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장 고르기
아빠 : 한번 직접 가보라니까?
아빠는 몇 번이고 답사를 얘기하셨다. 직접 가보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장소를 정하라는 거였다. 백년가약을 맺을 뜻깊은 행사를 치를 곳이니, 그 정도는 해야한다는 거였다.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혼을 하는 거지, 결혼식은 안 하잖는가. 그러면 뭐 밥 한 끼 먹는 건데, 밥 먹는 게 그냥 밥 먹는 거지 그렇게 별날 것이 있나, 라고 생각했다. 과하게 공을 들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신랑 신부 입장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특별난 공간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딱 상견례 정도. 식구들이 모여서 한 끼 하기에 적당히 알맞은 곳. 괜찮은 곳, 괜찮은 자리를 괜찮은 날 예약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필요성도 못 느끼는 일을 이렇게 자꾸 강요당하다니. 귀찮았다.
두팔 : 그러죠 뭐
하지만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생각을 바꾼 거다. 아빠의 끈질긴 제안 때문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간절한 설득도, 그래도 결혼이니까 하는 마음도 아니었다. 그저 두둘이와 재밌기 위해서였다. 데이트 하면서 놀기 위해서였다. 이참에 두둘이와 서울을 돌아다니면서 특색있는 데이트인 셈 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마치 예능 프로그램에서 당일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서울 시내 몇 개의 스팟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놀면 재밌겠다 싶었다.
그렇게 답사가 목적이 아닌 답사를 시작했다.
예능 프로그램과 달리 우리에게는 미션 장소를 공지해주는 PD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미션을 스스로 정해야 했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날의 메뉴였다. 우리의 행사는 ‘밥 한 끼 먹는' 컨셉이었기 때문에 메뉴 선택이 꽤 중요했다. 메뉴는 단지 메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다. 가령 일식이라면 다다미가 깔린 고요한 방에서 젓가락 소리를 배경삼아 식사를 할 것이고, 양식이라면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식탁에서 포크로 파스타면을 둘둘 말아 먹을 것이다.
중요성에 비해서는 큰 고민 없이, 우리는 한식을 먹기로 했다. 일식당은 두팔이 두둘 가족들과 만날 때, 중식당은 반대로 두둘이 두팔 가족들과 만날 때 간 전적이 있어서 제외했고, 양식은 할머니가 계시니까 뺐다. 메뉴도 공간도 한식이 제일 무난했다.
메뉴를 골랐으니 이제 식당을 특정할 차례다. 우리가 주로 따져봤던 건 분위기와 서비스와 위치였다. 가격은 약간 제쳐두었다. 평소였으면 무지하게 따졌을 가성비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써보겠어’하는 마음도 컸다. 웨딩만 엮였다 하면 비싸지는 게 이런 이유인가보다. 결혼하는 사람들은 다 비슷한 마음일 테니.
분위기, 서비스, 위치
어쨌든 우리가 따져본 건 이렇다. 첫째, 분위기. 단정하고 정갈하며 너무 바쁘지 않고 여유있는 곳일 것. 후다닥 들어가서 밥만 먹고 나올 건 아니니까, 우리가 시간을 꽤 쓰더라도 눈치보지 않아도 되는 곳일 것. 둘째, 서비스. 기분 좋은 행사를 하는 날이니까, 기분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일정 정도 이상의 서비스 마인드를 갖춘 곳일 것. 셋째, 위치. 서울 시내에 있을 것. 할머니가 차로 움직이셔야 하니까, 그 이동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일 것.
이에 따라 우리가 정한 답사장소는 아래(가칭으로 표기)와 같다.
석빨강
조선의 방
동래헌
심청루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고르고 보니 전부 한옥이었다. 아무래도 한정식집이라 그랬을 거다. 이 중에서 석빨강은 이미 우리가 원하는 시즌에 예약이 꽉 차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세 군데만 둘러보게 되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조선의 방이었다. 최대 장점은 역시나 접근성.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데다가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2분 이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오가기가 아주 수월했다. 차가 막히지만 않는다면, 할머니가 출발할 장소로부터 30분이면 충분했다. 분위기나 서비스 역시 무난했다. 원래 한국의 집은 전통혼례를 하는 웨딩홀이기 때문에, 분위기나 서비스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독채를 쓸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일반적인 웨딩홀은 커다란 건물 하나에 에메랄드 홀이니 그랜드블룸 홀이니 하며 예식 장소들이 쪼개져 있는 모양이라면, 조선의 방은 팀마다 독채를 쓰기 때문에 복잡함이 덜 했고 우리만의 행사를 충분히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로 결정을 하지 못 하고 잠시 보류했다. 조선의 방의 최대 장점이 우리에게는 그리 결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는 건 일반적인 경우에는 큰 장점이겠지만 우리는 어차피 하객이 없는 결혼이기 때문에 썩 유의미한 메리트는 아니었다.
