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들 한복 빌리기
결혼하는 날, 우리는 딱 두 벌의 옷을 빌렸다. 신부의 웨딩드레스도 신랑의 턱시도도 아니었다. 한복. 양가 어머님 두 분을 위한 한복이었다.
당일의 드레스코드를 정하면서 우리는 가급적 힘을 뺐다. 신랑도 예복이 아닌 양복을 입고, 신부도 인터넷으로 주문한 옷을 입기로 했으니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신랑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단정한 복장’으로 얘기를 해뒀다. 남자들은 무난히 양복을 입으면 될 거고, 여자들도 원피스든 투피스든 쓰리피스든 적당히 포멀하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들 한복을 하기로 했다. 두 분의 아들 딸, 나와 두둘이의 작은 욕심 때문이다. 식사 전후로 가족사진도 찍을 거고, 현장에 계신 포토그래퍼가 우리들 모습을 카메라에 계속 담아주실 건데, 이왕이면 두 분이 곱게 나왔으면 좋겠다는 욕심 말이다.
두 분에게 한복이 참 잘 어울린 탓이다.
한복대여점은 생각보다 정말 많았다. 웨딩의 메카인 청담이나 강남 등지는 물론이고, 과거 반지나 목걸이, 시계, 이불, 한복 따위로 유명했던 종로5가 일대에도 한복대여점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 많던 이불집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시대가 바뀌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우리는 두 분의 한복을 어떻게 빌릴까 논의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다 같이 만나서 옷을 직접 입어보자는 것. 아무래도 옷이니까 직접 보고, 시착도 해보고, 눈으로 보고나서 고르는 게 나을 거였다.
그런데 우리집은 서울 강북쪽, 두둘이네는 경기 남부여서 각각 종로와 강남이 가까웠다. 시간을 맞추기도 어렵고 장소를 고르기도 어렵고. 게다가 아무리 좋은 분들이라고 해도 두 분은 서로 사돈사이. 어렵고도 어려운 사이잖는가. 톤 정도만 협의하고 각자 고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가 나왔다. 한복대여점 중 일부는 체인점처럼 운영되기 때문에 따로 고른다 해서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곳에서 하기로 했다. 가능한 한 불확실성을 줄이자는 생각에서였다. 어머님 두 분도 기꺼이 그러자 해주셨고 말이다.
우리는 강남쪽이 아닌 종로쪽을 택했다. 당일 장소인 심청루와도 가까웠고, 엄마가 계신 곳에서도 지척이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이쪽이 더 나았다. 대신 먼 길을 하시는 장모님께는 내가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 말씀드렸다.
두팔 : 오셨어요! 아유 더우시죠!
장모님 : 아이구 우리 사위. 얼굴이 더 좋아졌네. 사돈댁,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종로5가 쥬얼리타운 앞에서 우리는 만났다. 나와 두둘, 두 분 어머님까지 총 넷이었다. 다들 구면이었지만 이 조합으로 만나는 건 또 처음이었다.
엄마 : 네, 덕분에요. 잘 지내셨죠? 두둘이도 어서와라.
두둘 : 네에 어머님! 잘 지내셨어요?
귀금속거리라 하면, 알 사람들은 다 알 거다. 부모님 세대만해도 결혼을 하면 여기서 예물을 맞추셨더랬지. 지금은 웨딩링도 종로보다 백화점에서 더 많이들 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건물 안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꽤나 달랐다. 분명 이름은 쥬얼리타운인데, 막상 안에 들어가보니 층 전체가 한복 대여점으로 꽉 차있었다. 북적댈만큼 손님이 많았던 건 아니지만, 우리 말고도 여러 팀이 더 있었다. 혼인율이 바닥을 치고 있어도 할 사람은 하는구나 싶었다.
한 층을 올라가 몇 개의 간판을 지나쳐서, 우리는 한 대여점 앞에 섰다. 두둘이가 미리 찾아보고 예약을 해둔 첫 번째 가게였다.
점원A : 어서오세요~ 신부님이 예약하셨죠?
두둘 : 네, 두둘이요.
한복대여점은 미리 날짜와 시간을 예약해두지 않으면 피팅을 할 수가 없다. 그냥 구경할 게 아니라면 예약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인기있는 곳들은 진작 풀부킹이다. 특히 주말에는 더더욱 그러해서, 일찌감치 일정을 조율하고 예약해두는 것이 유리하다. 이 곳도 두둘이가 몇 군데에 전화를 돌린 끝에 가까스로 잡은 곳이었다.
