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즈
2023년 9월 15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1면에 기사가 하나 실렸다. ‘결혼을 위한 허들 : 600만원짜리 화려한 프로포즈’라는 제목. 어느덧 우리 세대에게 ‘정석’이 되어버린 K-프로포즈에 대한 기사였다. 내용인즉슨, 너무 비싼 프로포즈 때문에 한국의 혼인률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 우리나라의 낮은 혼인률을 어찌 단 하나의 원인으로 진단할 수 있겠냐만은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도 없지 않았다.
외국인의 눈에 우리의 프로포즈 문화가 과해보였나보다. 하나 하나 상세하게도 소개를 해놓았다. 1박에 150만원 가량의 호텔방을 잡고, MARRY ME라고 써진 풍선을 띄우고, 테이블에는 꽃다발과 샴페인. 그리고 명품 아이템을 하나 준비해놔야 한단다. 기사에서는 티파니 주얼리를 얘기했지만, 그간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빽이 더 많이 거론됐던 것 같다. 샤넬이랄지 프라다랄지 뭐 그런 거 말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정말 누추하기 짝이 없는 프로포즈를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하잘 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프로포즈. 우리의 프로포즈다.
프로포즈라는 것 자체가 사실 좀 어색했다. 변질된 건지 아니면 변화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어서 맞닥뜨린 프로포즈는 어렸을 때 이해하던 그 개념이 아니었다.
본디 프로포즈라는 건 연인 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결혼을 해달라고 구애하는 게 아니었나? 구애인지 구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데 프로포즈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프로포즈 썰들을 들었지만 순수한 의미에서의 프로포즈는 손에 꼽았다. 절대 다수의 경우, 프로포즈를 하는 시점에는 이미 두 사람 사이에서 결혼 얘기가 마무리 된 상태였다. 이미 결혼을 하기로 양측이 전격 합의한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프로포즈는 그냥 이벤트였다. 대부분은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프로포즈도 안 하고 결혼을 하면 남은 평생 구박을 당한다는 카더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프로포즈 역시 그랬다. 결혼을 하기로 하고 3개월 쯤 뒤였던 것 같다.
그 날은 두둘이의 생일이었다. 그간 서른 번이 넘는 생일을 겪은 두둘이었지만, 나와 함께 한 적은 없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첫 두둘탄신일이었다.
내 생일은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극히 최근이었다. 두둘이 생일보다 내 생일이 딱 두 달 정도 빨랐다.
내 생일날, 두둘이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 표시를 했다. 내가 평소에 갖고 싶다고 말했던 아이템 중 하나. 아이패드였다. 에어도 아니고 미니도 아니고 무려 프로. 오프라인 대리점에서 제 값을 다 주고 산. 와, 이게 얼마짜리야 대체.
두팔 : 진짜 너무 너무 고마운데, 아니 이걸 우리가 제 값 다 주고 살 필요는 없잖아요. 이거 환불하고, 나 인터넷으로 주문해줘요. 그게 더 쌀 텐데.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이면 모르겠지만 우리끼리 이럴 필요 없지 않냐는 말이었다. 두둘은 단호히 대답했다.
두둘 : 오빠, 선물이란 게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게 그게 아니지. 그냥 써요. 내 마음 생각해서.
이렇게 극진한 선물을 받고, 불과 두 달 후에 있는 두둘이 생일. 최소한 내가 받은 거 이상으로는 해줘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선물 고민을 엄청 했다. 내가 뭘 주면 좋을까. 뭘 줄 수 있을까. 두둘이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지만 두둘이는 필요한 게 없다고 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고민만 길어지고 두둘이 생일이 임박해올 무렵, 두둘이가 했던 말을 생각해냈다. 두둘이가 받고 싶다던 게 있었다.
두둘 : 나 받고 싶은 프로포즈 있어요.
정확히는 선물은 아니고 프로포즈였지만, 어쨌든 무언가 받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 첫 번째 생일인데 받고 싶은 걸 줘야지. 물질적인 것도 좋지만 평생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무언가도 충분히 좋지 않을까. 생일 선물로 프로포즈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팔 : 뭐에요? 말해줘요.
두팔 : 딴 건 다 됐고, 편지 써줬으면 좋겠어요. 손으로 쓴 거. 그게 받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냥 쓰면 되지, 뭐 준비랄게 있나 싶은 사람들도 있을 거다. 아마 그 사람들은 명필이 분명하다. 나 같은 악필에게 손편지라 함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선비가 난을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글씨를 쓴다기 보다 글자를 그려내는 것. 종이에 글을 적는다기보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거의 그 정도의 일이다.