건물들의 컨디션도 우리를 저어하게 만드는 큰 단점이었다. 답사 당시 조선의 방은 일부 건물이 공사중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뜰과 정원이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답답해보였고, 건물 외관도 적잖이 낡아보였다. 독채라는 건 좋았지만, 창틀과 문틀마다 먼지가 많이 쌓여있었고, 벌레들도 사방팔방 많았다. 여름철인데다가 공사까지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그런 걸 감안한다해도 좀 심해보였다.
종합적으로 우리가 기대했던 고즈넉한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다음은 동래헌. 유명 호텔 내에 위치한 한정식집으로, 마음 속으로 이미 찜해두고 있던 곳이었다. 위치가 다소 아쉽긴 했지만 호텔 안에 있는만큼 차로 접근하기가 용이해서 크리티컬한 단점은 아니었다. 오히려 결혼 당일, 교통 체증이나 주차 문제로 인한 돌발 변수도 없을 것 같았었다.
그림도 좋았다. 예스러우면서도 모던했다. 조선의 방에 비해서 훨씬 깨끗하고 단아한 느낌을 곳곳에서 받을 수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뜰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잔디마저 가지런했다. 거뭇한 석재로 만들어 놓은 돌길이 입구에서부터 건물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주 보기 좋았다. 비교적 서울 외곽에 있는 곳이라 하늘을 가리는 게 없어서 탁 트인 느낌도 들었다.
이름 있는 한정식집답게 메뉴 구성도 마음에 들었다. 리뷰들을 찾아보니 맛도 좋다고 했다. 가격도 좋았다. 매일 올만한 가격은 아니지만 기념일에 한 번쯤 올 수 있는 수준이었다. 비용적으로 메리트를 느낀 데에는 대여비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조선의 방이나 심청루는 수 백 만원 대의 장소 대여비를 부담해야 하는데, 동래헌은 그게 없으니 상대적으로 굉장히 저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답사를 하던 날도 손님들로 식당이 꽉 차있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좋은 식당에 손님이 많은 건 당연할 거고, 손님이 많다는 건 좋은 식당이라는 방증일 수도 있지만,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우글거리니 번잡스럽게 느껴졌다. 조선의 방을 먼저 봤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독채를 독립적인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한국의 집과 달리, 동래헌에서 우리가 쓸 수 있는 공간은 딱 방 한 칸이었다. 동래헌은 몇 개의 독채들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라, 한옥 모양으로 된 1층짜리 건물 하나였다. 그 건물 안에 여러 개로 나눠진 방에서 종업원들이 날라다주는 음식을 먹는데, 사람이 많으니 옆 방에서 떠드는 소리들도 시끄럽게 다 들렸고 서버들은 정신 없이 손님들을 응대하기 바빴다. 정신이 없었다. 그래, 그냥 음식점이었다.
두 곳 모두 장점도 있지만 뚜렷한 단점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 한 상태. 우리는 마지막으로 심청루를 방문하게 되었다. 여기마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새로운 곳을 찾아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직접 가보니, 생각보다 위치가 좋았다.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차 밀릴 걱정을 해야 하는 한국의 집, 외곽에 있어서 멀리까지 가야하는 동래헌과는 달리 삼청각은 서울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서 차가 막힐 걱정도, 멀리까지 갈 걱정도 없었다. 할머니는 20분만 차를 타시면 됐다.
무엇보다 빼어나게 괜찮았던 건 풍경이었다. 조선의 방도 독채가 여럿 있었고, 동래헌도 잘 관리된 정원을 자랑했지만, 심청루의 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체급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산 중턱에 지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주변 산세를 끼고 있었고, 관리하는 정원도 그에 걸맞는 무드로 잘 맞춰두었다. 여러 독채들이 각기의 매력을 뽐내며 세워져있었고, 기와가 얹어진 돌담들은 고풍스러운 풍경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예식 전후에 산책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아보였다.