점원A : 이쪽부터 이쪽까지가 저희 옷들이에요. 뭐 생각하고 오신 거 있나요? 화려한 거? 단아한 거?
한복이 다 거기서 거기지 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신라-고려-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더라도, 해방 이후부터라도 쌓여온 수십 년의 세월동안 한복의 디자인은 다양해져왔고, 유행도 몇 순배는 돌았으며,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형태의 새로운 한복들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장모님 : 아무래도 좀 화사한 게 좋지 않을까요? 너무 칙칙하면 좀 그러니까?
그래서 사람마다 선호하는 한복의 스타일이 다를 수 있고, 특정 대여점에 본인의 취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최소한 서너군데는 돌아다녀보는 게 좋다.
엄마 : 너무 칙칙한 건 그렇지만, 깔끔한 건 어떠세요? 애들 옆에서 사진 찍는데 너무 튈까봐.
당장 두 분의 스타일도 달랐다. 무늬가 많고 화려한 걸 좋아하는 장모님과 모던한 단색 계열을 좋아하는 엄마. 거의 정반대의 취향이었다. 나와 두둘이는 눈짓을 주고 받았다. 이거 큰일났다.
가게에서는 몇 벌의 한복을 소개해주셨고, 장모님과 엄마는 거울 앞에서 옷을 대보기도 하셨지만 맘에 쏙 드는 건 없으신 모양이었다.
두팔 : 한번 입어보셔요!
두둘 : 맞아요. 보는 거랑 입는 거랑은 다르니까 한번 입어보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는 두 분께 피팅을 권했다. 두 분은 그럴까 하시다가, 충격적인 소리를 들으시곤 한 마음 한 뜻으로 손을 내저으셨다.
엄마 : 뭐? 옷을 입어만 보는데 돈을 낸다고?
두팔 : 네. 만원인가? 만오천원? 기억이 잘 안 나네.
엄마 : 야, 너무 비싸다.
한복 대여점에서는 피팅비라는 명목으로 별도의 값을 받았다. 대여를 하지 않더라도, 대여점에서 옷을 입어보는 것만으로도 돈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한 벌당 얼마씩. 여러벌을 입으면 그만큼 내는 돈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신랑 신부에게 자본주의는 너무 가혹하다.
장모님 : 세상에, 원래 이런거야?
두둘 : 응, 대여점은 원래 다 이래. 그래도 엄마 여기까지 왔는데 입어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장모님 : 맘에 드는 옷 찾으면 그 때 입어볼게. 지금은 아니다 야.
두 분의 취향은 서로 달랐지만, 이 때의 생각만큼은 같으셨다.
피팅 없이 첫 번째 가게를 나와서 두 번째 예약장소로 향했다. 조명도 밝고, 일하는 사람도 더 밝았다. 결정적으로 두 분의 표정도 더 밝았다.
장모님 : 어머 이거 괜찮다. 이것도 괜찮네. 그렇지 않아요 사돈?
엄마 : 그러게요. 이런 것들은 괜찮네요.
같은 옷을 보고 같이 호감을 표하는 일들도 생겼다. 물론 두 분이 한 발씩 양보하시긴 했지만 말이다.
두 번째 대여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두 분은 피팅을 해보셨다. 돈이 든다니까 꽤나 신중하게 고르셨지만, 어쨌든 입어볼만큼 마음에 드는 옷을 찾으신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전체적으로는 파스텔톤으로 튀지 않으면서도, 상의에는 흰 색으로 꽃무늬의 장식이 있는 옷. 두 분의 중간에 있는 옷이었다.
그 뒤로 두 분은 몇 벌의 옷을 더 입어보셨다. 그러더니 최종 선택은 처음 피팅한 그 옷. 맞다. 시험에서도 꼭 답을 바꾸면 틀리더라. 처음 찍은 그 답이 맞는 거다.
여러 번의 피팅을 했지만 우리가 지불할 피팅비는 없었다. 입어본 곳에서 대여를 하게 되면 피팅비를 따로 안 받기 때문이다. 참 독특한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빌리면 여러 부속품들도 함께 딸려온다. 옷고름에 매다는 장식, 머리에 꽂는 비녀, 손이 허전하지 않게 채워주는 백. 그 외에도 몇 가지들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당일에 사진 찍기에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여하튼 이 곳으로 낙점하면서 예정되어 있던 세 번째 대여점 방문은 전격 취소되었다.
