다면, 뭐가 됐든 마땅히 받아들여야지.
두팔 : 오 뭐에요
두둘 : 나 반지요! 웨딩링은 백화점에서 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어요.
반지라니.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소박했다. 게다가 반지, 그거 어차피 선택권이 신부에게 있는 아이템 아니었나.
두팔 : 그런 건 얼마든지요! 결혼식 안 하는 거 빼고는 원하는대로 다 하시죠. 난 뭐든지 다 찬성이에요.
두둘 : 히히 고마워요.
두팔 : 그럼 우리 결혼식은 안 하고 결혼반지는 백화점에서 하는 걸로?
두둘 : 네 좋아요! 빨리 고르러 가고 싶다!
연애를 시작한 지 3개월쯤 됐을 무렵, 우리는 결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3개월쯤이 더 지났을 무렵에는 결혼을 넘어 결혼식의 모습까지 원만히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린 결혼식 없이 무사히 결혼을 했다. 이런 저런 말들도 많았고, 남모를 압박과 스트레스, 심지어 헛소문에까지 시달렸지만, 어찌됐든 성공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는 두려움이 많았다. 결혼식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는 게 보통일 텐데. 만에 하나 로망까지는 아니더라도, 드레스는 한번 입어보고 싶어할 테고, 스드메니 웨딩투어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 딸내미 시집 보내는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서라도 결혼식은 마땅히 해야하는 것으로 믿고 있을 텐데.
아니었다. 막상 얘기를 하니, 겁 먹었던 게 머쓱할 정도로 아무런 부딪힘 없이 스르르 해결되었다. 오히려 본인 집은 본인이 맡아 얘기하겠다는 든든한 우군만이 생겼을 뿐이다. 반려자를 정말 잘 만났다는 신뢰만이 더 커졌다. 얘기하길 잘 했다고 생각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말할걸 그랬다는 생각도 했다.
노웨딩이라는 웨딩로망을 이룰 수 있겠다는 기대감,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큰 안도감을 준 그 날의 대화는 이렇게 끝이 났다.
노웨딩결혼을 말한 첫 날이었다.
BEHIND : 두둘의 이야기
두팔이 기억력이 선택적으로 안 좋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지경인줄은 몰랐네요. 저에게 언제 결혼식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나나봐요. 이렇게 중요한 걸 왜 기억을 못할까요. 이따가 두팔이한테 진지하게 얘기 좀 해봐야겠어요. (여보! 나 좀 봐요!)
노웨딩을 원한 두팔이의 생각은 사귀고 얼마 안 지나서부터 알고 있었어요. 무한리필 고기집에서 저한테 본인의 생각을 조금 말해줬거든요. 그 때부터 ‘두팔이가 결혼식을 안 하고 싶어하는구나.’하고 알고 있어서 나중에 이야기를 꺼낼 때는 전혀 놀라지 않았어요. 고기집에서는 이렇게까지 확실히 말한 건 아니었지만요.
그리고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도, 어쩌면 다행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친구들이나 친척들 결혼식에 가면 괜히 마음이 찡해지면서 신부입장부터 눈물이 핑 돌고 신랑신부가 부모님께 인사할 때엔 오열하다시피 울었거든요. 그래서 제 결혼식엔 얼마나 많이 울지 걱정이 있었는데, 두팔이의 노웨딩 이야기를 듣고는 그런 면에서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반지를 빼고는 결혼식에 대해서 욕심도 없었고요.
그러니까 두팔이는 기억을 못 하지만, 저는 두팔이의 생각을 일찍 들었고, 이 사람이랑 결혼을 하게 된다면 결혼식을 안 할 수도 있겠구나 미리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고, 결혼식을 안 하는 게 어떤 면에서는 좋기까지 해서 별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오히려 두팔이가 저보다 걱정이 많았던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