좌우지간 글부터 썼다. 생긴 것도 생긴 거지만 콘텐츠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모니터에 워드 프로그램을 띄워두고 썼다 지웠다를 한참 반복했다. 하루만에 쓰지도 않았다.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테지만, 꼭 어제 새벽에 쓴 글을 오늘 다시 읽으면 그렇게 오글거릴 수가 없다. 모르긴 몰라도 프로포즈 편지는 두둘이가 평생을 소장할 터. 몇 번 봐도 오글거리지 않을 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며칠을 두고 퇴고했다.
얼추 초안이 나오면서, 편지지를 구하러 돌아다녔다. 따뜻하고 은은하되 화려하고 강렬하지는 않은 것. 대놓고 러브러브하지는 않지만 프로포즈 냄새가 풍기는 디자인일 것. 다행히 동네 문구점에서 그럴싸한 놈을 찾을 수 있었다. 파스텔톤 베이지색에 커플 펭귄이 그려진 편지지. 나쁘지 않았다.
편지지는 총 세 묶음을 샀다. 한 묶음 당 2천원씩 총 6천원. 소논문 쓰듯 십 몇 장을 쓸 건 아니었고, 망쳤을 때 다시 쓸 요량이었다. 말했다시피 악필들에게 손편지는 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일필휘지 그릴 수는 없기 때문에 스페어 편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초안을 바탕으로 편지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씨가 너무 커서 별로, 이번엔 또 작아서 별로. 글씨체가 너무 흩날려서 별로, 이번엔 또 또박거려서 별로. 글이 너무 빼곡해서 별로, 이번엔 또 헐거워서 별로. 편지지 세 세트를 거의 다 소진하며, 두둘이에게 줄 첫 번째 생일 선물이 완성됐다. 총 5페이지짜리 편지 하나. 두둘이가 좋아해줘야 할 텐데.
워낙 소박했던 프로포즈라 당일 얘기는 크게 늘어놓을 것이 없다. 생일 저녁인데 뭘 먹고 싶냐는 내 말에 두둘이 답은 파스타. 그래서 집에서 로제 파스타를 해줬던 것 같다. 에어프라이어에서 구운 새우를 몇 마리 얹어서. 뭐 케익도 했고 괜찮은 와인도 한 병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더 특별한 건 없었다.
그러고보니 파스타도 새우도 케익도 와인도 전부 생일상이었다. 프로포즈만을 위한 비용은 딱 6천원이 전부였던 거 같다. 편지지 세 묶음. 한 묶음 당 2천원씩.
하지만 프로포즈는 대성공이었다. 밥을 먹고 식탁을 치우기 전에, 나는 미리 숨겨놓았던 편지를 꺼내 두둘이에게 건내주었다. 지금 이거, 프로포즈라는 말과 함께.
편지봉투를 본 순간부터, 두둘이는 계속 울었다. 편지를 읽어주는 내내, 울고 또 울었다.
두둘 : 뭐야 진짜. 나 울게 하려고 얘기도 안 하고.
두팔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울게 하려고 했다니.
두둘 : 왜 얘기 안 했어요 편지 썼다고. 힝 전혀 몰랐어 진짜.
한참을 울고 난 두둘이가 원망섞인 애교를 부렸다.
두팔 : 그리고 미리 사두지는 못 했지만, 비행기랑 숙소도 선물이에요.
두둘 : 비행기랑 숙소요? 그게 뭐에요?
두팔 : 우리 결혼 전에 제주도 여행가자고 했었잖아요. 그거 내가 할게요.
아직 날짜를 정하지 않아서 준비할 수는 없었지만, 두둘이에게 여행도 선물했다. 우리는 결혼 전에 제주도에 여행을 가자고 얘기해뒀었다. 그런데 그 제주도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스냅사진을 곁들인 여행으로, 우리에겐 스튜디오 웨딩 촬영을 갈음하는 의미가 있었다. 편지 프로포즈와 궁합이 좋은 선물세트였다.
두팔 : 근데 편지는 진짜 몰랐어요? 나 이거 거의 일주일도 넘게 썼어요. 편지지도 내 방에 계속 있었는데?
두둘 : 진짜요? 근데 왜 못 봤죠 내가.