점원B : 지금 말씀드린 건 전부 다 현금가고요, 카드로 하시면 10% 추가 요금 붙으세요.
아쉬운 얘기를 하나 더 해야겠다. 돈 문제다.
두팔 : 그럼 어쩔 수 없이 현금해야죠 뭐.
소비자 입장에서는 카드와 현금이 꽤 다르다. 카드로 계산하게 되면 청구할인, 포인트적립, 실적채우기 등등 본인의 상황에 맞는 이득을 쏠쏠히 챙길 수 있다. 물론 상인 입장에서 카드 수수료가 부담스럽다는 걸 공감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복 대여료도 부담스러운 걸. 결코 싼 값도 아니고 말이다.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고 아등바등하는 서민들에게 눈치를 주는 듯 해서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심지어 10%다. 현금으로 50만원이던 게 카드로는 55만원이다. 이거 불법 아닌가? 카드수수료 범위를 넘는 금액을 할인해주는 건 불법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두팔 : 현금영수증만 끊어주세요.
점원B : 현금영수증 발행하셔도 똑같으세요. 10% 추가 요금 더 내야되세요.
이건 또 뭔 소린가. 이건 진짜 명명백백 불법 아닌가. 국세청에 신고하고 싶었다.
두둘 : 그냥 넘어가요 오빠. 우리 좋은 날에 입자고 하는 건데. 그냥 좋게 좋게 해요.
다들 그러니까 예비부부를 호구로 보지!라는 말이 목젖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 두둘이 말이 맞았다. 좋은 일 때문에 괜한 분란 만들 필요는 없지.
우리는 순종적으로 계좌이체를 했다. 우리도 호구가 됐다.
한복을 고르고 나서, 우리는 종로3가에 있는 불고기집으로 향했다.
장모님 : 내가 사줘도 되는데. 마음 써줘서 고마워. 잘 먹을게.
두팔 : 여기까지 오셨는데 당연하죠. 맛있게 드십쇼.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과 함께 종종 외식하던 곳. 새로 가족이 될 사람들과 오니 기분이 남달랐다.
장모님 : 두팔이는 진짜 자상하구나. 고기도 다 구워주고, 한 사람 한 사람 다 나눠주고. 평소에도 그러니?
두둘 : 응, 평소에도 그래. 다른 사람들한텐 모르겠는데, 나랑 둘이 가서도 맨날 이렇게 다 해줘.
장모님 : 하이고, 우리 두둘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났대 정말.
아까 본 한복이 마음에 드셨는지 장모님은 연신 예비사위를 띄워주셨다. 그럼 이제 우리 엄마도 며느리 칭찬을 할 차례.
엄마 : 두팔이가 착하고 예의바르다는 소리는 정말 많이 들었죠.
엥 이게 아닌데. 왜 엄마까지 내 칭찬을 하는 거지.
두둘 : 맞아요, 두팔이가 어른들한테도 잘 하더라고요. 말도 잘 하고. 친척 어른들이 다 좋아하셨어요.
엄마 : 그치? 맞아 그랬을 거야. 앞으로도 잘 해야할 텐데.
도무지 맥락을 못 찾는 엄마였다.
BEHIND : 두둘의 이야기
함께 한복을 보러 돌아다닌 뒤 했던 저녁 자리에서 저희 엄마는 두팔이에게 마음이 활짝 열렸어요. 그 전에도 두팔이가 저희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기도 했고, 상견례 때도 얼굴을 또 봤었지만 아무래도 딱딱한 자리들이잖아요? 한복투어는 비교적 편한 분위기였어서 두팔이의 자상한 본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 같아요. 엄마는 집에 돌아가서 아빠한테 ‘우리 두팔이가 정말 자상하다’며 계속 칭찬을 해서 아빠에게 ’언제부터 [우리 두팔이]가 됐냐‘며 놀림을 당하기도 하셨어요.
그래서 제게 저 날은 굉장히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날이었어요. 한복 대여의 가격이나 빌리면서의 부당함 같은 것들은 다 잊을 정도로요. 그 당시에는 두팔이랑 함께 궁시렁거리기까지 했으면서요.
어머님들께 한복을 입어달라고 말씀드린 건 정말 잘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한복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그 날 행사도 우아했고 사진도 예쁘게 나왔어요. 두 분 다 한복이 정말 잘 어울리시더라고요. 신부 드레스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갔지만 전혀 아깝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