우리의 목적과 상황에 따라 개성이 다른 독채들을 고를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는 심청루 리뉴얼 직후에 방문을 했고, 덕분에 예약이 꽉 차있지 않아서 선택의 범위가 넓었다.) 심청루도 조선의 방처럼 웨딩홀로 쓰이곤 하는데, 최대 150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있었고, 최소 보증인원이 20명부터인 작은 곳도 있었다. 건물들은 서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만의 행사를 오롯하게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답사를 맞이해주시는 자세를 보니, 서비스도 전혀 걱정할 게 못 되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가격이었다. 우리는 가족끼리 밥 한 번 먹는 조용한 장소를 찾는 것이었고, 하객을 따로 모시지 않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공간 대여비가 있으면 객단가가 확 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청루는 동래헌과는 달리 공간을 빌리는 값을 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는데, 꽃장식이라도 할라치면 가격은 또 뛰었고, 신랑 신부를 빼면 고작 8명인데 20명의 최소 보증인원 값을 내야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최종적으로 심청루를 골랐다. 거의 유일한 단점이었던 가격은 애초부터 부수적으로만 고려하자고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타이밍이 재오픈 시점과 들어맞아서 최소 보증인원을 줄이는 특별 협상에 성공하기도 했다.
답사를 하면서 대학교 새내기 시절이 떠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1학년이 되던 때. 학교 주변 맛집을 알려주겠다며 선배들이 이 집 저 집을 데려가 주셨더랬다. 그래서 여기 저기 많은 밥집들을 가봤고, 게 중에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곳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밥집 특유의 그 분위기를 벗어난 곳은 없었다. 밥집은 밥집이었다. 아무리 좋은 곳을 가도, 결국 밥집은 다 밥집이었다.
만약 아빠가 답사를 가라며 내게 재차 삼차 성화를 내지 않으셨더라면, 난 아마 후회했을 거다.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머릿속으로 그렸었던 모습과 실제는 꽤나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곳도 밥집은 밥집이었고, 특별한 날만을 위해 꾸며진 곳들은 확실히 달랐다.
미리 사전답사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적당히 훌륭한 한식당을 예약했을 테다. 그리고는 당일, 생각과는 다른 분위기에 당황도 하고 후회도 했겠지. 우리가 준비한 세레모니들 중 상당수는 제대로 하지도 못 했겠지. 이래서 다들 답사 답사 하나보다.
다시 되짚어 봐도, 우리는 적당한 행운과 적당한 참견 덕에 장소를 잘 마련할 수 있었고, 당일 행사도 별 탈 없이 잘 마칠 수 있었다. 우리가 준비한 모든 세레모니들을 빠짐 없이 잘 치를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저녁 시간대를 고른 덕에 여유 가득히 우리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너무 좋았다. 모두에게, 모든 상황에게 참 감사할 따름이다.
허나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장소에 있어서 말이다.
결혼을 단 5일 남겨둔 때, 문제가 터졌다.
COOKIE : 못 다 한 이야기
결혼할 곳을 고르면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하객 없는 결혼을 하는 것 치고 선택지를 폭넓게 가져가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계시니까 한식이었고, 또 할머니가 계시니까 이동 부담이 많지 않도록 먼 곳은 제외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의 조건에 맞는 장소를 찾아보았기 때문에 본문에 적은 네 곳을 후보지로 정했지만, 상황에 따라 충분히 다양한 선택들이 가능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서울 시내만 하더라도 메뉴에 따라 개인 카페나 작은 레스토랑을 빌려도 되겠다. 카페를 빌렸다면 출장 요리를 불러도 될 것 같고, 레스토랑을 빌렸다면 그 곳의 메뉴(일테면 양식)를 즐겨도 좋을 것 같다. 하객의 규모도 잘 고려해야겠지만 말이다.
서울 밖으로 나간다면 선택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석파랑이나 삼청각 같은 곳들이 교외에는 여럿 더 있는 데다가, 아예 펜션 같은 걸 하나 빌려도 된다. 파티업체만 하나 껴도 서양처럼 가든파티 형식의 결혼식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아이디어만 잘 짠다면 결혼식의 모습은 생각보다 굉장히 다양해진다. 품은 좀 들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