두팔 : 그거야 내 여자친구가 눈치가 없...
들킬까봐 조마조마 했던 건 사실이다. 혹시나 내가 편지를 쓰고 있을 때, 내 눈과 귀 밖으로 두둘이가 불쑥 내 방문을 열면 어쩌나 싶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눈치가 없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었지 정말.
두둘 : 네? 생일인데 이런다고요? 프로포즈하면서? 여자친구를 놀려요?
두팔 : 앗, 맞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어느 프로포즈보다 누추하지만, 어느 프로포즈보다 행복했던 우리의 프로포즈. 이 날로부터 8개월이 채 못 되어서, 우리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결혼했음을 선언했다.
명품백이 얼마고, 호텔방이 얼마고, 샴페인에 꽃다발에 룸서비스가 또 얼마고. 그렇게 600만원짜리 프로포즈를 하는 게 나쁠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상대방이 좋아만 한다면 그게 무슨 문제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선물해주는 게 왜 욕먹을 일인가. 그건 아름다운 일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천편일률적인 게 나쁠까. 이 역시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만보면 우리 주변에는 틀에 박힌 것들 투성이다. 술은 적당히 마시는 게 좋고, 잠은 밤에 자는 게 좋고, 실비보험은 들어두는 게 좋다. 모든 사람이 죄다 똑같은 걸 한다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는 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건 나쁜 것 같다. 600만원짜리 프로포즈가 마치 유일한 선택지인 것처럼 분위기를 몰고가는 것. 그 정도도 받지 못하는 여자는 사랑받지 못하는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 정도도 해주지 못하는 남자는 능력도 없으면서 결혼을 바라는 몰염치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건 분명히 나쁜 거 같다.
앞으로 반평생을 같이 할 남녀. 두 사람의 일은 오직 두 사람만 안다. 화려한 프로포즈랍시고 사방팔방 뽐낼 필요도 없고, 소박한 프로포즈랍시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의 취향과 서로가 처한 환경을 고려해서 서로에게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거다. 굳이 600만원짜리 프로포즈를 SNS에 자랑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거다. 새로 시작하는 부부 앞에는 더욱 소중할 시간들이 저렇게나 한가득히 쌓여있을 텐데. 결혼 후, 나와 두둘이가 쌓아온 수많은 행복들처럼.
딱히 내가 6천원짜리 프로포즈를 해서 하는 변명이 아니다. 진짜 아니다. 진짜. 어어? 진짜라니까?
BEHIND : 두둘의 이야기
저는 결혼식에 큰 로망이 없었던 것처럼 프로포즈에도 큰 로망이 없었어요. 두팔이만 노났죠. 이렇게 편하게 해주는 여자친구가 또 어딨담.
물론 저도 비싼 가방이나 반지를 받으면 좋긴 했겠죠. 하지만 그건 그냥 좋은 거고, 진짜 받고 싶었던 건 편지였어요. 프로포즈 전에 결혼하자는 말은 이미 나왔고 우리가 결혼하는 것도 기정사실 같던 때였지만, 두팔이의 마음이 담긴 편지는 느낌이 좀 달랐어요. 지금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는 의미있는 물건을 계속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이랄까요.
두팔이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저를 훨씬 감동시켰어요. 끽해야 한 두 장 정도 써줄 거라 생각했는데 꽉 채워서 다섯 장이나 써준 것도 그랬고, 내용도 너무 뭉클했어요. 창피해서 여기에 내용을 다 쓸 수는 없지만요.
한 가지는 얘기할 수 있겠네요. 두팔이 공약이었는데요, 자기랑 결혼하면 맛있는 음식을 많이 해주겠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공약을 늘 지켜주고 있어요. 제가 해달라는 요리는 언제나 해줬고, 특별히 뭘 요청하지 않아도 항상 훌륭한 밥상을 차려줬어요. 오늘 저녁도 그랬고요. 그래서 항상 고마워요.
프로포즈에서 좀 아쉬운 점은 사진 찍을 생각을 못 하고 옷을 대충 입었다는 거에요. 사실 프로포즈를 하는지도 몰랐죠 저는. 추리닝을 입고 그 위에 후리스까지 껴입고, 울어서 빨개진 얼굴로 사진을 찍혔어요. 기념이 될 날인데 예쁘게 차려입고 화장도 좀 하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까워요. 미리 귀뜸 좀 해주지!